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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신앙은 확신입니다.)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3-01 조회수2,565 추천수2 반대(0) 신고

 

"신앙은 확신입니다."

+ 찬미예수님!

 오늘 또 추워졌죠?

미사 중에는 말씀이 있고

성체가 계십니다.

성체 안에 머물게 되면

성령의 싸움으로 땀을

뻘뻘 흘리고 나가게 될 겁니다.

아멘 하셔야죠?

믿는 대로 될 겁니다.

 많은 위대한 만남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과 나병환자의

 만남은 구원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과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아주 위대한 만남입니다.

예수님과 나병환자 사이에

주고받은 말과 이루어진 결과는

‘아, 하느님 앞에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야 되겠구나.

이렇게 사니 치유를 받는구나.’

하는 것을 수학공식처럼

아주 선명하게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먼저 나병환자는

확신을 가지고 나왔어요.

목숨 걸고,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나왔다,’ 이겁니다.

나병환자는 깊은 산

굴속에 격리되었죠.

그 속에 나오면 안 돼요.

동네사람들이 가끔

가져다주는 빵을 먹으면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행여 라도 그 나병자들이

동네 한 가운데 나오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걸리면

돌로 쳐 죽였어요.

그래도 살인죄가 안 됐어요.

오죽 큰 죄를 지었기에

저런 몹쓸 병에 걸렸을까하며

당연히 돌에 맞아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죠.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사실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나오기까지 그 과정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확신이지요.

주님이 하시고자 하신다면

자기의 나병을 깨끗하게

나을 수 있게 하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제가 라틴어 한 마디 할 게요.

‘Fides est fiducia’

‘신앙은 확신이다’ 하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라틴어에

신앙과 확신이라는

단어가 한 단어입니다.

바리사이와 동네사람들이

내게 돌을 던져도

예수님만큼은 나를 기꺼이

받아주실 것이라는 확신!

그것 하나 가지고

굴속에서 빠져나온 겁니다.

우리들도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읽을 때마다,

성체를 영할 때 마다,

고해성사를 볼 때 마다,

내 영과 육이 분명히

치유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됩니다.

 사제들도 미사를 드릴 때

이 미사성제가 사제로서의

마지막 성제라는

마음을 가지고,

마지막 강론,

마지막 성체성혈 축성한다는

그 절박한 마음과 확신을

가지고 제대 위에 올라서고.

복사들도, 독서자도,

해설자도 그런 각오를

하고 해설을 하고,

교우들도 내 생애의

마지막 미사,

마지막 강론,

 마지막 성체를

영한다는 절박함과

확신을 가질 때

우리의 영과 육을 치유로

이끌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100프로 믿었습니다.

90프로나 70프로가 아니라

100프로 믿었습니다.

여러분 손에도 묵주반지 있죠?

반지의 경우에도

 14K가 있고 18K 반지가 있고,

24K 순금반지가 있듯이,

신앙에도 14K가 있고

18K가 있고 24K

순금 신앙이 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 순금일수록

빛이 덜하고 덜 딱딱해요.

한마디로 순수할수록

 유연성이 있어요.

다른 쇠를 섞은 것일수록

빛은 더 반짝거려요

하지만 딱딱해서 고집불통이고

움직이지 않아요.

예수님은 24K 순금이셨습니다.

그런 예수그리스도가 존재하시니

불치병이나 내 영혼에

용서받지 못할 것이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마귀는 우리가 확신을

갖지 못하게 쉴 새 없이

우리 귀에 지껄입니다.

‘너는 용서 못 받아.

치유 못 받아. 너 참 뻔뻔하다.

지난번 고백 또 하니?

너는 구원 못 받아.’

절대 넘어가면 안 됩니다.

 예수님과 나병환자의

위대한 만남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묵상은

‘신앙은 확신이다’입니다.

말씀 들을 때 마다,

성체 영할 때 마다,

사 볼 때 마다,

내 영과 육이 치유된다는

확신을 갖고.

