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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3-29 조회수2,004 추천수0 반대(0) 신고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 찬미예수님 !

한 주일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오늘 사순 4주일,

그전에는 촛불 색깔과 같이

보라색이었는데 장미색으로

제의 색이 바뀌었습니다.

왜 사순 4주일에 사제가

 장미색 제의를 입을까요?

사순 4주일을

장미주일이라고 불렀어요.

사순 3주일 동안 너무

고생 많이 했으니 사순 4주일에

조금 쉬어가라 뜻입니다.

오늘은 요한복음을 들었습니다.

요한복음은 1장 1절부터 어려워요.

오늘 복음에 ‘믿는다’는 단어가

몇 번 나오는 줄 아세요?

다섯 번 나옵니다.

뭘 믿는다는 겁니까?

세상 사람들은

돈, 명, 권력, 능력, 주먹, 지식

등을 믿고 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뭘 믿으라는 것에요?

여러분들, 주일날, 대축일 날

 하는 사도신경 앞부분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신앙 고백의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이나 누군가가 아닌

천지의 창조주를 믿는 것입니다.

믿는 것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사실은 행복이 결정이 됩니다.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내용입니다.

앞으로 사도신경 하실 때 마다

입으로만 외우는 것이 아니라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특별히 나를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에요.

여러분들이 바퀴벌레, 뱀,

쥐 등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남에 감사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으로

지음 받았음을 믿는 것,

그것이 모든 감사의 첫 단추에요.

성서에 보면 진흙으로

사람을 빚었습니다.

눈, 코, 입을 다 만들어놓고,

오장육부를 만들어 놓고,

그때까지도 사람이 아니라

진흙인형 이죠.

마지막에 코에 숨을

불어넣음으로써 사람이 되었죠.

그런데 성서에 안 나오지만

진흙인형이 땅바닥에

누워있다고 봅시다.

코에다가 숨을 불어줄 때는

하느님은 무릎을 꿇으셨을 겁니다.

다시 말하면 무릎을 꿇으면서까지

온 정성을 다해 만든 게 바로

 ‘나’라는 것을 믿는다는 겁니다.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의 첫 번째 뜻은 바로 ‘나’를

창조하신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주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은총의 밤 강론에 돌아온

탕자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돌아온 탕자가 과연

다시 나가지 않았을까가

저의 오랜 묵상거리였습니다.

분명 탕자는 몇 가지를

견뎌내지 못하면 나갔을 것이고

그 중 하나가 영적 열등감입니다.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했다는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면 분명히

다시 나갔을 것이다.

그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심을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사랑은

기브 앤 테이크

(give & take)죠

내가 너를 사랑한 만큼

나도 네게 사랑받고 싶으니

보여 달라는 것이 인간의

에로스적인 사랑이죠.

그런데 내가 받고 싶은 것만큼

되돌아오는 것이

없으니 상처를 받고,

상대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나를 창조하신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붙지 않습니다.

간음하다가 돌에 맞아

줄을 뻔 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십니다.

돌을 던지려 할 때 온 몸으로 막고,

죄 없는 자부터 치라 하니

나이 먹은 사람부터 돌멩이를 놓았죠.

그 넓은 광장에 막달레나와

예수님과 단 둘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미주알고주알

가르치지 않았어요.

’다시는 죄 짓지 말거라.‘ 단 한 마디.

그 한 마디 말은 어떤

가르침보다도 큰 울림으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런 사랑입니다.

방탕하게 세상 죄 속에 살다

헤매다 돌아온 탕자를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은 얘기 드린 것처럼

늘 주면서도 돌아올 것을 기대합니다.

사랑에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

붙기 시작하면 기쁨이 깨지기

시작해요. 그것이 상처가 돼요.

무조건 주어야 돼요.

그것이 우리의 목표에요.

주님이 그러셨고, 주님이 나를

창조하실 때 조건을 붙이신 적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주는 겁니다.

주고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들어도 속상하지 않고.

