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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1.18)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1-18 조회수1,447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8년 1월 18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1사무 18,6-9:19,1-7

그 무렵

6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이고 군대와 함께 돌아오자,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7 여인들은 흥겹게

노래를 주고받았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8 사울은 이 말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을 돌리니,

이제 왕권 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

 9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
19,1 사울이 아들 요나탄과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2 이를 다윗에게 알려 주었다.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니, 내일 아침에

조심하게. 피신처에 머무르면서

몸을 숨겨야 하네.

3 그러면 나는 자네가 숨어 있는

 들판으로 나가, 아버지 곁에 서서

자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겠네.

 그러다가 무슨 낌새라도

보이면 자네에게 알려 주지.”
4 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좋게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

임금님의 신하 다윗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임금님께

죄를 지은 적이 없고,

그가 한 일은 임금님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5 그는 목숨을 걸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였고,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임금님께서도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공연히 다윗을 죽이시어,

죄 없는 피를 흘려

죄를 지으려고 하십니까?”

6 사울은 요나탄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

하고 맹세하였다.
7 요나탄은 다윗을 불러

이 모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을 사울에게

데리고 들어가, 전처럼

그 앞에서 지내게 하였다.
복음 마르 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알코올 중독자의 가정에 대해

안타까운 시선을 보냅니다.

자녀를 비롯해서 그 가족들이

얼마나 힘든지를

예상하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알코올 중독자의

가정에서 성장한 어른들 중에

본인 스스로 알코올 중독자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요인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면서 부모를 원망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부모를 따라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멋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은 굳은 결심으로 부모의 모습과

달라지기 위해 결심을 하고

그 태생으로부터 도망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알코올 중독 때문에

내가 잘 될 수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그 부모의 모습을 통해서

더 잘 될 수도 있는 것이고 그 예는

 무궁하다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결국 부모 탓이 아니라,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자신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불평과 원망만으로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삶이 행복한

삶으로 내 자신을 이끌어 줄까요?
주님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님께서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던지는 사람이 과연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어떠한 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고 소리를 질렀지요.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은 분명한 진실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시지요.

진실인데 왜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더러운 영에게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는 진실은 아무런

의미 없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가득한 진실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함구령을

내리지 않습니다. 베드로 역시

똑같은 말을 했었지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똑같은 말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칭찬을

하시며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왜 이렇게 다른 모습을 보이시는 것일까요?

 바로 사랑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습니다.
불평과 원망만으로는 절대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이 담긴 말과 행동에는

주님께서는 칭찬과 함께 커다란

 은총의 선물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할까요?

사랑을 담기 위해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존재가 통째로 섞이는 일입니다

폭풍이 휘몰아쳐 뿌리 뽑힌

자아 위에 생명

하나가 돋는 일이지요.

(김혜영)


베드로는 사랑을 담은 말 덕분에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만지다"

(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중에서)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만질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는 만지지 않고

손으로만 만지는 것보다,

손으로는 만지지 않아도

 믿음으로 만지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손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붙잡을 때도 만졌고,

결박할 때도 만졌고,

매달 때도 만졌습니다.

 만지기는 했지만 악하게

만짐으로써, 자신들이

만진 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오, 가톨릭교회여,

그대는 믿음으로

그분을 만지십시오.

제발 믿음으로 만지십시오.

그대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고만 여긴다면,

그대는 그분을

 땅에서 만진 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버지와

같으신 주님이시라고 믿는다면,

그대는 그분께서 아버지께

올라가시는 바로 그때

그분을 만진 셈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이해하게 될 때,

그분은 우리와 함께 올라가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인상 깊은 말씀입니다.

성인의 말씀처럼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만져야 할까요?

단순히 세상의 관점으로만 주님을

 만지게 된다면 땅에서 만진 셈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으로 만지면

하늘에서 만지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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