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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2.25)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2-25 조회수1,606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8년 2월 25일

 사순 제2주일

제1독서 창세

22,1-2.9ㄱ.10-13.15-18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9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11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

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16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제2독서 로마 8,31ㄴ-34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복음 마르 9,2-10

그 무렵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너무 외로워서 힘들다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은 늘 외톨이었다고 하면서

이제는 이렇게 혼자 있는 것을

견디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런 질문을

한 번 던져보았습니다.
“혹시 화장실에서 힘주고

계실 때에도 외롭습니까?”
분명히 화장실 안에서도

혼자일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도 않고

또 함께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을 주고 있을 때

외롭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외로워서 힘들 때는

집중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 내 옆에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을까요?

옆에 누군가가 있다 해도

그에 대해 집중하지 않으면

혼자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앙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다고,

나를 늘 외면하시는 주님인 것

같다면서 외롭고

힘들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역시 주님께 푹 빠져

있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기도나 묵상 생활을 하지 않고,

 성경이나 영적독서를 통해

주님의 말씀도 듣지 않으며,

미사나 피정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키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주님을

느끼고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유럽 성지순례를 다니다보면

중세 때의 수도원을 순례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수도원은 대부분 도시에서

벗어나서 홀로 고립되어 있습니다.

외롭고 힘든 삶이

가득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중세의 수도자들은

이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체험했습니다.

장소와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 집중하면서 푹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이 제자들은 이 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을 목격하게 되지요.

더군다나 그 자리에는

당시 유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있었습니다.
아마 천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베드로는 이 자리에

눌러 살자는 의미로

초막을 지어서 이곳에서

지내자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긴 이전까지 바쁜 전

교여행을 통해 얼마나

힘들고 피곤했을까요?

그러다보니 이제는 활동보다는

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었지요.

단지 자신의 욕심이 드러난

말일 뿐이었습니다.

이에 하늘에서는 이런 말이

울려 퍼집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주님께 푹 빠져 있지 못한

제자들을 향한 하늘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외침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상 것에만 푹 빠져 있는

우리를 향해,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불평불만 속에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해

제발 주님 말씀을 듣고

 따를 수 있기를 요청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 집중하면서

푹 빠져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까지도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번제물로

봉헌하려고 했던 것은

그만큼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푹 빠져 있는

굳은 믿음을 보여준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들에까지

이어지는 복을 내려주십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은

아브라함처럼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어리석은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친아드님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신(로마 8,32)

하느님의 사랑에 푹 빠질 수

있도록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 노력은 일상의

삶에서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지요.
“거룩함은 특별한 것을

행함을 뜻하지 않고,

사랑과 신앙으로 평범한 것을

행함을 뜻합니다.”
사랑과 신앙을 가지고

 평범한 것을 행하는 가운데

우리는 점점 더 주님께

 푹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푹 빠지는

생활 안에서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고,

당신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함께라면

우리는 멋진 일을 할 수 있다.

(마더 데레사)

주님의 거룩한 변모 성당 내부입니다.

"함께 한다는 것"

(요조, ‘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 중에서)

‘내가 이거 해, 저거 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해줬으면 좋겠다.

아침마다 청소기 돌리고

 빨래통 채워지면 세탁기

 돌리는 게 다인 줄 아는 것 같다.

 세탁기에 낀 물때를,

 수염 깎고 나면 세면대에

떨어진 수염 가루들을,

설거지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배수관 안에 시커멓게 곰팡이가

끼는 것까지 볼 줄 알았으면 한다.

한 번씩 마트에 가서 음식을

대용량으로 사면 오래 먹을 수

있게 소분해 놓으라고 말해도

제주에 내려와 보면 덩그러니

그대로 냉장고 안에 들어가 있고.
오늘도 토스트로 아침 먹고

샤워하면서 세탁기 돌리고

 냉장고 비워서 남은 채소랑

김치 찌꺼기 몰아넣고 된장찌개

한 솥을 끓여 한 끼니씩

나누 담아 냉동실에 넣어놓고

 젓갈 다 먹은 통을 버리지도 않고

방치해놔서 곰팡이 슬어 있는 거

 싹 다 정리하고 온갖 곳에

 묻어 있는 고양이털과 먼지 닦아내고...
그러다 내가 써야 할 원고와

내가 읽어야 할 책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팍 솟았다.

왜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 건지,

왜 내 눈에는 보이는 건지,

왜 이거 치워라, 저거 치워라

잔소리를 하게 만드는지....
솔직히 이러한 이야기를

부부들로부터 많이 듣습니다.

그만큼 함께 사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부님께서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느님 나라 갈 때

다른 보속이 필요 없어.

베드로 사도가 그 문 앞에서

 ‘같이 사는 걸로 얼마나 힘들었겠니?’

라고 말씀하면서 통과시켜준대.”
그렇게 어려운 것이 하나의

보속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따르는 또 하나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거룩한 변모 성당에

미사 봉헌하는 빠다킹 신부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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