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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3.25)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3-25 조회수1,900 추천수6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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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5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제1독서 이사 50,4-7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제2독서 필리 2,6-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복음 14,1-15,47

마르코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전에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임신을 했는데 너무 힘들다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조울증을 앓고 있어서

약을 복용하고 있었는데,

임신을 위해 약을 끊었고

얼마 뒤에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분을 조절하게 하는 약은

태아에 잘못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절대로 복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요.

하지만 이를 먹지 않으면

산모는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자매님께서는 결국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약을 끊었습니다.

왜냐하면 뱃속에 있는 아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위해서, 아이를 위한

사랑의 마음이 약을 끊을 수

있는 결단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하시더군요.
이렇게 사랑의 힘이란

모든 것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큰 사랑의 힘을

성주간이 시작하는 오늘

우리는 주님을 통해서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호산나’라는

외침으로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호하지요. ‘호산나’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향한

 외침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어떠할까요?

승진이 아닌 좌천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주의 주님께서 인간 세상의

임금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주들이

하듯이 늠름한 말을 타고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초라한 빌린 마귀를

타셨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그래도 우리 인간들을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포기한 것은

하느님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인간의 구원을 위해 모욕을 당하는

죽음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려워집니다.

문득 얼마 전,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 하나 생각납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식당 안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왜 밥 안 줘!”라고 외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서 고개를 돌리니,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상당히

많이 화가 나셨나 봅니다.

번호표를 들고 아무리 기다려도

자기 번호가 표시되지 않고

다른 번호만 표시된다는 것이지요.

너무 화가 나서 “왜 밥 안 줘?”라고

 소리치셨던 것입니다.

담당자가 얼른 할아버지 곁에

가서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할아버지, 이 번호는요 이곳이

아니라 저쪽 한식 코너에요.

여기는 양식 코너라서 주문하신

음식이 여기에서 안 나와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
할아버지께서 잘못하신 것이라고

무안을 주고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용히

말씀하시면서 할아버지에게

무안함을 주지 않았고,

또 할아버지를 정성껏 모시고

가는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존경스러워 보일까요?

큰소리를 자신의 불만을

외친 할아버지일까요?

아니면 조용히 할아버지를

상대한 직원일까요?
내게 화를 낸 사람에게 똑같이

화를 내게 되면 어떻습니까?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서 분명히

서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꼭 화를 내야만

문제가 해결될까요?

문제의 해결은 더욱 더

꼬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큰 힘은 폭력이 아니라,

폭력을 누르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폭력에

폭력을 맞서지 않으십니다.

그보다 더 큰 사랑으로

폭력에 맞섰고,

그래서 십자가를 짊어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약한 하느님을 보여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장 큰 힘이 어디에

있는 지를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이 큰 힘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성주간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크신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

 우리 역시 사랑을 전하는

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듣는 것은 보는 것보다 못하며
보는 것은 아는 것보다 못하다.
그리고 아는 것은
행동하는 것보다 못하다.
(순자)

예루살렘 입성을 하시는 예수님.
"작은 사람"
(오세민)
사제품을 받고
첫 부임지로 떠나는 날,
 어머니는 보따리 하나를 건넸다.
힘든 일이 있을 때 풀어 보라며,
안에는 편지와 한두 살 무렵
입던 작은 옷가지들이 있었다.
“사랑하는 막내 신부님,
신부님은 원래 이렇게
작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잡지책에서 보게 된 글입니다.
자녀 중에 네 명을 신부로 만드신
 어머니의 가르침이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작은 사람이었는데,
 왜 큰 사람인 것처럼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일까요?
막내 신부님께 하신 이 말씀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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