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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3.22)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3-22 조회수2,012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8년 3월 22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창세 17,3-9

그 무렵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4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5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6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에게서 임금들도 나올 것이다.

 7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8 나는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9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복음 요한 8,51-59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52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53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5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57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5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59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지금 제 휴대전화에는

상처가 정말로 많습니다.

여기저기 긁힌 자국뿐만

아니라 액정에 금이 간

부분도 많습니다.

스스로는 잘 사용한다고

 사용하는데도 왜 이렇게

상처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은 휴대전화를

땅 바닥에 떨어트려서 완전히

액정이 부서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A/S 센터를 찾아가서

 액정교환을 부탁했습니다.

 솔직히 수리할 휴대전화를

건네는데 상당히 부끄러웠습니다.

상처로 가득한 휴대전화가 마치

 ‘제 주인은 주의력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거든요.
멋쩍게 웃으면서

“휴대전화가 조금 상처가 많지요?”

라면서 휴대전화를 내밀었습니다.

그때 A/S 직원이 이러한

뜻밖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괜찮아요. 이런 흠집은

자연스러운 것이죠.

그만큼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잖아요.”
직원의 이 말에 기분이

 괜히 좋아졌습니다.

‘그렇구나.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도 되는구나.

이런 상처가 오히려 영광의

 상처처럼 여길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우리 삶에 상처가

없을 수 있을까요?

이리 채이고 저리

채여서 각종 흠집투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산 증거’라고

여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시각이 부끄러운 모습도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뀌고 더불어서

세상의 모습도 변하게 됩니다.

 즉,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의미 있는 곳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만나는

사람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유다인들은 마귀 들렸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겠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세속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시각으로 보지 못하니

그 어떤 말씀을 하셔도,

 또 어떤 놀라운 기적도 그들의

마음을 변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내 자신은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주님의 시각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내 곁에 주님께서

오셔도 주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을 계속해서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시각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가지고 내 이웃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분명히 기쁨과 행복이 보일 것입니다.

긍정적인 생각만으로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실패가 확실히 보장된다.

평화를 염원하는 카페입니다.

"상대를 고치려면 내 자신이 더 불행해진다."

데이트 폭력을 당하는

어떤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애인의 폭력이 갈수록 심해지자

 주위 사람들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자매님은

 “때리는 것 빼고는 다 괜찮아.

 내가 고칠 수 있어.”라고

말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혼을 했지만 큰 상처를 입고서

곧 서로 헤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상대를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고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의 단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함께 살 수 있었겠지만,

고치려고만 했기에 함께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30년 넘게 같이 산 부모도

못 고친 자녀의 모습을 불과

 몇 년을 함께 살면서

바꿀 수 있을까요?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고치려는 마음은

 완전히 없애야 한다고

많은 심리학자들이 말합니다.

왜냐하면 더 큰 불행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상대방이 바뀌지 않아서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먼저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성가정이 될 수 있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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