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3-22 조회수3,186 추천수3 반대(0) 신고

우리의 시조는 누구일까요 ? 단군할아버지 혹은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와 같은 것으로 우리의 시조를 말하려 할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육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묵상글을 쓰면서 여러가지 말을 인용하여 보면서 과연 맞는 말인가 하면서 저를 돌아봅니다.. 저는 공학 박사이지 신학 혹은 철학의 박사는 아니고 그리고 그렇게 많은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묵상 글을 쓸때 좀 조심스럽기도 하지요 ..그런데 한가지 오늘도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한가지 인용하여 보렵니다. 요한 복음 일장에 보면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주님이 강생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이 말씀은 사람도 만들고 사람이 살고 죽고 하는 것을 관장하시고 그리고 생체에 법칙을 부여하시어서 살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생체의 법칙만을 부여한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같이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적인 것을 바라보면서 육적인 것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서열 혹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틀안에서 자신의 위치, 정체성을 받으려 한다는 것이지요 .. 이것은 복음의 가치가 퇴색하여서 나오는 것이지요..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독서에서 아브람은 하느님으로 부터 부르심을 받고 그리고 그 자손이 풍성하고 그리고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브람은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변경 받습니다. 그것도 하느님으로 부터 존재 자체의 정체성을 부여 받는 것이지요..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영원한 생명과 그리고 자신의 근원을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살고 죽지 않는다고 하시고 그리고 주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이전에 계셨던 분으로 당신의 정체성을 알게 하여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현존하고 같이계신다는 것을 말씀하신것이지요 ..그런데 유다인들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그분을 죽이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하느님에게서 보는 것이 아닌 인간안에서 인간이 주어지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느님을 바라본것이 아니지요 그렇기에 하느님의 아들을 몰라보는 것이지요 .. 영인 Logos에 의하여서 모든 만물은 현존하고 그리고 Logos의 원리에 따라서 움직이고 살아갑니다. 영에 의하여서 육은 생겨난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기에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분이시지요.. 그렇기에 믿음의 선조들이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육을 따르는 이들은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따랐기에 자신의 눈 앞에 오신 주님도 알아보지 못한것이지요 .. 주님을 만나려면 고요속에서 자신을 떠나야지만이 온전히 나에게 다가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매순간 조용한 터치로 나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육의 눈이 아닌 영의 눈을 뜨고 당신의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 당신의 현존을 깨닫고 그분의 부르심에 일대일로 대응하여야 겠습니다.. 신앙은 누가 대신하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일대일로 주님과 마주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항상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내가 육의 노예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자녀인지 항상 기도안에서 찾고 올바른 나의 모습으로 인도하여 잘라고 주님에게 기도하여야겠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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