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3.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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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8-03-21 | 조회수2,318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2018년 3월 21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제1독서 다니 3,14-20.91-92.95 그 무렵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14 물었다. 너희가 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또 내가 세운 금 상에 절하지도 않는다니, 그것이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아벳 느고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응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17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18 임금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노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보며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가마를 여느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 20 또 군사들 가운데에서 힘센 장정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묶어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지라고 분부하였다. 91 그때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서서 자문관들에게 물었다. 사람은 세 명이 아니더냐?” 하고 대답하자, 92 임금이 말을 이었다.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복음 요한 8,31-42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이 모습을 본 외국 관광객이 “이곳 사람들은 정말로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멕시코 안내원은 “감사한다고요? 천만에요. 감사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1940년대 미국인들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가능한 일을 바라봅시다." 고등학생 때, 영화 ‘미션’을 보고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제를 꿈꾸는 있었던 저에게 영화에서 보여주는 선교사의 모습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배경인 남미, 특히 어마어마한 이구아수 폭포의 모습에서 꼭 한 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너무나 먼 남미에 갈 수 있을까 싶었지요.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었던 저로써는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몇 년 전 주교님과 함께 이곳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영화 속에서만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곳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어디 있을까요? 그보다는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고 있는 부정적인 내 마음 때문에 실제로 못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불가능한 것이 많은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불가능한 일보다 가능한 일이 많을 때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불가능한 일들만을 바라보면서 가능한 일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요?
영상으로만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직접 보고 이렇게 사진도 찍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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