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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3.03)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3-03 조회수1,844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8년 3월 3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미카 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복음 루카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

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친구들과 가끔 당구를 치곤합니다.

런데 당구를 치다보면 어느 순간,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상대방에게 대신
치라고 할 수 없으니
아무렇게 힘껏 칩니다.
재미있는 것은 포기하고
 힘껏 질렀는데 실수로 그 길이
없는 상황을 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았던 길이 아니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의미로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실수나 실패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사실 진리로 가는 길은 다양합니다.
따라서 틀리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것이 진짜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요?
토마스 에디슨은 1,000번의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
1,000가지를 발견한 것이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많은 글을 쓰고 있지만,
원고를 작성할 때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단번에
쭉 써내려갈까요?
아닙니다. 수많은 첨삭이라는
실패를 통해서 겨우 제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실패는 강한 의지를
이끌어내기도 하고 또 반대로
의지를 내려놓게도 만듭니다
한 길을 끈질기게 갈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하고,
 반대로 변화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투지를 더욱 더 불태우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반대로 가지고 있던 지혜까지
 상실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실패를 통해 현실을
깨닫게 하기도 하고,
반대로 현실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 실패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아닐까요?
모두가 실패할 가능성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또한 계속해서 실패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사느냐에 따라 지금의
모습이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탕자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작은아들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아버지가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란 이렇게
다시 돌아오는 사람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무한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작은아들의 모습입니다.
작은아들 스스로 말하듯이
분명히 하늘과 아버지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실패의 순간입니다.
이때 작은아들은 “다 틀렸다.”
라고 말하면서 실패에
그냥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희망이라 할 수 있는
아버지께로 향할 것을 다짐하고,
실제로 찾아가서 용서를 청합니다.
이렇게 실패에 머무르지 않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떨까요?
그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언제나 우리를 힘껏
안아주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강하고 착실한 사람은

실패를 포함한 자신의

경험을 고기를 먹고

소화시키듯 이

모두 소화시킨다.

(니체)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의외의 모습을 간직합시다."

소설가 김훈은 말합니다.
“기자를 보면 기자답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은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이 말에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딱 보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여기에는 저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은 사복을 해도

딱 신부님 같아요.”
김훈 작가의 말처럼 저 역시

 직업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 파묻혀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물론 이 역시 나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자리에

충실하다는 말도 되니까요.

 그러나 사람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요.

나만의 독창적인 캐릭터는

의외의 모습들이

모여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의외의 모습을 내지

못하는 것은 나의 일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 아닐까요?

동창신부의 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 취임식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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