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김웅렬신부(거룩한 만남)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2-01 조회수2,116 추천수1 반대(0) 신고

 

"거룩한 만남"

+ 찬미예수님! 

사랑과 공경하는

마음 가지고 여러분에게

새해인사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어찌 보면 우리의 인생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지난 해에도 우리는 많은

만남이 있었고 올 한 해에도

아마 만남이 있을 겁니다.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신의와 배신,

때론 행복과 불행이

엇갈리는 대결의 장이

만남이 아니겠는가?    

카인과 아벨의 만남은

질투와 시기의 만남으로

 불행하게도 인류 최초의

만남은 이렇게

비극으로 끝납니다.

예수님과 유다스의 만남은

배신과 가책의 만남이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만남은 진리를 사랑하는

깊은 내면적인 만남이요.

아우구스티누스와 암브로시오

주교의 만남은

아우구스티누스를

개시키는 회개의 만남이었고.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

성인의 만남은 기울어져 가는

중세교회를 새롭게 재건하는

만남이 되었습니다.

단종과 성소문의 만남은

신의와 충성을 잇는 불멸을

빛나게 했던 만남이었고,

공자와 안회의 만남은

유교를 창립하게 했던

만남이었고,

석가모니와 아난과의 만남은

불교의 기본교리를

정립시키는 만남이었고,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인류의 구원 기반인 교회를

탄생시키는 만남이었습니다.

여러분들과 김웅열

신부와의 만남은 과연

행복한 만남일까,

아니면 불행한 만남일까요?

(웃음)

인간이 선하게 변하느냐,
악하게 변하느냐는 것은

어떤 만남이 있었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예를 들어서

성서공부를 하는

자매들의 만남은 분명히

회개와 감사의 분위기가

될 것입니다.

성경공부하면서 아무도

남을 흉볼 수가 없죠.

그래서 성서를 공부하면

선하게 변합니다.

돈으로 연결되어 있는

계모임의 만남은 자칫

잘못하면 시가와 질투,

허세 등으로 인간적인

정은 있을지 모르나

내적인 평화,

기쁨과는 거리가 멉니다.

 ‘나는 성당에 나갈 때보다

계모임에 은총을 많이 받아.’

이런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십시오.

시집가기 전에는 정말 착했던

자매가 남편을 잘못 만나

 성격이 이상해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사람 사이의 만남은

참 중요합니다.

어떤 만남 이었느냐에

따라서 어쩌면 그 삶의

방향이 바뀔 때도 있죠.

한 달여 전에 50대 중반 된

분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얼굴 표정이 뭔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습니다.

앉아서 얘기를 들어보니

참으로 너무나 반갑고

기뻤습니다.

 “신부님은 저를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32년 전에

신부님이 대위로 군종신부를

할 때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훈련소에서

자대 배치를 받아 나온

이등병이었습니다.

신부님이 연병장을 걸어올 때

자기는 뛰어나가서 신부님한테

매달렸대요. 살려달라고.

그 형제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린 시절 엄마와 같이

정말로 안 해 본 것 없어

커 나갔대요.

어머님 연세가 60을 넘었기

때문에 쉽게 군대를 마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군대가야

된다고 군대를 들어왔대요.

자대 배치를 받고 얼마 후

엄마가 월세 들어 사는

할아버지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엄마가 쓰러졌다는 것에요.

이를 어쩌나? 이 세상 천지에

어머니와 단 둘뿐이었대요.

병 간호할 사람이

자기 밖에 없었대요.

그래서 상관을 찾아가서

지휘관을 찾아가서

 어떻게 집으로 갈 수가

없으니까 하니까,

‘너 같은 처지에

다 내보내졌다가는

대한민국은 누가 지키냐?’

하면서 들은 척도

안 하더래요.

어머님 때문에 군대생활을

할 수가 없었죠.

나중에는 나쁜 마음까지도

들어 ‘탈영을 할까? ’

그러던 참에 제가 연병장을

 가로질러 오더래요.

그래서 뛰어나가서 매달렸대요.

‘집 보내달라고.

우리 어머님 나 없으면

살아나시기 어렵다고.

내가 돌봐드려야 된다고’

처음에는 기억이 안 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가시고

 난 다음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기억이 나요.

32년 전인가 어떤 부대를

 들어갔는데, 사병 하나가

 나오더니 집 좀

보내달라고 매달렸어요.

자초지종을 들었더니,

 어머니가 60이 넘었고

잘 하면 갈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법무참모와 의논했죠..

아무튼 그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냈어요.

의가사 제대라 그러죠?

그분은 그 후에 어머니를

16년인가, 17년인가를

모셨대요.

그리고 자기가 군대를

다 못 마친 것이 안쓰러워서

경찰에 투신을 해

경찰서장 까지 올라왔대요.

세례는 받았냐고 하니

 아직 세례는 못 받았대요.

