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3.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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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8-03-23 | 조회수2,795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2018년 3월 23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예레 20,10-13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복음 요한 10,31-42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어렸을 때, 버스를 타려고 하면 거의 전쟁 같았지요.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필사적으로 타려고 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탈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 많은 승객들을 모두 태우기에는 버스가 터무니없이 작아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버스에 타게 됩니다. 바로 버스 안내원의 힘 때문입니다. 작은 체구인데도 무슨 힘이 그렇게 좋은지 어떻게든 승객들을 모두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않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없다면 버스에 온전히 탈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승무원은 많은 부분에서 자동화가 이루어지면서 버스기사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기에 1989년을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변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산을 배워야 사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주산을 배우는 사람을 찾기는 정말로 힘듭니다. 성냥은 어떠합니까? 아마 집에 커다란 성냥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라이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 사람, 문화, 생각 등등 온통 변하는 것투성입니다. 그런데 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특히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지요.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바로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결코 이 모습을 지혜롭다고 하지 않습니다. 돌을 집어 던지려고 합니다.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와 보다 더 가깝게 해준 것을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하고, 사랑의 실천이 율법을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여준 것을 율법을 어기는 아주 못된 사람 취급을 해버립니다.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신 과 거에만 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이었습니다. 악한 행동도 아니었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과 행동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은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받아들이기에는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너무 심했던 당시의 유다인들의 모습을 묵상해봅시다. 어쩌면 우리들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요? 도무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래서 그 어떤 변화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집 센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새로운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맞게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다. (도스토예프스키) 지금은 볼 수 없는 버스안내원.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 가족들이 여행을 가서 하루 24시간 내내 집에 혼자 있다는 상황입니다. 이때에 이런 감정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안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혼자만의 시간과 여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난 재미있고 즐겁게 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군가 같이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혼자서 원하는 방식으로 즐겁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각 감정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모든 감정이 다 옳습니다. 즉,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감정까지도 옳고 그름의 잣대로 나누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 모든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어떠할까요? 다양성 안에서 일치란 모두가 똑같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양함을 서로가 인정하는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옳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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