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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4.12)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4-12 조회수2,065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8년 4월 12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도 5,27-33

그 무렵 경비병들이

27 사도들을 데려다가

최고 의회에 세워 놓자

대사제가 신문하였다.

28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3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33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복음 요한 3,31-36

31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32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35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아마 1994년,

제가 신학생 때일 것입니다.

당시는 컴퓨터가 반드시 필요한

가전제품처럼 취급되기

시작했을 때였지요.

그러다보니 너도나도

컴퓨터를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학생들이

저를 찾아와서 컴퓨터 한 대만

조립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용산상가에 직접 가서

싸지만 좋은

부품들을 구입해서

직접 조립을 했었거든요.
너무 많은 신학생들이

부탁을 하다 보니,

장사해서 이문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왜 내 시간을 소비하면서

이것을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컴퓨터

조립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는 못해.

나는 이런 것을

조립해본 적이 없어.”

라고 말하지만,

차분하게 가르쳐주고 나면

“아니, 이렇게 쉬운 것이었어?”

라고 대답합니다.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

컴퓨터이고

또한 고가이기 때문에 자신이

조립하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또한 무엇 하나 잘못해서

 고장이라도 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래서 해보지도 않고서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또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제 순례를 다녔던 곳은

스페인의 세고비아와

아빌라입니다.

바로 대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 성인을 기억하고

묵상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분들의 많은 업적 중에서

정말로 대단한 것은 수도원

개혁이라고 알려져 있지요.

당시의 수도원에는 돈 많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많이 입회했습니다.

이런 사람들 역시 당연히

수도자가 될 수 있지만,

문제는 사회에서의 지위를

수도원에서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녀까지 데리고

입회해서 호사스러운

수도생활을 하고,

그에 반해 신분이

좋지 않은 사람은

수도원에서 하녀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깨버리려고 했지만,

 급박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

수도원의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은 제재를 받게 이릅니다.

이때 포기했을까요? 
이런 상황이 되면 아마 다들

자신이 그 공동체를 떠납니다.

본당에서도 어떤 충돌이 있으면

“내가 떠난다.”라고 하면서

본당을 떠나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신학생 때도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 때문에 자신은 사제가 되지

않겠다면서 떠났던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성인은 도피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 안에서의

개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피하고 거부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당신 목숨까지 내어 놓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셨던 주님을 기억한다면

우리 역시 더 이상 피할 것이 아닙니다.

또한 강하게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내 안에서, 내 공동체 안에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다시금 시도하고

노력할 수 있는 적극적인 마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노력을 기울였을 때

어느 순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쉬운 것이었어?”

“단지 시도를

해 보고 싶은 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이룬 것이다.”

(헬렌 버치)

대 데레사 성녀와 예수님의 만남.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인생"

(‘좋은 글’ 중에서)

세월이 빠르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고 있는 사실이죠.

나이를 먹으면 그 사실이

더욱 확연해집니다.

프랑스 로망롤랑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인생은 왕복표를 발행하지

 않기 때문에 한번 출발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무심결에 잊고 지내왔던

말이어서 그런지 우리 가슴에

따끔한 충고로 다가 옵니다.

지금도 우리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언제라도 쉽게

돌아올 듯이 가볍게 가고 있습니다.
이 길로 가는 것이 맞는지

이 사람과 함께 가도 괜찮은지 우

리는 여러 가지 것을

생각해봐야 하는데도 기분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 그때 그 사람 얘기를

듣는 것이 아닌데,

하면서 후회하게 되지요.’

그때 비로소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큰 상실감과

견딜 수 없는 불행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행보는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해야 합니다.
인생길은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일방통행로입니다.

오늘 따라 나의 한 친구가

한 말이 떠오릅니다.

 “자고 나니 어느 친구가

떠나고 없더라.” 는 말.
그래요. 우리는 모두가 붉게

불타는 황혼이지요!

언제 헤어진다는 기약 없는

우리의 하루 하루 서로 위로하고,

 용서하고 안아주면서 아름다운

세월을 만들어 가야겠지요...

대 데레사 성녀의 칠궁방.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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