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김웅렬신부(무엇을 찾느냐?)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2-05 조회수1,807 추천수0 반대(0) 신고

 

"무엇을 찾느냐?"

+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의 입에서는 나오는 말씀

네 가지가 나옵니다.

두 가지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왔던 말이고,

두 가지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던 말입니다.

첫 번째,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 제자에게

‘하느님의 어린양이 가신다.’

두 번째 말은 예수님의

입에서 ‘뭘 원하느냐?’

공동번역엔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세 번째 말은 ‘랍비,

어디에 계시는지 알기를 원합니다.’

두 제자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마지막 말은 다시

 예수님의 입에서 나와요.

‘와서 보아라.’ ‘Come and See.’

거룩한 말씀에 대해

언젠가 말씀 드렸을 겁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 말씀은

아니고 말도 있고 말씀도 있죠.

오늘 복음에는 네 가지의

거룩한 말씀이 나옵니다.

첫 번째. 요한이 두 제자에게

한 말이 뭐라고요?

‘하느님의 어린양이 가신다.’

내 제자였던 두 사람에게

 ‘저 분이 진짜 스승이야.

 나를 떠나서 그분께 가라.’

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요한은 슈퍼스타였죠.

모든 사람이 요한을 메시아로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우리가 따르는 이분이

 바로 오시기로 한 메시아’로

알고 있었던 상황이었죠.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요한이 나쁜 맘먹고,

 한마디로 깔아뭉개면

 예수님은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겠죠.

그런데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칭호를 주면서

 ‘하느님의 어린양이 가신다.’

라고 합니다.

요한은 확실 주제파악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임이

확실히 분명합니다.

주제파악을 하고

제 꼴의 값을 아는,

좋은 뜻의 꼴값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질투심이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고

당연히 열등감도 없습니다.

질투심은 열등감에서 항상 나와요.

열등감이 없이,

 못 생기면 못 생긴 대로,

재주가 없으면 재주가 없는 대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절대 남을 씹지 않아요.

다시 말하면 조연과 주연의

차이를 세례자 요한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망쳐지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드러나지 않고

조연이 너무 튀어요.

그런 영화는 끝난 것에요.

주연을 항상 떠받치는 것이

영화에서 조연이요,

조연으로도 성공한

사람들 얼마나 많아요?

명품 조연 연기자는 주연을

시키려고 해도 싫대요.

주연을 떠받치면서도

또 독특한 빛을 내는

조연들이 있어요.

세례자인 요한은 주인공인

예수님과 예수님을 드러내야 할

자기의 차이를

확실히 알고 계셨어요.

한마디로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내 조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온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향하게 하는 역할이

자기한테 있다고 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분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사제에게 피정을 하러 옵니다.

강론을 들으러 옵니다.

그리고 존경해서 올 수 있겠죠.

그렇게 모여든 신자들을 사제가

끝까지 예수님 앞에 서서 가로막고

있다면 그게 바로 교주에요.

교주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죠.

사제에게 준 카리스마를 통해서

신자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해요.

그러나 모이면 당연히 예수님을

만나게 해 줘야 해요.

그게 바로 사제의 역할이에요.

세례자 요한은

‘그분은 갈수록 커지셔야 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도 매드릴 자격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이 보다 더 겸손한

말이 나올 수 있을까?

그 당신 슈퍼스타의 입에서

‘하느님의 어린양이 가신다.’

누구나 최고의 자리를

누렸던 사람이 차석에 내려간다고

하는 것은 싶지 않아요.

대통령하던 사람이 아파트에서

낙엽 쓸고 하는 모습 보셨습니까?

쉽지 않아요.

그러나 요한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원했기 때문에 자기의 그 많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낼 수 있는

 여유로움과 영적인 평화를

갖을 수 있었고, 또 보내고도

서운하지 않고 속상하지 않고,

나를 버리고 간 저 놈들이 밉지 않고.

전혀 질투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주 대놓고

 ‘하느님의 어린양이 가신다. 쫓아가라’

이것이 오늘 세례자 요한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가거라.’

두 번째 말씀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왔다고 그랬죠. ‘뭘 바라느냐?’

이 말은 어디서 나온 것에요?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겁니까?

아무튼 하느님의 어린양이

간다고 하니까 결국 두 제자는

 예수님에게 가죠.

그런데 쫓아가서 예수님의

 옷자락 잡고 만납니까?

이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다가서지 못해요.

‘혹시 퇴짜 맞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과 또 한편으로는

 ‘우리 스승 배신 때리고

가는 게 맞는 가?

혹시 세례자 요한이

서운해하지시 않을까?’하는

인간적인 생각이 들었지요.

오늘 복음에 보면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거리를

두고 뒤쫓아 갑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나죠?

제자들 쪽에서 예수님에게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고개를 돌리셔서

제자들 쪽으로 만나러 옵니다.

과연 우리 약한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일까?

그분께서 쉽게 다가설 수 있을까?

쉽게 못 다가서요.

인간이 하느님을 찾아 나설 때

항상 하느님이 먼저 내게

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향해 기어갈 때

그분은 항상 우리를 위해 걸어오셨고,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여 걸어갈 때

하느님은 우리 쪽을 향하여 뛰어오셨고,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뛰어갈 때

그분은 우리를 향해 날라 오셨어요.

우리는 늘 우리가 그분을 찾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니에요.

우리 힘으로 예수님께 다가설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고,

다가설 수 있는 거리도 한계가 있죠.

겸손하게 뒤돌아보면,

그분이 나를 향해 오셔서

 나에게 손을 내미셨고

나를 끌어안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 밖에 없어요.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이 말은 이렇게 먼저 다가오셔서

 두 사람에 물은 말이죠.

‘나에게 바라는 것이 뭐니?

말도 못하고 쫓아다니니.