그럼 이제 세례를 받을 때가

됐다고 토마스라고

세례명도 지어 주었어요. 

그분은 나에게 A4 용지

5장에 자기가 살아왔던

얘기를 적어 주셨어요.

거기 첫 마디가

‘저에게는 하늘같으신

김웅열 신부님.’

만일 그 옛날에 ‘귀찮다.

너 같은 사정 있는 애들이

하나, 둘이겠냐?’

쉽게 넘어갔다면...

글쎄 총을 들고 탈영을 했던지,

뭔 일이 벌어졌을까?

이처럼 만남은 신비스럽습니다.

아마 여러분과 김신부는

피정을 통해서 만날 수

있었을 거고, 아니면 우연히

유투브를 통해서 만났을 수

있었을 거고,

평화방송을 보다가 우연히

만난 분들도 있을 것이고,

또 서운동 신자들은 본당신자와

본당신부의 사이로도

이렇게 하느님이

연을 맺어주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늘 만남을

중요시 여기고 살았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많은 만남 중

여인들의 최고의 만남은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이 아니겠는가?

이 만남은 성령의 만남이었고,

 역사 이래 여인들의

만남 중에 이토록 흥분되고

짜릿한 만남은

분명 없을 겁니다.

엘리사벳은 세례자 요한을

이미 태중에 모셨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한

상태에서 두 여인은 위대한

만남을 갖습니다.

이 두 여인의 만남은

우리들에게 많은

묵상거리를 줍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이 거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첫 번째 그들 사이에 오가는

말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닌가?

만남의 질은 언어의

내용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깡패들이 들이 만나면

처음부터 끝까지가 욕일 겁니다.

사기꾼 둘이 만나면 처음부터

끝까지가 ‘어떻게 하면

저 놈보다 더 위에서

사기를 치나?’

거친 사람들이 만나면

거친 말만 나옵니다.

그 만남이 아름답게 끝날

 것이냐에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떤 언어의 내용이

주고받아 지느냐 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자주자주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말에 대하여

자주 회개해야 합니다.

지난 1년 동안 내가 만났었던

형제․자매들과 대화에서

거짓말들, 상처 주었던 말들,

책임질 수 없었던 말들,

남에 대한 말들. 말과 말씀은

분명히 다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엘리사벳은 마리아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지만

마리아에게 보낸 찬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찬사는 마리아 때문이

아니라 태중의 예수님 때문에

마리아에게 존중을 표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는

감실입니다.

움직이는 감실이요,

걸어 다니는 감실인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됩니다.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고

우리는 존경을 받습니다.    

지금 내가 가족에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는커녕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모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세 번째로 이 두 여인의 만남이

위대한 것은 엘리사벳의 겸손입니다.

나이로 보나 족보로 보나

딸 같은 여동생이었지만

예의를 갖춥니다.

그것은 마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겸손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신 모습니다,

우리말에

 ‘그 어머니의 그 아들’입니다.

태교는 자식에게 중요합니다.

미움과 분노 중에서 아이를

가지고 있으면, 태어난 아기는

난폭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만한 부모 밑에 교만한

자식이 나오는 것이요,

욕심 많은 부모 밑에

탐욕스러운 자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엄마로부터 겸손을 배우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은

태중의 자식은 세상에

나와서도 아름답게 삽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 세상에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죠.

그 어머니가

되신 분이셨던 겁니다.

우리 새해 첫 은총의 밤을

 보내면서 앞으로 1년 동안

내가 만나야 될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야

될 것인가를 정리합시다.

첫 번째, 말을 조심해야 된다.

거룩한 말이 나와야 된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이 위대했던 첫 번째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두 분 사이에 오가는

 말이었다고 했습니다.

천박하고 상스러운 말이 아니라

아름다운 말이었습니다.

오가는 말은 그 삶의 방향을

정해줄 때가 있습니다.

거친 말이 오고 가는

그 관계가 어떻게 좋은

관계로 끝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난 주일 천국

가기 위한 칠언을 신자들한테

얘기한 적이 있었죠?

올 한 해 동안

천국 칠언을 얘기합시다.

둘째 내가 겸손하지 못하면

내 자식도 겸손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합시다..

셋째 올 한 해 동안 성체를

모시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존경 받기

위하여 애씁시다.

존경은 성체 영하고

세례명 갖는다고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당 다니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성실하게

응답하는가가 바로 구원의

문제라고 얘기했습니다.

 올 일 년 동안 우리 앞에

나타날 많은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미움의 모습으로,

내 속을 뒤집어 놓는 사람으로,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으로

내 앞을 지나갈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환경보다도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하는 것이 무섭고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담대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올 한 해 동안 주님이

보내주시는 그 만남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만남이 될 수 있도록

새해 첫 은총의 밤 미사를

봉헌하도록 합시다.아멘. 

2018년 1월 은총의 밤 (1/06)

서운동성당 김웅열

(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서운동성당 - photo by - 느티나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