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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3.02)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3-02 조회수2,051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8년 3월 2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창세

37,3-4.12-13ㄷ.17ㄹ-28

3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4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12 그의 형들이 아버지의

양 떼에게 풀을 뜯기러

스켐 근처로 갔을 때,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네 형들이 스켐 근처에서

양 떼에게 풀을

뜯기고 있지 않느냐?

자, 내가 너를

형들에게 보내야겠다.”
17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뒤따라가 도탄에서

그들을 찾아냈다.

 18 그런데 그의 형들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그가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19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20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21 그러나 르우벤은

이 말을 듣고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낼 속셈으로,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다시 말하였다.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
르우벤은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내어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낼 생각이었다.

23 이윽고 요셉이

형들에게 다다르자,

그들은 그의 저고리,

곧 그가 입고 있던

긴 저고리를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졌다.

그것은 물이 없는

빈 구덩이였다.

25 그들이 앉아 빵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보니,

길앗에서 오는

이스마엘인들의

대상이 보였다.

그들은 여러 낙타에

향고무와 유향과

 반일향을 싣고,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26 그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27 자, 그 아이를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자.

그래도 그 아이는

우리 아우고

우리 살붙이가 아니냐?”
그러자 형제들은

그의 말을 듣기로 하였다.

28 그때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었다.

그들은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겼다.

이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복음 마태 21,33-43.45-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어떤 강사가 강의를 듣는

청중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로부터

매 맞거나 비난이나 욕을

들어야 내 자신이

정신을 차리고

행동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시죠?

솔직히 없지 않습니까?

내 자신이 매를 맞거나

또는 비난이나 욕을 듣게 되면

아무리 내 자신이 틀렸다고 해도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나 말을

한 사람을 향해서

적의를 표현하게 되지요.

 이 강사는 이렇게 매를 맞거나

비난이나 욕을 들어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고 행동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동의를 했지요.

그러자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누군가는 좀 맞고

비난을 들어야 그 행동을

고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자녀들을 향해서

하는 부모의 행동들이

그렇지 않나요?

그리고 이웃을 향한

나의 따끔한 말과 행동이

변화시킬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 있게 말하곤 합니다.

스스로는 바뀌지

않는다고 하면서,

남은 과연 바뀌어 질까요?
이렇게 자신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남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비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일반적인 모습니다.

누군가를 변화시키겠다고 하는

모든 폭력성은

무조건 비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지극히 관대한

우리들이기에 이러한

비합리적인 모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못된

소작인들을 보면 우리들은

 ‘어떻게 저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당연히 자신들이 누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폭력을 합리화시킵니다.

그래서 결국 포도밭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여 버립니다.
자신의 죄로 인한 모든

폭력성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합리화시키고

있었을까요?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내 이웃과

주님께 드리고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언제나 다가오십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포도밭

주인처럼 모든 것들을

다 내어주는 사랑을 주셨고,

 변화를 위해 계속해서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영원히 이 세상의 삶이

계속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일까요?

죄에 대해 합리화시키면서

주님의 뜻에서 멀어져만 가는

우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주님처럼 우리 역시

사랑으로 다가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사기꾼은 토론 대신

폭력을 사용하고 남들을

설득할 수 없을 때는

 침묵을 강요하며 자신의

주장을 칼로 전파한다.

(주니어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생각해봅시다.

"의 아픔을 못 보는 우리..."

2017년, 공관병 갑질 논란으로

사회가 크게 시끄러웠지요.

이 문제를 보면서 제가 군대에

있을 때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 당시에도 언론에 나온

 상황과 별 다를 바가 없었거든요.

 공관병들은 몸으로 뛰는 육체적인

일은 하지 않았지만,

관사에서 자녀들 과외 그리고

청소나 요리 등의 일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당시에는

저를 포함해서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군 복무 중의 중요한 일이고,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으니

훨씬 더 편하게 군 복무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인권의 차원에서 분명히

큰 문제인데도 문제성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러려니’라는 안일한

마음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공관병 제도는 이 문제로 인해

 60년 만에 폐지되었지만,

스스로도 많은 반성을

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보지

못하는 것은 왜 일까요?

기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픔만을 바라보니 남의 아픔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이밖에도 많은 아픔들이

세상에서 보입니다.

그 아픔들을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받아들이는 아픔보다

남들이 받아들이는

아픔이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저도 군대를 다녀왔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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