너희들한테 뭘 해 줄까?

할 말 없니?’

그 말을 듣고 세 번째 두 제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죠.

‘랍비!’ 스승님이라는 뜻이죠.

 ‘어디 묵으십니까?’

 공동번역에는

 ‘어디 계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어냐는

질문에 두 제자만이 아니라

우리들은 각자가 답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뭘 바라기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느냐?

왜 천주교 신자가 됐느냐?

왜 네 집에 내 십자가 모습을

걸어 놓고 한 평생을

살아가느냐?’고  물으시면

무엇이라 답할 겁니까?

안정된 삶을 원합니다.

주님 찾으면 고생 안 하고

축복주신다고 해서 왔습니다.

건강을 원합니다.

돈을 원합니다. 출세를 원합니다.

등등 그런 대답했다고 해서

죄 아니에요. 원하세요.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이런 것들이 하느님 위에

올라가 있으면 그땐 죄가 돼요.

그게 바로 우상숭배가 되요.

다시 말해서 순서가

바뀌면 죄가 됩니다.

‘자식한테 축복주세요.’ 하며

하느님은 늘 자식 밑에

내려가 있고 하루 종일

자식생각 밖에 안 해!

비라고 하는 것은 위에서

내리지 거꾸로 위로

올라가는 것은 없죠?

예수님이 성당의 제일

높은 자리에 딱 좌정하고 계실 때

그 성당교우들이 은총의 비를 맞듯이,

여러분 가정과 개개인의

 마음속에도 제일 높은 자리에

예수님이 계실 때

은총의 비를 맞습니다.

‘네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도 아파서 주님 찾아 왔습니다.’

‘주님 먹고사는 것이 힘들어요.

일용할 양식 좀 주세요.’

‘매번 실패만 하고 살았어요.

성공 좀 하게 해 주세요.’

그 말 하세요.

하지 말라는 것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게 하느님보다

윗자리에 있을 때 죄가 된다는 것.

순서가 바뀌면 죄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두 제자는

 어떻게 대답했어요.

어디 계시는지 알고 싶다고 했어요.

이것은 예수님이 어느 여관방에

계신지 살고 계신 주소가

몇 번지인가를 묻는 게 아니에요.

‘주님을 진정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인지 좀 보여주십시오.’

어디 계신지 알고 싶다는 말의 뜻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당신을

진정 알고 싶다는 것 입니다.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이 하신

마지막 말이 뭐에요?

딱 두 마디. ‘와서 보라.’

와서는 초청이고, 부르심입니다.

피정에 부르십니다.

성령세미나에 부르십니다.

꾸르실료에 부르십니다.

ME에 부르십니다.

무엇보다도 매일 미사에 부르시고,

주일 미사에 부르시고,

성지순례에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말씀의 잔치에 우리들을 초청하십니다.

‘come’은 초청이고, 부르심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보라’ 그랬어요.

‘보라’라는 말은 ‘찾아라’ 그거에요.

찾아라. 그냥 네 눈으로 멍하게

쳐다보라는 것이 아니라

 네 몸과 마음을 다해서 찾아내라.

과연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찾아봐라.

인내와 용기와 의지를 갖고,

결심을 다해서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뭔지를 찾아봐라.

맨입으로 다 받아갈 생각 말아라.

너 입만 벌리고 있다고

다 주는 것 아니다.

초청은 내가 할 것이다.

내가 불러낼 것이다.

그러나 와서 인내를 갖고,

용기를 갖고, 의지를 갖고,

결심을 다하여 ‘seek’ 찾아야 된다.

몸과 마음을 다해서 찾아야 된다.

이렇게 두 제자가 스승인 세례자

요한을 떠나서 예수님을 체험하는

과정이 오늘 복음에 나왔죠?

제가 이렇게 해석을 해

드리니까 다 이해가 되시죠?

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그분과 하룻밤을 묵었다고

나와 있어요. 그리고 시간까지

나와 있어요. 4시쯤이었다.

그 시간을 잊어버릴 수 없었으면,

4시까지 표현을 했을까요?

예수님을 만났고 체험했던

감격의 시간이 바로

그들에게는 4시였어요.

하느님을 만났던 그 시간은

 정말 오래된 시간이어도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가는데

게으름이 올 때마다 그 시간을

자꾸 떠올리며 게으름을 물리칩니다.

성인들이 예수님을 만났던 때와

장소가 다르듯 우리 모두도 하느님을

체험했던 시간이 다릅니다.

오늘 특별히 우리들은 주님의 질문에

답을 하고 이 미사를 끝냅시다.

‘네가 나한테 바라는 게 뭐냐?’

늘 여러분들이 대답하셔야 할 문제에요.

예수님이 아니라 엉뚱한 것에 빠져 살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진정 나에게 바라는 것이 뭐냐?’

‘네가 바라는 것이 이거였어?

난 이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주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네 가지의 아름다운 말.

첫 번째, ‘하느님의 어린양이 가신다.’

두 번째, ‘너희가 바라는 게 뭐냐?’

세 번째, ‘주님 어디

계시는지 알기 원합니다.’

네 번째, ‘와서 보라.’

오늘 여러분 집에 가서 성경책

 펼쳐 놓고 이 네 말를 빨간 볼펜으로든

형광펜든 쫙쫙 그으십시오.

그래야 세월이 지나 이것을

또 보더라도 기억이 떠오르실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이 바라는 것

가능한 다 해결해

주시려고 애쓰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맡겨 놓은 것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말이 나와야합니다.

‘내 것 내가 찾는 데, 왜 이래?’

이건 아니죠. 감사해야죠.

 오늘 여러분들 왔습니다.

보라, 그리고 찾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2018년 연중 제2주일 (1/14)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서운동성당 - photo by - 느티나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