사제도 비록 약한 한 사제지만

사제의 입을 빌려서

오늘 예수님께서 2000년 전

설교하셨던

그 장면이 재현됐다고

믿고 강론해야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정말

신자들은 치유가 되고

구마가 되어 왔습니다.

 두 번째로 나병환자는

겸손한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무슨 마음이요? 겸손한 마음.

그 사람은 고쳐달라고

떼쓰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에게 맡긴 것 달라고

 내놓으라고 협박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

주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고쳐줄 수 있습니다.’

‘고쳐주실 거죠?’ 라는

말도 안 붙입니다.

 예수님을 감동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은 협박,

공갈이 아닙니다.

‘한 달 후 집이 팔려야

 되는데 9일기도 들어갑니다.

안 팔릴시 냉담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바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님들

웃으셨지만,

이제껏 여러분의 기도가

색깔은 달라도 다 그래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본 적이 없어요.

그분의 뜻을

 헤아려본 적은 없어요.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향으로 원하는 모습으로

주님이 이렇게

이루어주시길 청합니다.

하느님 앞에 맡긴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면서,

그저 급할 때는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은

자신이 주님 앞에 벌레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주님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겸손의 기도가 될 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청원의 기도 하세요.

달라고 하세요.

구하세요. 청하세요.

그러나 청원의 기도로만

끝나면 안 됩니다.

반드시 다음 기도로 끝내세요.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

겟세마니에서 주님께서

하신 기도요 신성이

인성을 누르는 기도요,

겸손이 교만을 누르는 기도죠.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져도

조급한 마음 안 먹겠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가 있겠지요?’

분명히 그분이 원하는 때가 있고,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의 종류가 다릅니다.

유한한 머리를 가지고

 무한의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로 이 만남이

 위대했던 것은 나병환자는

겸손한 마음만이 아니라

존경하는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성경에 보면 뻣뻣하게 서서

 눈 똑바로 쳐다보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 첫 번째

하는 행위는 무릎을 꿇는 겁니다.

전통적인 가톨릭 성당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성수를

찍으면서 제단을 향해

반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성체 성혈 축성할 때는

국왕이 앉아 있어도

국왕도 무릎을 꿇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보다 더한

극존경은 엎드리는 겁니다.

사제들이 서품 받을 때,

수도자들이 종신서원을 할 때

엎드리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오늘 나병환자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청원하기 전에 피조물이

해야 할 첫 번째 태도를

보여준 겁니다.

먼저 달라고 하기 전에

무릎을 꿇은 겁니다.

무릎을 꿇는 것에는 영의

무릎이 꿇어지는 것이 있고

육신의 무릎이

꿇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보이기 위하여

육신의 무릎을 꿇는데

영의 무릎을 안 꿇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과 육이 같이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존경하는 마음입니다.

 이제껏 이 위대한 만남에서

나병환자의 태도를 봤습니다.

첫 번째 확신,

두 번째 겸손한 마음,

세 번째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어떠했습니까?

첫 번째로 손을 내십니다.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손을 갖다 대시며

 ‘깨끗하게 되어라.’

손 안 대고도 치유시킬 수 있는

그분이 고름이 줄줄 흘러내리는,

그 누구도 손대기 싫어했던

그 상처에 하느님이

손을 대십니다.

 왜 굳이 손을 대셨을까?

나병환자에게는 육신의

병보다도 더 깊은 마음의

 병이 있었을 겁니다.

가족들에게도 버림당하고

사람들에게 배반당했던 배신감,

절망감, 분노, 미움.

멀찍이 서서 ‘네 병 나아라.’

하면 몸은 몰라도 과연 마음의

 병까지 나을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치유는 섬세합니다.

‘아내도 자식새끼도

손 댄 적이 없는 이 저주받을

 몸뚱이에 저 분이

내 몸에 손을 대셨어.’

