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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4주일 제1독서 (2역대 36,14-16.19-2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3-11 조회수2,197 추천수1 반대(0) 신고

 

 

 

 

 나는 이렇게 명령을 내린다. 내 왕국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사제와 레위인들 가운데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고싶어 하는 사람은 그대와 함께 가도 좋다.(에즈7,13)

 

 사순 제4주일 제1독서 (2역대 36,14-16.19-23)

 

역대기의 마지막 장인 36장은 남부 유다 왕국의 마지막 네 왕들에 대한 간결한 기사로 끝나고 있다. 요시야가 이집트 군대와의 전투에서 얻은 부상으로 인하여 죽은 후(2역대 35,23-24) 남부 유다는 급속히 쇠퇴한다.

요시야의 삶은 히즈키야(2역대29-32장)와 비슷한 부분이 많이 있는데, 그 아들들이 하느님 앞에서 경건하지 못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요시야의 죽음 이후 불과 22년 6달 열흘안에 네 명의 왕(여호아하즈/여호야킴/여호야킨/치드키야)이 외세에 의해 교체되고, 마침내 남부 유다 왕국은 멸망을 맞이하고 만다.

그런데, 이런 유다 왕국의 급격한 쇠퇴와 혼란의 표면적 이유는 그 당시 재편되고 있던 국제 정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하느님께 불순종하며, 우상숭배를 일삼았던 패역한 유다의 왕들과  백성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었던 것이다.

 

오늘 제1독서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역대기 하권 36장 11절부터 나오는 치드키야 이야기 알아야 한다. 

바빌론 임금 네브카드네자르는 요시야의 셋째 아들이며, 여호야킨의 삼촌인 치드키야를 유다의 마지막 왕이 되게 한다. 치드키야가 통치한 11년의 상황은 예레미야서에 잘 기록되어 있다.(예레27-52장참조) 그 역시 재위 9년에 네브카드네자르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가 결국 바빌론의 침공을 자초한다.

치드키야는 악행을 일삼으며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다가,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는 것과 자신의 아들들이 바빌론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무렵 모든 지도 사제와 백성이 이방인들의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주님을 크게 배신하고~" (14)

이것은 유다의 온 백성들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지도자 역할을 했던 사제들도 악행에 빠져 있었다는 의미이다. 즉 그 당시 모든 유다 사람들이 범죄 행위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모든 지도 사제'는 24반열의 사제들과 대사제(사제단 조직)를 가리킨다.(1역대 24,1.3-19)

에제키엘 예언자도 치드키야 시대에는 백성뿐만 아니라 사제들도 깊은 우상숭배에 빠진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에제 5,1-7 ; 8,5-18 ; 14,1-5등등)

 

"주 그들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당신의 처소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당신의 사자들을 줄곧 그들에게 보내셨다."  (15)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말'(hamar)는 '동정하다', '용서하다', '아끼다'는 뜻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온갖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셨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선택된 백성들이 계속해서 범죄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오랫동안 참으시고, 파괴하고 심판하시기를 인내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당신의 사자들을 줄곧 그들에게 보내셨다' 이런 표현 형태는 예레미야에서도 자주 발견된다.(예레 26,5 ; 29,19 ; 35,14.15)

여기서 '사자들'이란 '예언자'들을 가리키는데, 당시에 활약했던 에제키엘(BC593-570), 예레미야(BC627-580), 다니엘(BC605-530), 하바쿡(BC612-589)등을 지칭하며, 그와 더불어 잘 알려지지 않은 예언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주님의 진노가 당신 백성을 향하여 타올라 구제할 길이 없게 되었다" (16)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가 너무 극심하여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불가피하게 된 상태에 이르렀음을 가리킨다.(2열왕 24,4)

오늘 독서에는 빠져 있지만, 역대기 하권 36장 17절에, 하느님께서 "칼데아인들의 임금을 그들에게 올려 보내시어 그들 성소의 집에서 젊은이들을 칼로 쳐 죽이게"  하시고, 모든 사람들을 그 임금의 손에 넘기신다. 

