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성주간에 예수님 수난의 진정한 의미를 / 성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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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8-03-26 | 조회수1,694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살려주신 라자로가 살고 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고 마르타는 시중을 열심히 들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라자로를 맞아들이는 가족들의 기쁨은 형용할 수 없다. 그분을 맞이하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마음은 사랑이 넘쳐흐른다. 마르타의 사랑은 손님맞이와 시중드는 봉사였다. 라자로는 예수님 곁에 있었고, 그의 동생 마리아도 함께했다. 사람은 관계를 맺으며 산다. 그래서 마음을 서로 헤아리려고 애쓰는 가운데 조금씩 가까워지며 깊어만 질게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가 되려는 것이리라. 동생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는다. 순간 온 집에 향유 가득했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핀잔에 예수님은 ‘그냥 두어라.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라며 말리셨다. 이 그녀의 행동은 신앙의 증거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봉헌하는 거다. 성주간 월요일 이 아침에 고요한 마음이 인다. 태풍 전야의 정적과 긴장이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묵상에 잠긴다. 여느 때처럼 이 성주간을 차분히 지내자. 예수님 수난과 죽음이라는 놀라운 사건에도 그리 동요가 없다. 그 심한 괴로움에도 조용히 마리아에게 당신 발을 맡기시며 ‘죽음과 장례’를 말씀하시는 예수님 모습이 부드럽기까지 하다. 어쩜 그분 모습에서 죽음과 부활, 섬김 주고받는 게 상반되게 묘사된다. 첫째가 죽음과 부활이다.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잔치 자리서 마리아는 예수님 발을 닦아 드린다. 예수님 말씀대로 당신 ‘장례’를 위한 것이라나. 사실 최고 의회에서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 라자로를 살리신 게 정작 그분께서 돌아가시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죽음과 상반되는 부활, 아니 부활과 상반된 죽음이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저 남매처럼 예수님을 온전히 섬기며 그분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자. 예수님을 만난 인연으로 그분에게 주어진 고통의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것이 진정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일 게다. 우리는 어느 쪽일까?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냐, 예수님을 몇 푼 동전으로 넘긴 유다냐? 은총을 누릴 성주간이다. 이 한 주간만이라도 유다의 모습은 아예 접어야겠다. 그리고 이 거룩한 성주간에 예수님 수난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정녕 어떠한가? 우리는 그분의 이 고통의 수난과 죽음에서 지극한 사랑과 감사를 느끼는지? 아낌없이 내어 준 저 ‘마리아의 모습’으로 살아보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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