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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포기의영성)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2-12 조회수2,206 추천수1 반대(0) 신고

 

"포기의영성"

+찬미예수님!

한 주일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본당에서 지난 주 화요일

장례미사가 있었고,

오늘은 젊은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장례 많네요.

 어떻게 합니까? 도리 없지요.

요즘은 제가

버스이용을 잘 안 하는데,

예전 피정 다닐 때는 가능한

버스를 타고 다녔어요.

버스를 타러 터미널에

나오기 전에 사제관에서

꼭 귤 두개나 사탕 몇 개를

가지고 나갔어요.

내가 먹으려는 것은 아니고,

옆자리에 누가 탈지

버스표를 사면서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해요.

방법은 두 가지죠.

이미 타고 있는 사람 옆에

내가 앉을 수도 있고,

내가 먼저 앉아서

기다릴 수가 있겠죠.

어느 날 차는 출발하려는데

자리는 꽉 차고

내 옆자리만 비었어요.

‘오늘은 혼자 가는 구나’ 하며

묵주기도를 하려고

묵주를 잡는데, 한 사람이

차문을 두드렸어요.

심심치 않겠다고 생각하는 찰라

그 사람이 딱 버스에 올라탔는데,

저는 즉시 화살기도 했어요.

‘저 사람 좀 내리게 해 주세요.’

얼굴은 완전 산 도둑,

키도 얼마나 큰지 고개를 숙였어도

고속버스 천장에 닿았어요.

화살기도는 안 먹히고.

‘실례 합니다’ 하면서

털썩 앉는데, 얼마나

덩치가 큰지 내가 밀려요.

유리창 쪽으로 찌그러져서

그 사람 인상을 보니까

얼마나 어두운지 말을

걸었다간 맞게 생겼어.

묵주기도하며 올라가자고

마음먹고 1단 정도 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명색이 신부가

외모를 보고 판단을 해?

한 시간 반 동안 하느님이

사제 옆에 앉혀 준 사람인데.’

그래서 용기를 내어 귤을 까서

 “선생님, 한 번 드셔보시죠.” 했죠.

그 양반이 “신부님이시네요?”

 “‘네. 신부입니다.”

“신부님 보니

죄가 많아 할 말이 없네요.

저, 베드로에요. 냉담한 지

이십 몇 년 되었대요.”

‘아이구,

고기가 하나 걸려들었구나.’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했어요.

그 양반이 점퍼

주머니에서 뭘 꺼내요.

신문으로 둘둘 말은 걸 펴니

칼이야. 부엌칼 있죠?

서슬이 시퍼런 칼을

둘둘 말아가지고 가슴 안에

안고 있는 것에요.

바람피운 마누라가

서울 어느 모텔에 어떤 놈이랑

같이 있다고 해서 죽이러

올라가는 길이래요.

그러니 얼굴이 살벌할 수밖에

더 있겠어요? 무섭죠.

세상에 고기는 고긴데,

칼 든 고기네. “베드로씨,

칼 주시오. 주세요.”

“신부님, 어차피

저 이제 막장입니다.

그년그놈 죽이고,

나도 그 자리에서 자살할 겁니다.

죽기 전에 사제를 만나

 하느님께 감사하지만,

저 천국 갈 생각 안 할 겁니다.

나중에 신문보고 일 터졌으면

기도나 잠깐 해 주세요.”

그때는 휴대폰이 있던

시절이 아니었고 말로는

이 사람을 돌릴 재간이 없었어요.

사람의 언어로는 안 되겠구나싶어

 말로 하는 것을 중단하고 차장 밖을

 보면서 심령기도를 했어요.

30분 정도 심령기도를 드렸어요.

차가 강남터미널에 죽 들어서는데,

그 베도로가 “신부님, 칼 받으세요.”

그러는 것에요. (박수)

“천주님 감사합니다.

베드로 생각 잘 했어.

보관하고 있을 터니까

나중에 찾으러와.”

“신부님을 이렇게

만난 것은 무슨 인연일까?

신부님 말씀대로 가서 부인만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은 하지만

정말 그 문을 열었을 때

눈이 돌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은 못 합니다.

칼은 드리겠습니다.

저 안수 좀 해 주십시오“

차 안에서 기도를 해주고

맨 나중에 내렸죠.

그 날 영등포 성당에

피정이 있었어요. 피정하는 데,

머릿속은 어디로 가 있었을까요?

베드로가 일 저지르지 않았을까?

와이프를 그냥 데리고 나왔을까?