칼데아인들의 임금은 치드키야가 이집트에 사자를 보내서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하고 바빌론을 배반하자(에제 17,11-21), 예루살렘을 침공한다. 그는 오랫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한 끝에 성전과 성벽을 파괴하고, 남부 유다 왕국 전체를 붕괴시킨 장본인이다.(2열왕 25,1-7)

한편, '모두 그 임금의 손에 넘겨졌다' 에서  '넘기다' 라는 말은 '붙이다', '양도하다', '(하느님께서)내어주다' 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말은 범죄한 유다를 징계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이방인 네브카드네자르를 도구로 사용하셨음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에제9,1-11참조)

 

"그들은 하느님의 집을 불태우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허물었으며,  궁들을 모두 불에 태우고 값진 기물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19)

성전의 유실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여러가지 사실들과 값진 기물을 파괴하고 탈취해 간 사실에 대해서는 열왕기 하권 25장 9-17절에 자세히 나온다. 이러한 약탈은 여호야킴(2역대 36,5-8)시대에 있었던 것보다 더 광범위하고 철저했던 것 같다.(예레 39,1-8)

 

"칼데아 임금은 칼을 피하여 살아남은 자들을 바빌론으로 유배시켜, 그와 그 자손들의  종이 되게 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 제국이 통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0)

'칼을 피하여 살아 남은 자들'이란 '칼에서 남은 자', 즉 '칼로 살해되지 않은 자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전쟁에서 죽거나 쓰러지지 않은 자들을 의미한다.'

'바빌론으로 유배시켜'

이들은 예레미야의 예언과  같이(예레27,7) 페르시아가 일어날 때까지 그곳에서 있었다. 그런데 이들 중 대부분은 노예가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였으나, 그 중에서 몇 사람들은 상당한 지위와 총애를 받았다.(2열왕 25,27-30 ; 다니 1,19 ; 2,49 ; 4,3) 이 때 유다의 백성들은 계속되는 압제로 인해(이사 14,2.3) 대부분 포로 초기에 낙망을 경험하고, 점점 세속화 되어 갔다. (에제33,31.32)

그러나 이와는 달리 영적으로 깨어 있음과 더불어 경건했던 자들은 더욱 신앙이 성숙되어 갔다.

'그와 그 자손들'

이는 네브카드네자르와 그의 계승자들, 즉 Evil-Merodach (BC562-560), Neriglissar (BC560-556), Nabonidus(BC556-539)를 가리킨다.

'페르시아 제국이 통치할 때까지'

이는 BC 539년 페르시아왕 키루스가 바빌론을 정복할 때까지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 땅은 밀린 안식년을 다 갚을 때까지 줄곧 황폐해진 채 안식년을 지내며   일흔 해를 채울 것이다."" (21)

결국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멸망을 당한다. 남부 유다가 포로되어 적국에 있는 동안에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는 사실은  레위기 26장 34-35절의 말씀이다.

"이렇게 땅이 황폐해지고 너희가 원수들의 땅에 있는 동안, 땅은 비로소 제 안식년들을  줄곧 누리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땅은 쉬면서 제 안식년을 누릴 것이다.  너희 땅은 너희가 그 곳에 살 때 안식년에 쉬지 못한 대신, 이제 황폐해 있는 동안  줄곧 쉬게 될 것이다."(레위26,34-35) 

그래서 역대기 저자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유다 백성의 70년간 포로 생활(예레25,11 ; 29,10-14)을 절망적인 눈으로만 보지 않고, 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레위기 26장 34-35절을 기초로해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은 온통 황무지와 폐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의 민족들은 일흔 해 동안  바빌론 임금을 섬길 것이다." (예레25,11)

