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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3.4 주일/ 주님의 뜻을 담아내 성전이 되는 삶 - 기 프란치스코 신부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8-03-03 조회수2,968 추천수3 반대(0) 신고




나해 사순 3주일, 요한 2,13-25(18.3.4)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Cleansing of the Temple


 

 



주님의 뜻을 담아내 성전이 되는 삶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 마당에서 환전상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채찍을 휘둘러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의 양과 소를 몰아내십니다. 환전상들은 폭리를 취하며 환전해주었고, 성전에 바칠 제물용 소나 양,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도 엄청난 부당이득을 취했던 것입니다.

환전상들과 장사꾼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짜고 공공연하게 부당이득을 취했습니다. 당시 그러한 장사들을 ‘안나스의 특매점’이라고도 했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심각한 불의에 공분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진노는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열정과, 소외되고 천대받는 이들에 대한 애정표현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신앙의 이름으로 합리화 한 이스라엘의 불의한 사회구조 전반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로 나뉘어, 서로를 분리하고 출입에 제한을 둠으로써 차별을 드러냈습니다. 역설적으로 성전에서, 하느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권위와 신분이 중시됨으로써, 평등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성전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삶 전반이 탐욕과 집단적 이기주의의 모순과 불평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장터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마르 11,7). 예수님의 분노는 거짓된 종교관과 독선과 배타심과 탐욕이 낳은 뒤틀린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바로 세우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셈이지요.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우리 각자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요 성령의 궁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드러나는 참된 성전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나아가 이 사회도 정의를 추구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과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성전이 되어야겠지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세상 또한 성전이 되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누구든 그리고 어디든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드러낼 때 성전이 될 것입니다. 개인과 사회는 물론 교회도 하느님을 담아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무관심과 냉대, 권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 독선과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미움과 분노, 허영과 거짓의 쓰레기를 태워버리고, 차별의 벽을 허물어버려야겠지요. 그리하여 다 함께 서로의 고통과 슬픔과 기쁨을 나누며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성전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아가 차별과 소외를 조장하는 그 어떤 제도도 절대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경시하는 그 어떤 행동도 묵인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거짓 권력의 횡포와 부패,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 불의와 핍박에 과감히 맞서는 정의의 실천을 통하여 이 세상이 참으로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 되도록 힘써야겠지요.

우리 모두, 수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의 기쁨을 주시는 새 성전이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리하여 모든 이에게 자유와 생명을 안겨 줄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구조를 만들어나가야겠습니다. 또한 돈과 기득권층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 안에서 주님을 찾음으로써 살아있는 성전이 되어야겠습니다. 추문의 중심에 서서 성전을 더럽히는 교회와, 탐욕의 늪에서 헤매는 사회가, 다시 주님의 성전으로 복구되길 참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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