그 다음 날부터 혹시 불륜에

 아내 죽인 남자의 이야기가

나오나 아침에 신문부터 봤어요.

첫째 날, 둘째 날,

조용히 텔레비전을 들어도

그런 얘기는 없었습니다.

그 다음 주 미사를 하면서

 입장을 해서 성호를 긋는데,

워낙 덩치가 크니까

바로 눈에 뜨여!

그 베드로가 중간에 앉아 있고

그의 덩치에 반도 안 되는

여자가 고개도 못 들고 있었어요.

‘아. 부인이랑 같이 왔구나.’

미사 드리면서 얼마나 기뻤던지!

미사 끝난 후 사제관으로 들어가니,

“신부님 앉으십시오.

큰 절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을 보내고 난 다음에

성체 앞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했어요.

그날 옆에 앉은 사람이

인상만 보고 함부로

 판단해서 묵주기도만

했다면 몇 단은 굴렸겠지요.

하지만 그날 무슨 사건이

있었겠습니까?

 살인사건이 있었을 겁니다.

버스 옆에 앉은 이 사람을

하느님이 보내준 사람으로

늘 생각해요. 만남이 신비하죠.

인간은 만남을 통해서

인생의 질과 모양이 바뀌어요.

어둠을 가던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나서

 밝은 데로 나갈 수 있고,

분별이라는 것을 모르던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나서 분별의

삶을 살 수도 있어요.

물론 시집가는 자매는

남편을 잘 만나야죠,

또 부모도 자식을 잘 키워야만

좋은 만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끼리의 만남도

많은 영향을 주지만

 만남 중에서 가장 큰 만남은

하느님과의 만남이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하느님 쪽에서 보면 부르심입니다.

우리 쪽에서 보면 따름입니다.

하느님이 부르시고

우리가 따를 때 만남이 생깁니다.

만남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끼리의 만남도

인연이 있어야 되지만,

특별히 하느님과의 만남은

내가 하느님을 만나 싶다고 해서

만나지는 것도 아닙니다.

일단 그분이 부르셔야 돼요.

또 내가 따라야 됩니다.

‘피정 참석하십시오.’

 수백 번을 얘기해도

안 나오는 사람은 안 나와요.

성경책을 통해서 하느님이

나를 부르시고 싶으신데

죽을 때까지 성서

한 페이지도 안 읽어봐요.

따름이 없는 것이지요.

하느님이 부르시고 우리가

따를 때 신과의 만남이라고 하는

이 거대한 구원의 장이 열립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쉬워요? 어렵죠, 쉽지 않아요.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첫 번째, 포기를 의미해요.

포기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따를 수 있을까,

그 부르심에 응할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해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첫 번째 어부, 

시몬과 안드레아는

 뭘 버렸다고 나옵니까?

그물을 버렸다.

두 번째로 나오는 야고보와

요한은 뭘 버렸어요?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을 버렸어요.

아무튼 따를 때는

포기를 해야 돼요.

 지금 여러분들 마음이

행복하지 않다면,

사는 것이 힘들고 뭔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대부분의 문제는

아직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히 있을 것에요.

그것만 포기하면 행복해요.

그런데 우리는 그건 포기 못해요.

기적은 내가 애착하고 있는 것,

내가 움켜지고 있는 것,

그 마지막 한 조각을

포기할 때 일어나요.

건강해지는 기적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 몸에 있는

 병까지도 하느님께

봉헌하고 사십시오.

기쁨의 기적을 원하십니까?

욕심의 한 조각까지 버리세요.

따름은 포기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포기할 때 사람마다

포기하는 내용이 달라요.

같은 어부를 불러도

포기하는 내용이 달라요

시몬과 안드레아를

불렀을 때는 그물,

야고보와 요한을

불렀을 때는 그물만이 아니라

아버지,삯꾼,

일꾼까지도 다 포기했어요.

.창세기 12장1절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당신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에요.

그때 아브라함에게

 재산 포기하라는

말은 안 하셨어요.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세 가지 포기하라고 그랬어요.

그 말 가운데는 네 재산을

포기하라는 말은 없었죠.

그래서 아브라함은

재산을 가지고 갔어요.

왜 아브라함에게 재산 포기를

명령하지 않으셨나?

야훼 하느님은 아브라함은

 재산 가지고 있어도

욕심 부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재산도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굳이 재산까지

포기하라는 말은 안 해도 됐어요.

이렇듯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각각

다른 것을 포기하고 오늘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을 부를 때,

어떤 이들에게는 가족을,

어떤 이들에게는 재산을,

어떤 이들에게는 자식을,

어떤 이들에게는

건강을 포기하게 한 다음

 당신을 보여주실 때가 있습니다.

