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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25.강론.주님 수난 성지 주일 -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오스딩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8-03-25 조회수2,217 추천수1 반대(0) 신고

 

 

주님수난성지주일(마르 14,1-15,47)

 

 오늘은 주님성지수난주일입니다. 부활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 <전례>는 기쁨과 슬픔이 혼합되어 교차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기쁨이 충만해 있습니다. 호산나 하고 외쳐대는 군중들의 환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환호는 일시에 지나가고, 수난과 죽음의 비탄이 젖어듭니다. 환호와 환영의 축제행렬은 이제 배척과 조롱의 십자가 행렬로 바뀝니다. 축복의 성지가지는 저주의 채찍이 됩니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던 이들은 이제 예수님의 속옷마저 벗겨갑니다. 나귀위에 오르셨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달리십니다. 왕으로 떠받들어져 성 안으로 모셔졌던 그분은 마침내 강도와 함께 성 밖에서 처형됩니다.

 그래서 <성주간>이 시작되는 오늘은 두 개의 명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성지주일>이면서, 동시에 <주님수난주일>이라 불립니다.

 

 오늘 <1독서><주님수난주일>의 특성을 잘 나타내줍니다.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뺨을 내맡기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 <야훼의 종의 셋째노래>를 들려줍니다.

 오늘 <2독서><주님성지주일>의 특성을 잘 나타내줍니다. 예수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 찬가>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마르코가 전한 예수님의 수난기>를 들려줍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1,1)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통해서 당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악령들이 예수님의 신비의 일면을 알아챘을 때에도(1,34; 3,12), 당신의 변모를 체험한 제자들에게도(9,9)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곧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신비에 가려졌습니다.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부분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드러나는 부분이요(14,1-52), 둘째부분은 다른 등장인물들, 곧 성전경비병, 군중, 대사제, 다른 유다인들, 빌라도와 그의 군인들이 등장하는 부분입니다(14,52-15,41).

 이제, 메시아의 비밀은 오늘 <복음>인 이 수난기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 신비의 전모가 폭로되게 됩니다. 마르코복음사가는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셨을 때 생긴 일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마르 15,38)

 

 그렇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가리고 있던 비밀의 장막이 두 쪽으로 찢어졌습니다. 감추어진 베일을 찢고서 당신 자신을 열어 보여주신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그분을 감추고 있던 신비의 베일을 벗겨줍니다. 바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줍니다.

 바라봄, 발견에 대한 놀라움에서, 예수님 수난의 극적인 사건은 비로소 신비롭고 경이로운 기쁨으로 번져갑니다. 결국, <마르코복음>의 전체 줄거리는 바로 이 발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발견은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하고 감독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본’(관상한) 백인대장의 고백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 15,39)

 

 대체, 백인대장은 이 나약한 십자가의 죽음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바보같이 죽어가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본 것일까?

 이제 십자가의 무력함전능함으로 바뀌게 되고,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실, 그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끝이 아닌 시작을 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봅니다. 실패가 아닌 승리를 봅니다. 곧 그는 나약함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신적 권능을 봅니다. 전능함이 무력함 안에서 이루어짐을 봅니다. 약함의 어리석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권능을 봅니다. 어둠 가운데서 오히려 빛과 사랑의 무한함을 봅니다. 죽음을 건너간 사랑을 봅니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이 찢어진 자리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라, 자신을 바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랑을 보았습니다. 죽음은(십자가는) 언제나 모순을 드러내지만, 바로 그 모순은 찢어졌고, 아니 바로 그 모순과 화해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음에 지배당하면서도 오히려 죽음은 찢어져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는 사랑의 장소가 되고. 구원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십자가에 메달리신 분이 구원자 메시아임을 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 15,39)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이 나약함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찢어질 때입니다. 우리네 세상의 기준이 찢어질 때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판단이 찢어지고, 사랑에 눈을 뜰 때입니다. 사랑을 바라보게 될 때입니다. 사랑으로 바라볼 때입니다. 바로 그 모순과 화해할 때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야말로, 십자가의 이 무력함이야말로, 바로 그리스도의 신비요,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아니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는 비결이 됩니다. 진정, 자유로워지는 비결이 됩니다. 구원의 길이 됩니다. 해방인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은 내 자신이 찢어지는 것이요, 내 의식의 장막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억울하게 묵묵히 나약하고 어리석게 죽어간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 신비 앞에, 우리 자신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나는 자신을 내놓고 죽는가? 그 바람에 찢어지고 있는가?

나 자신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찢고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는가?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가?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마르코 복음사가가 주님 수난에 대한 극적인 사건을 전해주면서 바라는 요청이요, 권고일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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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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