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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4.03)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4-03 조회수3,527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8년 4월 3일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제1독서 사도 2,36-41

오순절에,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36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41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

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복음 요한 20,11-18

그때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개인의 자질에 따라서 조금 더

 빠르게 할 수는 있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갓난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이제 기어 다니는 것을 멈추고

 일어나서 걸어야겠다.”라고

선언한 뒤에 잘 걷는 것이 아닙니다.

수만 번 넘어져야 발에 힘을 주고서

 일어나 걸을 수 있습니다.

 물에 들어가자마자 수영을

 잘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대로 수영을 하지 못해서

엄청나게 많은 물을 들이켜고

난 뒤에 물 속에서 편안히

즐길 수 있는 것이지요.

자전거를 잘 타기 위해서도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진

경험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갓난아기 때부터 우리는

이러한 실패를 많이

경험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먼저 자책을 하고,

그 다음에는 외부 탓을 하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마음들이

결코 지금을 극복하고

 일어날 수 있도록 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이를 피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강아지를 키우는데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다가

은 공터에서 자유롭게

놀라고 풀어놓곤 합니다.

그런데 냄새를 맡으면서

이리저리 뛰어 놀면서도

계속해서 저를 둘러보고

제게 다가옵니다.

개는 분명한 경계와 제약 안에서

안심하고 편안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 곁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떠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만 안심하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실패를 해도 주님 곁만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분명히 커다란

평화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실패도 괜찮아.’라는

마음을 갖고 다시금 일어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삶이 필요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고는

마냥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는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자신이 모시겠다는

 마음이 가득하지요.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알고는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은 커다란

슬픔이었지요.

분명히 실패의 체험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려는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녀는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의지가 바로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실패로 보이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이 됩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많은

실패가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모시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성공이란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를 거듭할 수 있는 능력이다(.

윈스턴 처칠)


라뿌니!!!

"관계의 극복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들과의 관계가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고통은 대부분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온다고

할 정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로 내게 아픔과

상처를 준 사람들을 떠올려보십시오.

 나와 상관없는 사람,

친분이 없는 사람,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아픔과 상처를 준 사람은 늘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가족처럼

가까웠던 성당 친구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친구를 믿고서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했는데,

이 이야기에 살을 붙여서

글쎄 있지도 않은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받은

배신에 충격을 받았고,

모든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렇다면 관계를 끊어 버리는

것이 최선일까요?

관계를 끊어 버리는 것은

문제의 해결을

가져오려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 것입니다.

대신 자신의 관점을

 바꾸면 어떠했을까요?

상대방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애초에 내 자신이 포기하거나

 버려야 할 것은 없었는지를

살펴본다면 어떨까요?
사실 사람들과 잘 지내려고

노력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정작 소중한 관계를

지키는 데는 소홀한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잘하려고

노력하면서,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실 바랍니다.

봄이 확실히 왔습니다. 꽃이 활짝 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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