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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4.11)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4-11 조회수3,400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8년 4월 11일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사도 5,17-26

그 무렵

17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18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

1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20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21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

 한편 대사제와 그의

동조자들은 모여 와서

최고 의회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원로단을

소집하고, 감옥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22 경비병들이 감옥에

이르러 보니 사도들이

 없으므로

 되돌아가 보고하였다.
23 “저희가 보니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24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이 말을

듣고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며,

사도들 때문에 몹시

당황해하였다.

25 그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보고하였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6 그러자 성전 경비대장이

경비병들과 함께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는 않았다. 

 복음 요한 3,16-21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성지 순례의 시작은 비행기를

타는 것부터 시작이 아닌가 싶습니다.

런데 출발부터 삐끗거립니다.

짐 부치는 곳의 직원이 오늘

 만석이라 좌석이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표현은 안 했지만 내심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바로

제 앞의 사람 좌석이

업그레이드되고 저에게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말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기대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요.

 여기에 중국 영토 위를 지나가는

항공기 숫자 제한으로 인해 예정

출발시간보다 30분 늦게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전에 타던 비행기보다

작고 좌석도 훨씬 좁습니다.
여기에 저의 좋은 습관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비행기가 뜨기 전후로 1시간을

전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모르고 아주 편안하게

잠을 잡니다.

따라서 이 상태로 오랫동안

자야 비행기 안에서의 불편함을

느끼는 시간이 줄어들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바람과 달리

비행기가 출발하고 나서 딱 30분

 만에 깨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중간 중간

쪽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어떤 점에서부터 삐끗했을까

 싶었습니다.

바로 ‘기대’에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을 얻으려는

기대가 문제였습니다.

성지순례를 쉽고 편한 것을

얻는 자리가 아니지요.

그러나 당연한 것을 힘들다고만

 생각하니 비행기 타는 것이 힘들고,

마드리드까지 가는 시간이 힘들고,

좁고 불편한 자리에 11시간

있어야 한다는 것도 힘들고...

 힘든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지순례에서는 편하고

쉬운 것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주님 만날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쉽고 편한 자리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편하고 쉬운 것만

찾는다면 주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불편하고

힘든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분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지요.

그리고 그 외아들을 믿는 이는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힘주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빛이신

주님이 아닙니까?
묵상을 하다 보니 우리 삶 전체가

하나의 성지순례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주님을 기대하고 주님이

가장 먼저인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쁨과

행복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기준을 기대하고

세상 것이 먼저인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평불만의 길을

걷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지금 내 삶의 성지순례를

해야 할까요?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워서는 행복한

성지순례가 될 수 없습니다.

양보와 배려, 믿음과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장 올바른

내 인생의 성지순례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 편하고

쉬운 것만을 생각해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불편하더라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더욱 더 사랑하고

배려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려 합니다.

잠시의 쉽고 편함을 얻는 것을

통한 기쁨보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기쁨이 훨씬 더 크고

오래 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길이 너무 실없이

끝나 버린다고

허탈해할 필요는 없어.

방향만 바꾸면 여기가

또 출발이잖아

(영화 ‘가을로’ 중에서)

이제 한국을 떠납니다.

"고수 신앙인"

지금 한국에 사시는 분들은

아침 시간에

이 묵상 글을 보시겠지요.

그러나 제가 있는 스페인에서의

시각은 새벽 1시 30분입니다.

지금 막 호텔에 돌아와서

 여러분들이 기다릴까봐... 잠시

묵상을 하고 이렇게 글을 씁니다.

 아마 이 글을 보고 계실 때,

저는 꿈나라에 있겠지요.

물론 시차 때문에 잠이 제대로

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어제 저는 공항에 일찍 도착해서

함께 순례를 가는

분들을 맞이했습니다.

하나 둘씩 오시는 순례객들을

보면서 여행고수와 여행초보를

금방 알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짐의 양에서 결정됩니다.

여행을 많이 다니신 분들은

짐의 양이 적고 가볍습니다.

무겁게 가지고 가봐야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가지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따라서 여행고수들은

짐을 최대한 줄입니다.
하지만 여행 초보들은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 싶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가방 속에

집어넣지요. 글쎄 여행 가방을

한 달 동안 싼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더군요.

그러다보니 가방

하나로는 부족합니다.

보조 가방 안 역시 가득 채웁니다.
그 많은 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혹시’라는

생각 때문에 그 짐을 줄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까? 아니지요.

 ‘혹시’라는 마음에 차마

버리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여행해봐야 나만 힘듭니다.

주님을 따르는데도

다 가지고 다니느라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요?
진정한 여행고수는

짐이 가볍고 작습니다.

그래서 힘차게 움직여서

더 많은 것을 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고수 신앙인도 자기 마음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는 버림의

시간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불편했던 순례 시작의

마음을 버리고,

지금 해야 할 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의 마음도 버립니다.

이해하지 못했던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 역시 버립니다.

갑곶성지에 없어서 무슨 일

생기지는 않을까 싶은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착각도 버립니다.

사랑을 베풀지 못하게 만드는

게으름과 무관심으로 버립니다.
진짜로 버릴 것이 많습니다.

아직 고수가

되려면 멀었나 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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