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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십자가를 잃으면 부활의 기쁨도 잃는다
작성자김리원 쪽지 캡슐 작성일2018-03-24 조회수2,637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8년 나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
 

복음: 마르코 14,1-15,47





예수님 십자가의 길


MEMLING, Hans 작, (1470-71)

 

  

봉사를 하고 기부를 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기쁘다는 연구 결과가 많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도 기쁘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봉사생활은 십자가라 할 수 있고 기쁨은 부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있는데 부활은 없는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와 부활은 순서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십자가에 부활이 숨어있고 부활에 십자가가 들어있습니다. 성인들은 대부분 더더욱 무거운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기를 원했습니다(아빌라의 데레사 자서전, 3926항 참조). 그 이유는 그 십자가 안에서 부활의 기쁨을 이미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고통만 있는 십자가는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십자가는 있지만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십자가가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2018)란 영화에서 남자가 불치병에 걸려 여자를 밀쳐냈지만 여자는 얼마 뒤 뛰어와 남자의 가슴에 안기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린 잘 할 거야... 그렇게 정해져 있어.”

여자가 그렇게 정해져 있다란 확신을 가지게 된 이유는 이미 미래를 살아봤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교통사고로 깨어나 보니 이전 남자친구의 집입니다. 아이가 있고 아이는 자신을 엄마라 부릅니다. 자신이 결혼하여 낳은 아이를 미래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아이는 이미 죽은 엄마가 다시 하늘나라에서 찾아왔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6주 동안 행복한 사랑을 나누다 다시 깨어나니 병원입니다. 물론 남자친구와 헤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미래에 다녀온 것은 확실합니다. 또 그렇게 남자친구에게 달려가 결혼해버리면 일찍 죽게 된다는 것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확신이 빨리 죽는 것보다 더 여자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그래서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차에서 내려 어리둥절해하는 남자친구에게 안기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린 잘 할 거야... 그렇게 정해져 있어.”

 

십자가와 부활은 마치 이렇게 엮여져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면 부활하고 부활하면 다시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이 연속적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기쁨은 영원히 멈추지 않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이 이유로 십자가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복음에서 유다교로 개종한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설교를 하십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진리를 위해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가 과연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지 궁금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알려주십니다. 그들에게 당신도 소크라테스처럼 진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상황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하늘에서 울려오는 아버지의 증언으로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면 진리도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라고 하시며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를 결심하십니다. 그 뒤의 부활의 기쁨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부활에 대한 믿음은 한 순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죽음과 부활들이 큰 죽음을 가능하게 합니다. 자신이 집착하는 것을 끊었더니 더 큰 기쁨이 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은 어둠에서 빛으로 올라오는 노력이 결코 그 보상 없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아침 기도를 반드시 드리고, 음식과 술을 절제하고, 성경 읽는 시간을 늘리며, 매일 미사에 참여하는 식으로 자신을 죽여 갑니다. 이전의 자신을 죽이면 반드시 그 보상이 있고 그 보상은 바로 부활의 기쁨입니다.

따라서 기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죽이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기쁨은 부활인데 부활은 반드시 자신을 십자가에 매다는 죽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바오로의 충고는 항상 자신을 십자가의 못 박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부활은 십자가 없이 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쁨도 자신을 죽이는 슬픔 없이 오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이 기쁘지 않은 이유는 실제로는 자신을 죽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나 봉사를 하고, 더 많은 돈이 들어올 것 같아서 봉헌을 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죽는 것 같아도 죽지 않는 이들에게 신앙의 기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 신앙인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느끼기 위해 우리가 지지 못하는 가장 시급한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서로 사랑하라는 유일한 계명을 위해 용서라는 십자가를 지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하는데 미워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미워하면 우리 죄도 용서 못 받는데 미움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 용서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번 성주간엔 마음에 응어리가 있는 사람을 위해 십자가의 길이나 성체조배, 묵주 기도 등을 해 봅시다. 이것만큼 나에게 유익한 부활을 주는 십자가도 없습니다. 기도하며 동시에 미워하기는 힘듭니다. 물론 미운 사람이 잘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십자가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미움이 사라지는 부활의 기쁨은 그 십자가와 비교도 되지 않는 영광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시급한 것은 십일조를 내는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이 가진 소유에서 선악과 한 그루를 주님께 바쳐야하는 십자가를 지지 않아서 온 인류가 원죄라는 것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역시 많은 신앙인들이 하느님이 나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인 십분의 일을 주님께 다시 봉헌하는 일을 거부합니다. 십자가는 주님만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따라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주님이 나의 주인임을 고백하는 신앙의 표시입니다.