그 순간에 육신의 병만

나은 것이 아니라 그 깊은

한이 풀어집니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 날에

의학지식이라면 감염이

될 수 있는 무모한

행동을 하신 겁니다.

의사에게는 전염병에

걸린 사람도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 나의 의술이

필요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명령을 두 가지,

함구령과 봉헌령을 내립니다.

치유시킨 다음에 한 명령이

이 두 가지입니다.

 침묵과 봉헌입니다.

 첫 번째 왜 함구령을

내렸었을까?

은총 받은 자의 첫 번째

태도는 침묵입니다.

마귀는 받은

은총을 입을 통하여

시궁창에 떨어뜨립니다.

우리가 미사나 순례나 피정,

혹은 일상생활에서

은총 받은 후 첫 번째

해야 될 것은 침묵입니다.

언젠가 영광 받았던

그 순간을 간증해야

될 때가 오고,

그때는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실 겁니다.

저는 어느 피정이든

피정 끝날 때쯤 되면

신자들에게 권고합니다.

‘은혜 많이 받으셨죠?

그럼 앞으로 일 주일 동안

 입 다물고 성경 읽기

시작하십시오.’

 두 번째 명령은 뭐라고요?

봉헌이 봉헌은 감사예물을

봉헌할 수 있고 또는

육신이나 재능으로

봉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은총을 받은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침묵하지도 않고

봉헌하지도 않습니다.

이 복음에 나오는

이 나병환자도 따르지 않습니다.

침묵하지도 않았고 봉헌했다는

어떤 기록도 없어요.

그저 병이 나았다고

치유 받았다고 좋아만했어요.

 오늘 나병환자와 예수님의

만남은 구원받은 자의 태도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 정리합시다.

나병환자는 주님 앞에 첫 번째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나왔다고 했어요?

확신을 가지고 나왔다.

신앙은 확신이에요.

순금신앙 가지고 살아야 돼요.

고백성사 볼 때 마다

확신을 가지셔야 돼요.

성체 영할 때 마다

확신을 가지세요.

그때마다 치유가 될 겁니다.

구마가 될 겁니다.

 두 번째는 겸손한 마음으로

나왔다고 그랬습니다.

겸손함이 없으면 절대

우리 주님 만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릎만 꿇은 것이 아니라

영의 무릎까지 꿇었던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첫 번째 반응은 손을 대서

치유해 주십니다.

손이 대는 순간 그 사람의

모든 육신의 병만이 아니라 영

적인 상처까지 치유가 됩니다.

치유는 섬세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치유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무대보로

하시면 안 됩니다.

적어도 기도하시고

나 다음에 하십시오.

지혜를 청하고 분별을 청하고,

 할 말과 안할 말을

잘 골라서 하십시오.

섬세해야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치유시켜

 주신 뒤에 많이도 아니고

두 가지만 부탁하셨어요.

그 말은 우리들에게도

똑같습니다.

첫 번째 침묵해라.

침묵하면서 말씀을 읽어라.

두 번째는 봉헌.

 물질의 봉헌이든 육신을

움직여서 봉헌하든

어떤 봉헌이든

봉헌해야 됩니다.

 오늘 복음은 슬픈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예수님 만날 때까지

그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던 그가

예수님의 부탁을 어깁니다.

함구하라 했는데

 온 동네방네 떠들고

돌아다니면서 난리가 났어요.

‘나았다고. 내가 어떤 놈이야.’

오늘 날 나병환자의

모습은 흡사 우리 개인의

모습일 겁니다.

 정말로 위대한 만남이

 되려면 나올 때의

신앙만이 아니라

치유 받은 후의 예수님의

함구령과 봉헌령,

침묵과 봉헌까지 이루어야만

그 만남이 위대한 만남으로

열매 맺을 수 있다는 것

기억합시다. 아멘.

2018년 연중 제5주일 (2/11)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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