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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복음(마태25,31~4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2-19 조회수2,720 추천수0 반대(0) 신고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복음(마태25,31~46)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히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엇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31~40참조)

 

마태오 복음 25장에는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는 사람의 자세와 관련된 세 가지 비유가 있다. 1~13절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는 사람의 준비성을 강조하고 있고, 14~30절에 나오는 '탈렌트의 비유'주님의 소명에 대한 성실성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31~46절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양과 염소의 비유'는 심판하시는 주님이 오셔서 그 옥좌에 앉는 장면이 서두에 묘사된다. 그 심판주는 '사람의 아들', '인자'(人子)로 번역된 '호 휘오스 투 안트로푸'(ho hyos tu anthropu; the Son of Man)이다.

이 호칭은 다니엘서 7장 13절'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는 표현으로 최후의 심판 때에 오실 심판주로서 '사람의 아들'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사람의 아들'을 이러한 개념으로 사용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 

이 때에 소개된 '사람의 아들'제1차 수난 예고(마태16,21~26) 직후에 나온 것으로서, 예수님 자신은 비록 수난과 죽음을 당하시지만, 장차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모든 사람의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도입하는 매개체 구실을 한다. 


이것은 최후 심판에 대한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유사한데, 마태오 복음 26장 1~2절에 의하면 이 비유가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기 3일 전에 행해진 이야기이며,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당하시지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재림하실 것이고, 당신 자신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사랑을 베푼 이들에게 영광스러운 축복으로 갚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드러낸다.

 

마태오 복음 25장 31절(ㄱ)에서 3인칭 소유격 단수 대명사 '아우투' (autu; his, him)가 두 번 쓰였다. 이것을 다시 번역하면, '그의 영광으로, 그리고 그와 함께 모든 천사들이'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인 자신을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사용하셨는데, 이것은 심판주의 엄격하고 공정한 권위를 한층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기법으로 보인다.  

그리고 '영광'에 해당하는 '독세'(dokse; glory)의 원형 '독사'(doksa)는  어떤 권세나 명예 따위를 소유할 자의 내부에서 발산되어 그 배후에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그 어떤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독사'(doksa)하느님께 속한 특성으로서, 성부 하느님에 의해서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영광'으로 오신다는 것은 세상을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전우주적 구원자, 전우주적 심판주이시며 재판장의 자격으로 오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강생(육화)때 베들레헴 마굿간에 초라하게 오신 것과는 달리, 재림 때에는 전우주적인 심판주의 자격으로 위엄과 권세를 떨치시면서 오신다는 것인데, 그것이 '모든 천사가 함께 온다'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마태오 복음 25장 32절에는 '모든 민족들이' 주격이 되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여 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태오 복음 24장 31절에는 '천사들은 사람의 아들이 선택한 이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라고 나오는데, 여기서는 마지막 날에 모든 민족들이 영광의 옥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사방 곳곳에서 모여들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모든 민족들'에 해당하는 '판타 타 에트네'(panta ta ethne; all the nations)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그리고 심판의 때에 재판장은 세상 가운데 서로 뒤섞여 살던 의인과 악인을 철저하고 확실하게 분리해 낼 것이다.

여기서 '가르다', '분별하다'는 의미로 번역된 단어 '아포리세이'(aphorisei; will separate)의 원형 '아포리조'(aphorizo)둘 사이에 경계를 지어 철저하게 분리하고 구별짓는 을 뜻하는 동사이다.  여기서는 이 동사가 미래 시제인 '아포리세이'(aphorisei; will separate)현제 시제 '아포리제이'(aphorizei; separates)로 각각 쓰였다. 

현재 시제양과 염소를 구분짓고 따로 세우는 그 당시의 목축 관습을 묘사한 것이며, 미래 시제최후 심판의 날 재판장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팔레스티나에서는 양과 염소가 같은 들판에서 뒤섞여 풀을 뜯는데, 밤이 되면 양은 양의 우리에서, 염소는 염소의 우리에 각각 들어감으로써 두 무리 사이에는 양을 치는 목자에 의해서 철저한 분리가 이루어진다. 