어떤 이들은 천주교에서 십일조를 내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떨어져나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반대입니다. 오히려 십일조를 내며 하느님을 나의 주님이라 인정하지 못하기에 냉담자가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번 돈을 모두 아내에게 주는 사람이 가정에 더 충실하겠습니까, 아니면 먹을 식비만 주고 나머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쓰는 남편이 더 가정에 충실하겠습니까? 더 봉헌하면 더 충실하게 됩니다.

가톨릭교회도 1917년 법전까지는 십일조에 대해 지방 교회법을 따르라는 언급이 있었지만(1502조 참조) 1983년 법전에서는 십일조의 언급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저는 이것이 좋은 현상이라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 성경은 일점일획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제 우리가 그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천주교는 이제 주일미사 참례율이 20%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는 어쩌면 주님을 온전한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노력이 부족해서 그만큼 교회에 대한 애정도 작아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십일조에 대한 강론을 한 것을 십 년 전에 듣고 바로 십일조를 시작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50만 원 정도 내었는데 지금은 그것의 세 배를 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주님께 바친다고 결코 부족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십일조에 대한 말을 하면 보는 시선들이 좋지 않아 얼마를 내는지 숨기고 살아야 하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말하고 싶은 것은 십일조를 일단 내 보면 부족함이 없는 부활의 기쁨이 반드시 쫓아온다는 체험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십일조를 넘어서 새 해가 되면 봉헌금을 위해서도 새 돈으로 200만원을 바꾸어놓고 그것으로 일 년 동안 봉헌한다고 합니다. 이전엔 돈이 꾸겨지면 다리미로 펴서 봉헌하고는 하였는데 지금은 그런 정신도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면 그분도 우리를 당신 자녀로 인정해주셔서 부족함이 없이 하십니다. 그렇게 정해져있습니다. 정해져 있는데도 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십자가가 바로 친교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친교를 하도록 소공동체와 같은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잘 안 되는 형편입니다. 단체나 소공동체 등 하나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으면 내가 성당에 나오지 않아도 아무도 신경써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시간과 돈과 사람을 참아내야 하는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적어도 한 공동체에는 가입되어 있어야 서로 챙겨줄 수 있습니다. 그런 용기를 내면 그 안에서 친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기쁨입니다. 주일미사만 나오는 것은 믿는 이들의 친교를 통한 기쁨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친교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함께 만나면 행복하게 돼 있습니다.

 

예수님만 십자가에 매달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사랑해야합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아무 십자가도 지려하지 않으면서 매번 주님만 십자가에 매달며 눈물을 흘려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제가 제시한 것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다만 십자가 없이 신앙생활 하려하는 분위기가 쇄신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죽었을 때 죽은 자의 평화가 밀려오고 세상의 비판이나 세상에서의 망하는 것이 두렵지 않고 됨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살아있으니 이 세상이 힘든 것입니다. 내가 죽이면 걱정도 화도 두려움도 없어지고 평화만 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은총인 것입니다. 십자가가 사라지면 기쁨도 사라집니다. 기쁨 없는 신앙생활은 십자가를 버린 결과입니다. 기쁨이 없다면 부활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 성주간 동안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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