"너희가 바빌론에서 일흔 해를 다 채우면 내가 너희를 찾아,  너희를 이곳에 다시 데려오리라는 은혜로운 나의 약속을 너희에게 이루어 주겠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몸소 마련한 계획을 분명히 알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평화를 위한 계획이지 재앙을 위한 계획이 아니므로, 나는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고자 한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부르며 다가와 기도하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내가 너희 운명을 되돌려 주어, 내가 너희를 쫓아 보낸 모든 민족들과  모든 지역에서 너희를 모아 오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를 유배 보냈던 이곳으로 너희를 다시 데리고 오겠다." (예레29,10-14)

'일흔 해' 바빌론 포로 기간인데, 대체적으로 1차 포로때인 여호야킴 3년부터(다니1,1-5 ; BC605) 키루스의 조사로 인해 1차로 귀환한 시점(에즈2,1-70 ; BC536)까지로 본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22)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BC539년부터 529년까지 왕국을 통치했다.(에즈 1,1 ; 이사 44,28) 주님께서 키루스를 일으키시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케 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은 이사야 41장 25절, 44장 28절, 45장 1-4절, 13절에도 발견된다.

키루스의 이같은 마음의 변화는 바빌론 포로들의 회복 정책과 지역 종교의 융화 정책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마음을 움직이다' 해당되는 히브리어 '헤이르'(heir)는 '일어나다', '들어올리다',  '분발시키다' 라는 뜻의 '우르'(ur)에서 온 말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단순히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을 '돋우는 것', '감동시키는 것' 가리킨다.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은  유다 백성들이 포로 생활 70년 후에 다시 본국으로 귀환될 것이라고 한 예레미야의 예언을 말한다.(예레25,11 ; 29,10-14)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로 반포하였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이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게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 (23)

본문은 에즈라기 1장 1-3절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소개되어 있는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칙령이다. 그런데 이 칙령은 BC 538년 키루스 원년에 선포되었기 때문에, 유다가 멸망한지 약 50년 이후의 일이어서, 연대기적으로는 크게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학자들은 몇 가지 추측을 하는데, 가장 타당성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이 본문(23절)을 역대기서의 부록으로, 이 책의 독자들 즉 포로생활로부터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다 희망적인 결론을  보여주기 위해, 역대기 저자가 추가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대기 저자의 의도는 유다의 포로생활을 땅의 안식과 관련하여 보다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열왕기 저자도 여호야킨이 감옥에서 풀려 나와 존귀하게 된 사실을 기록하며(2열왕25,27-30) 본서 저자의 의도와 비슷하게 희망적인 결론 맺고 있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본절에서 키루스가 '예호봐'(Jehovah)라는 히브리적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키루스는 다니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느님 예호봐(Jehovah)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히브리어의 거룩한 문학들(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서)에 대해서도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하느님을 나타내는데, 이같이 표현한 것은, 하느님의 사명을 감당할 자로 자신을 자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듯하다. 아니면 당시 사용된 외교적인 어법에 의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전자든 후자의 주장이든 관계없이 중요한 것은, 키루스가 유다의 회복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이사44,28-45,5)  그러기에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땅으로 되돌아와 하느님을 다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방의 왕들을 이용하셔서 당신 백성들을 심판하시기도 하고 약속을 이루시기도 하는 역사의 주인이신 것이다.

 

역대기 저자는 예루살렘 멸망 때, 수많은 백성들이 성전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한다.(2역대36,17) 이것은 바빌론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진입하니까, 백성들이 대거 성전으로 피신했던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아마도 성전이 자기들을 보호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들의 반응은 과거 반역을 시도했던 아도니아요압이 범죄하고 나서, 성소로 피해 제단 뿔을 잡은 행동을 연상시킨다.(1열왕1,51 ; 2,28)

그러나 그처럼 성전에 피한 그들은 바빌론의 군사들에 의해 성전 안에서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들의 성전에 대한 신앙은 미신에 불과한 것임이 입증되고 말았다.

 

역대기 저자는 이런 불행한 최후에 대해서, 주 하느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은"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2역대36,15-16)

백성들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는 성전은 더 이상 거룩한 곳도 아니고, 하느님의 백성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잘못된 '성전 신앙'에서 벗어나 오로지 '말씀과 성체의 힘과 영성을 사는 신앙'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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