그 빈자리를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기쁨이라는 선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그 어줍지 않은 칭찬의 말은

안개처럼 지나가고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세 번째의 의미는 주님은

현재 나의 고통을 알고 계시고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늘 날 돌보고

계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약한 인간은 너나나나 할 것 없이

항상 두려움과 공포에 삽니다.

병에 대한 두려움은

나이 먹어가면서 점점 생기죠.

병원에 갈 때마다

결과에 두려워집니다.

외로움에 대한 불안감,

죽음에 대한 공포,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

생각지도 않았는데 암 선고를

받을 때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럽고 무섭습니까?

의지하고 믿었던 사람이

갑자기 병 때문에 세상을

떠나면 얼마나 외롭습니까?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 일이

내 일이 될 때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크든 작든 고통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우 분들,

상기하고 명심합시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장소는

 꽃밭이 아니라 가시덤불 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성인들이 하느님을

체험한 곳은 평야가 아니라

고통이라고 하는 광야입니다.

물론 고통은 구분해야 합니다.

본인의 분별과 지혜가 부족해서

자초한 고통도 있지만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고통도 분명히 있어요

그러나 두 고통 모두 중요한 것은

내가 질만한 십자가를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은 현재 나의

고통을 알고 계시고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임을

믿는다는 뜻이겠죠.

 네 번째의 의미는 ‘주님은 내 앞길

선하게 예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돌아가신

선친께서 제가 어릴 때부터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옛날 공동번역과 지

금 새 번역은 조금 다르지만

공동번역은 제 머리 속에

남아있어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좋고 나쁜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하여 선한 결과를 이룹니다.>

선친께서 좋아했던 구절이었고,

사실 저도 사제서품

성구를 이것을 쓸까 하다가

다른 것을 썼습니다.

지금 이 길이 험하고 힘들어도

나중에 산 위에서 올라온 길을 보면

제일 편한 길이었음을 봅니다.

다른 길은 절벽이요,

낭떠러지요, 늪이요.

올라갈 때는 왜 이리 힘드냐며

하느님께 삿대질하고 내 인생을

저주하고 살았지만, 알게 되죠.

야훼이레라는 말이 있죠.

 그 뜻은 하느님은 내 앞길

예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 다섯 번의 믿는다고

하는 말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믿는다는 것은

사도신경에 나오는 천지의 창조주를

믿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나를 당신의 모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을 믿겠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고 쓸모없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고

발에 밟히는 미물이 아니라

나를 만드실 때 하느님께서

무릎까지 꿇으시면서 정성을

다해서 만든 귀한 존재라는 것.

여러분들, 자신을

사랑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어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겠습니까?

 두 번째로 주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죠.

그것도 조건 없이.

세 번째는 주님은 현재 나의

고통을 알고 계시고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야훼이레, 내 앞길 선한 쪽으로

반드시 나를 이끌어주실 거라는 것을

믿는다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출애굽 광야에서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어갈 때

모세가 구리 뱀을 들었습니다.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나았지만,

그것을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뱀독이 퍼져 죽었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디를 바라보는 가,

 방향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과 눈을 맞추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불뱀에 물렸을 때 구리뱀을

바라본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주님을 보던 그 시선을

딴 데로 돌린 순간 물속으로 빠집니다.

그래서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며

시선을 다시 주님께로 향하고

베드로는 다시 살아난 거죠.

이처럼 주님을 바라보면 살고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죽습니다.

비록 만신창이가 되고 죄 중에

 빠져있다 하더라도 주님을

 바라보면 삽니다.

부끄럽다고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죽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을

쳐다볼 수 있게 높은데

매달려 계신지도 모릅니다.

 사순절은 내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내가 주님을 제대로

쳐다보고 있는지

확인할 시기입니다.

주님을 쳐다보면

기쁨이 충만해지고

평화가 충만해지고 사랑이

충만해짐을 믿으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사순절을

주님 쳐다보면 부활 준비를

열심히 하도록 합시다. 아멘.

2018년 사순 제4주일 (3/11)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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