IMF 때 쫄딱

거지가 된 사람이 많았죠.

 IMF 터지 전에는 잘 나갔어요.

벤츠타고 다니면서

 ‘주일날 미사를 어떻게 나옵니까?

골프 치러 다니기 바쁜데.’ 소리쳤죠.

그런데 IMF 터지고 난 다음에

상거지가 됐어. 식구들도

다 떠나고 노숙자처럼 됐어요.

그때 안 거죠. 텅 빈 명동성당 앞에

땅을 치고, 통곡을 하며

‘세상에 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이렇게 거지가 되고 재산을

다 잃고 난 다음에야 주님이

제 주인이신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목숨도 제게 아니고 눈 하나

껌벙거리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주님 다시 힘을 주십시오.’

포장마차 장사부터 시작하지만

그전과 뭔가 달라요.

전에는 하느님 없이 사업을 했지만,

이젠 포장마차를 하더라도

하느님과 같이 하니 기쁘고 즐겁죠.

주일 날 되면 아무리 손님 많아도

미사시간 되면 옵니다.

생전 안 하던 묵주기도 이제는

아무리 피곤해도 고상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으로 바뀐 것에요.

그 많은 재산을 다 잃고 난 다음에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있어요.

재산의 우상에 사로 잡혀

살 때는 하느님 몰라요.

쫄딱 망한 다음에 신앙 갖는

사람이 있어요.

 6대 7대 독자가 신학교 가면

처음에는 자식을 뺏겼다고

생각하지만 언젠가는

열심한 부모가 되요.

제가 신학교에 30여명이

함께 입학했는데, 그중에 5대 독자,

7대 독자 하나가 있었어요.

7대 독자는 석 달 있다가

할아버지한테 끌려 나갔어요

그런데 5대 독자는 독합디다.

신학교 문 밖에서 할아버지가

농성을 해요.교수들이 일단

나가 있다가, 휴학 했다가

어르신들 진정시킨 다음에

다시 들어오라고 해도

딱 한 마디, 댕기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래요.

5개월 농성을 하더니

 할아버지가 앰블란스에

실려 가고 나서 농성이 깨졌죠.

그때 할아버지는

교우가 아니었어요.

5대 독자에서 대가 끊어질

판인데 난리가 난 거죠.

하지만 그 손자가 사제가 되고,

손자 사제 손에 병자성사 받고

장례미사 거룩하게 치러 드렸어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는

 손자가 세상에서 제일 크게

 출세한 사람이라고

 할아버지가 좋아하셨어요.

자식을 뺏기는 것 같지만

자식을 포기하는 것 같지만

하느님은 찾을 때가 있어요.

 건강의 한 조각까지 포기할 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요.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재물을

보전하려고 할 때 어떤 때는

재물을 포기해야 될 때가 있어요.

내가 애착하는 것의 마지막

한 조각을 포기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저도 부르심을 받았고,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저는 부르심을 받고

 또 사제로 부르심을 또 받았어요.

제가 포기해야 되는 것이 여러분이

포기해야 되는 것보다

몇 배로 더 많아요.

그러니까 힘들죠.

저는 사제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늘 기도했던 것이,

‘빨리 좀 나 먹어 은퇴 좀

다가오게 해 주세요.’

한 번도 어디 가서

편안하게 산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은퇴 후에도 그냥

내버려 둘 것 같지 않으세요.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포기해야 합니다.

모든 영성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게 포기의 영성이에요.

여러분 앞에 있는 이 김 신부도

한 평생을 포기와의 싸움을 하고

이제까지 살아왔어요.

숨이 끊어질 때까지도 계속해서

포기해야 할 것이 나타날 것에요.

그것와의 싸움이에요.

포기의 영성은 아주 힘이 들고

굉장히 느리지만,

성령께서 도와주시기에

지나 온 뒷길을 보면서,

‘아 내가 많이 포기하고 살았구나

그 신주단지처럼 여기던 것도

저 길 바닥에 떨어져 있구나.’

귀중히 여기던 내 자존심도

많이 버리고 살았고

그 동안 받았던 상처들도

많이 떨어져 나갔구나.‘

하실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 앞에

가기 전에 우리가 살아온 길을

뒤돌아볼 때,

‘주님, 제가 걸어온 길이 보이시죠?

저 길 중간 중간에 있는 것

포기하느라고 죽을 뻔 했어요.

이제 남은 것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

이렇게 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2018년 연중 제3주일 (1/21)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photo by - 소나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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