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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2주일 제1독서(창세22,1~2.9ㄱ.10~13.15~1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2-25 조회수1,561 추천수1 반대(0) 신고

 

 

 

 사순 제2주일 제1독서(창세22,1~2.9ㄱ.10~13.15~18)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2)

 

부르심에는 구원에 대한 부르심이 있고, 포기에 대한 부르심이 있다. 믿음의 처음 단계는 얻는 것, 무엇인가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완성 단계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17절에서 1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의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사악은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2절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하는 주님의 말씀을 아브라함은 들었다.

아브라함은 그 말을 75세에부터 십년 동안 믿었다(창세16,3). 그런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두려움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는데, 아이가 없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라이의 몸종 하가르를 얻어 86세에 이스마엘을 낳기까지 흔들렸다(창세16,1~5). 자신의 몸이 노인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생겼다. 아브라함 100세, 사라 90세에 임신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은 지켜지고, 하느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이 늙고 환경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아브라함은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흔들렸지만, 이사악이 세상에 태어난 사건을 통해 인간의 방법, 지식, 이성, 환경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아이와 행복하게 살다가 아이가 성인(16~17세 정도로 추정)이 된 어느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이를 내놓으라고 말씀하신다. 

이 때 아브라함은 자신감이 생겼다.  '이사악은 죽어도 다시 산다'는 믿음이 있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지고,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런 믿음이 생겼다. 이사악을 번제로 죽이라고 했을지라도,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진다는 사실을 믿은 것이다(히브11,19). 

하느님께서 어떤 모양으로 이사악을 다시 살려 주실지 모르지만,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는 '이사악은 다시 산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순종을 결심한다. 

'죽어도 살고, 망해도 이긴다'는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생긴 것이다. 그러기에 '약속의 자녀로 칭함받은'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러 모리야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믿음인가?  이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불리우게 되는 이유이다. 


이제 본문의 중요한 부분을 주해한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 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22,2)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이란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인간적이고 본능적인 부성애를 깊숙히 자극하신다. 

'네 독자'(너의 외아들)로 번역된 '에히드카'(yehidka)의 원형 '야히드' (yahid)'독자', '유일한 것', '내 귀중한 생명', '사랑하는' <'아가페토스'(agapetos); 70인역 그리스말 번역 성경; 친밀성강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아하브'(ahab)는 단순히 좋아하다는 뜻 이상으로 '바라다', '갈구하다'(시편40,17), '좋아하다'(이사56,10)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표현속에 이사악에 대한 아브라함의 지극한 부성애와 아들로 인해 아브라함이 갖고 있었던 더할 나위없는 즐거움이 강조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누구보다도 이사악에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 이사악을 모리야 산에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던 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해 오직 당신 만이 아브라함의 가장 큰 소망, 가장 큰 기쁨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모리야''선택', '지정'이란 뜻의 '마르에'(mare)'야훼'의 축약형인 '야'(ya)가 결합되어 '주님께서 친히 선별해 주셨다' 뜻이다.

 

'그를 ~ 번제물로 바쳐라'(sacrifice him ~ as a burnt offering) 

하느님께서는 번제의 통상적인 제물이나 정결한 짐승이나 새(창세8,20) 대신에 아브라함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아들 이사악을 온전히 태워 번제로 드릴 것을 요구하셨다.  

'번제'를 뜻하는 '올라'(ola)'올라간다'는 뜻을 지닌 '알라'(ala)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것은 희생물을 태운 연기를 하늘로 올라가게 해서 하느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는 제사의 한 방법이다(창세8,20).

따라서 본문의 하느님의 요구는 단순히 영적인 복종을 나타내는 명령이 아니라, 실제로 이사악의 배를 가르고 피를 흘려 태워서 바치라는 인간의 이해와 상식을 뛰어넘는 명령인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를 지금 아브라함에게 하셨다. 

자기 자신을 부정(부인)하는 온전한 순명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온전한 헌신, 즉 절대 신앙과 절대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다(마태16,24).

'아침에 일찍 일어나'<와야쉬켐~빱보케르; wayashikem(일어나)~baboker(아침에 일찍)> 

당시 믿음의 족장들이 하느님과 친교(교제)를 나누고 난 뒷날에는 일찍 일어나는 것이 하나의 경건한 관습이었다(창세19,27; 20,8). 여기서 '아침'(boker)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를 포함하고 있는 전치사 '빠'(ba)어떤 특정한 날의 다음 날 아침 지칭한다. 하느님의 명령이 있은 바로 뒷 날, 그것도 이른 시간에 일어나 순종의 채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결국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순종' 강조되고 있다.  잠시 인간적인 번뇌에 빠지기도 했겠지만,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기대와 요구에 자신을 철저히 복종시키기 위해서 오히려 아침 일찍 일어나 신속히 순종의 발걸음을 옮겨 놓았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10)

여기서 '칼'에 해당하는 '마아칼레트'(maakalet)사람을 살상하거나  (창세34,25~26), 몸을 쪼개는데 사용되었던 날카로운 도구였다(판관19,29). 아브라함이 번제에 쓸 '불'에 해당하는 '에쉬'(esh) 더불어 '칼'을  준비했던 것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獨子 이사악을 죽여 심장을 빼고, 목과 손과 발을 자르고, 각 부분의 각을 떠서 번제단 위에 놓고, 불을 붙여 바치는 번제의 과정을 조금도 차질없이 마치기 위한 준비였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을 속행하기 위해 도구를 준비한 아브라함은 결연한 의지와 굳건한 신앙으로 외아들을 죽이려 하기까지 순종한다.

 

우리는 이사악의 모습에서 인류구원을 위한 제물이 되시고 제관이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외아들 이사악을 죽여야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아담으로부터 인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과거에도 짓고 지금도 짓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을 죄로 말미암아 상처입은 성부 하느님의 공의(公義)를 죄없으신 당신 아들 예수님이 기워 갚아야 하기에, 그것을 침묵중에 고통중에 바라 보아야 하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을 묵상해야 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몸소 인류 구원을 위한 제물과 제관, 제단이 되신 당신의 죄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침묵중에, 죽음보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스런 고통을 지켜보고 아파해야 했던 당신의 마음을 알아듣게 하고 체험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토록 크나큰 고통의 시험, 믿음과 순종의 시험을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천주 성자 예수님의 고통과 성심만을 묵상하지, 그 이면에 그것을 침묵과 사랑과 고통으로 바라보시고 외아들 예수님안에서 고통당하시는 성부 하느님을 묵상하지 않는데,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이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묵상해야 한다. 

이러한 포기의 부르심, 준 것을 도로 빼앗는 두 번째 믿음의 시험을 통과했을 때, 창세기 12장 1~4절의 첫번째 축복의 말씀이 창세기 22장 17~18절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고 재천명되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17~18)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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