또한 본문의 양과 염소는 각각 의인과 악인을 대표하는 상징적 매체인데,  그 당시의 양과 염소는 각각의 무리에 들어감으로써 분리되었지만,  여기서는 재판장의 오른쪽과 왼쪽에 세위짐으로써 분리될 것으로 진술된다. 여기서 '자기 오른쪽'에 해당하는 '덱시온 아우투'(deksion autu; his right)'재판장의 오른편'을 의미한다. 

또한 '덱시온'(deksion)의 원형 '덱시오스'(deksios)는 오른쪽(right)을 의미하나 반드시 장소적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고대 희랍 세계에서는 명예롭거나 좋은 쪽오른 쪽이라고 했고, 플라톤이나  유대 랍비들의 서적에서는 구원이나 은총의 자리 오른 쪽으로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도 영도자와 구원자로 하느님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사도5,31) 원수들을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사도2,34~35).  이것은 예수님께서 과거에 지니셨던 당신의 영광과 권세와 명예를 회복하셨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양을 재판장의 오른쪽에 세울 것이라는 말씀은 의인으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가지신 영예로운 자리,  혹은 구원과 은총의 자리에 세우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34절의 '복을 받은 이들아'에 해당하는 '호이 율로게메노이'(hoi eulogemenoi; who are blessed) 앞으로가 아니라 과거에 이미 복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율로게메노이'(eulogemenoi)수동태 완료 분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인데, 이들이 복을 받은 시점은 이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으로 희생적인 사랑을 베푼 바로 그 시점이다. 

동시에 마태오 복음 25장 41절의 '저주받은 자들아'에 해당하는 '호이 카테라메노이'(hoi kateramenoi; who are cursed)과거에 이미 저주를 받았다는 뜻이며, 저주받은 시점도 그들이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지 않았던 그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주님을 위해서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고 베풀지 않은 그 시점부터 이미 마음으로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상태를 심판의 시점까지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여기서 '내 형제들인 이'해당하는 '투톤 톤 아델폰 무'(tuton ton adelphon mu; these brothers of mine)'나의 이 형제들 중에'라는 뜻이다. '내 형제들'에 대해서 '고난받는 모든 사람','주님의 제자들','주님의 자녀가 된 모든 성도들'로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지만, 세번째인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하느님의 자녀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한 '가장 작은 이들'로 번역된 '톤 엘라키스톤'(ton elachiston; of the least)에서 '엘라키스톤'(elachiston)의 원형 '엘라키스토스'(elachistos)는 '작은'이라는 뜻의 형용사 '미크로스'(mikros)의 최상급으로서 '가장 작은'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관사와 함께 복수형으로 쓰여서 일반 명사의 의미가 되었다. 

여기서 '가장 작은 이들'이란 키가 작거나 나이가 어린 자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참으로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도 전혀 끌 수 없을 정도로 간과되는 자들이라는 의미이다(마태10,42; 18,6). 

의인들'사람들이 자칫 소홀히 여겨 간과하기 쉬운 사람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그것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자비를 베푼 자들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고난받는 형제들을 동일시하신다. 이것이 마태오 복음 10장 40~42절에도 나타나는데,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이가 곧 예수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이가 그를 보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잠언 19장 17절에도 나타나 있다.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 드리는 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

주님께서는 고난받는 형제들이 당하는 그 고통을 같이 나누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 형제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머리이시고,  당신의 교회가 다름아닌 당신의 몸이기 때문이다(에페1,22.23) 

따라서 지극히 작은 이들에게 자비를 베푼 의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자비를 베푼 것과 같은 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참고해서 보세요.

마지막 심판 (요한묵시록20장)

11 나는 또 크고 흰 어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이 그분 앞에서 달아나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12 그리고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13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14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15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심판의 기준이 되는 책과 생명책은 분명히 다른 책입니다.

성경을 내 상식으로 보지맙시다.

내 상식으로 보면  죽을수 밖에 없는 존재로 추락해 버립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에서 지워지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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