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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부활은 영적 진화입니다)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4-13 조회수2,994 추천수1 반대(0) 신고

"부활은 영적 진화입니다"

+찬미예수님!

요즘 날씨가 좀 이상하죠?

많이 춥고 하늘도

황사 때문에 맑지를 못해요.

아까 5시 정도에 CCTV로

성당 안을 보니 텅 빈 거예요.

황사가 불어 안 오나하면서

기도했어요.

 ‘주님, 사람이 1/3만

찬다하더라도 이 김신부

절대 실망하지 않게

지금부터 마음을

잘 다듬어 주십시오.’

그런데 보좌신부님도

걱정이 되는지 주일학교

미사하고 오며 ‘신부님,

사람이 없어요.’

그 소리 들으니

더 걱정이 되면서 속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 바람과 황사 때문에

몇 명이 못 온다면 실망에 대한

묵상을 주실 것 같다.’

하지만 제가 진천본당

때부터 첫 토요일을

지켜왔는데 비가오고

길이 빙판이어도 다 찹디다.

그래서 ‘이제껏 주님이

잘 해주셨는데 오늘 갑자기

안 보내주실 일은 없다,

꽉 찰 거다,’ 라고 생각했는데,

 2층에도 앉아 계시고

아무튼 무지하게 반갑습니다.

 우리는 부활하고 마지막

주말을 보내고 있습니다.

부활한 후에 각 복음사가들이

한결같이 강조한 것이 있다면

부활의 실재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환상이 아니고,

환각 증세 때문에 보여 지는

 허깨비도 아니고,

영적인 현상이 아니라,

양손과 두 발등에 못 구멍과

옆구리에 창 자욱이

분명히 있는 인간 예수님의

부활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 앞에

나타나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즉시 알아챈

사람은 없습니다.

한참 지나고 난 다음에야

예수님의 부활을 압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하여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

예수님을 못 보게

막았던 것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눈을 가리게 했던

정체가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던

몇 사람을 짚어가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못 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아마 예수님의 부활을 하면

제일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가

생각이 나겠죠.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무덤에

제일 먼저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비어있었어요.

그래서 정말 통곡을

하면서 울었던 겁니다.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못 봤던 그 이유는

 바로 눈물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분명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면

저절로 슬픔이 오고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그 눈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개는 자기위주의 눈물입니다.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상실감,

혼자된 것에 대한 고독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

이런 것들이 눈물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일찍 남편을 여읜 여인은

 눈물로 밤을 새웁니다.

그 눈물 가운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남편에

대한 불쌍한 마음도 있겠지만,

자신 신세타령이

대부분일 겁니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없이

흘리는 눈물이라 하더라도

죽은 자가 하느님의

초대를 받아 영원한 영복의

상태에 있을 것이라는

죽은 자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마리아 막달라가 예수님을

못 봤던 제일 큰 이유는

자기위주의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막달라가

 예수님을 못 본 이유는

바라보고 있는

방향이 틀렸습니다.

방향성입니다.

빈 동굴만 쳐다봤지 뒤에 계신

예수님을 못 봤던 겁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과

등을 지기 시작합니다.

빈 무덤 안에 주님이 안 계시면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예수님을 찾아 나서야 되는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면서

 빈 무덤만을 계속해서 쳐다봤습니다.

현대 영성신학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가르칩니다.

속도는 느려도 예수님을 향하여

똑바로만 잡고 있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도달합니다.

양은 냄비같이 쉬 더워지고

식는 신자들의 모습이 사실

위험하더라는 것이죠.

마리아 막달라가 예수님을

못 봤던 이유는

첫 번째가 눈물이요,

두 번째가 방향성입니다.

또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떠오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

사이에서는 분명히 기쁨의

분위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3년간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군수자리라도 얻을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허망하게 돌아가십니다.

그 둘 사이에 흐르고 있었던

분위기는 절망감이었습니다.

절망감 때문에 눈이 닫힌 겁니다.

예수님이 무려 3시간을

같이 가셨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알아보지를 못 합니다.

나중에 빵을 떼어주실 때에야

‘눈이 열렸다.’는 표현을 씁니다.

절망감에 있는 상태에선

그 어느 누구도 옆에 예수님이

 계셔도 주님을 알아보지를

못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앞에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계셔도

절망감 때문에 두 눈이

 멀어져 있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을 만날 재간이 없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못 보게 하는

중요한 어둠 중의 하나가

바로 절망감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다락방에서

있었던 사건을 기억합니다.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유다인들이 자기들을 잡으러

올까봐 무서워 떨고 있을 때,

문이 닫혀있는데도

예수님이 들어오셨죠.

그리고 뭐라고 하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했던 말은 ‘반갑다, 고맙다,

나 살아 돌아왔다.’가 아니라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얘기하십니다.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평화라는 말은 다른 말로

담대함을 뜻합니다.

희랍어에 평화와 담대함은

같은 단어로 쓰입니다.

내 마음 안에 평화가

있다는 말은 어떤 환경이

바뀌더라도 높은 파도가

나를 덮친다 하더라도

벼랑 끝에 밀려간다 하더라도

 배짱이 있는 겁니다.

‘그까짓 것 죽기밖에 더 하겠어.

주님 계신데 내 무서워

할 것이 뭐가 있느냐.’

담대함이 없을 때는

 평화도 없습니다.

담대함이 없을 때는 기쁨도 없고

 불안한 마음, 두려운 마음만이

온통 나를 지배합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다락방에

오시어 평화라는 선물을

주고 가십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누가 없었던 겁니까? 토마스.

토마스는 대단히 이성적인

사람이고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토마스는 어차피 이제는

 남아서 살길을 찾아야 되겠다고

제자들과 어울리지 않았던 겁니다.

다시 말하면 그 공동체에 미운 사람,

좋은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등 여러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공동체 안에

머물러야 주님을 만납니다.

같이 더불어 친교의

태에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힘들 때 같이 손을 잡고

위로해야 될 그 순간에

토마 사도는 혼자 뭘 하고 왔는지,

그 순간에 그 역사적인

순간을 못 맞이했던 겁니다.

부활한 주님을 못 봤던 겁니다.

공동체를 벗어났을 때는

 예수님을 못 봅니다.

나중에 길거리에서 헤매다가

들어오니 거기에 있던 제자들은

허깨비를 본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보게,

주님 다녀가셨어.

부활한 주님이 우리 앞에

나타났었어.’ 하니까

토마 사도는

‘이것들 단체로 미쳤네.

아니 뭘 부활한 주님이 나타나?’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못 자국을

만지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창 자국을 느끼면

믿겠다고 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뒤에 사도 토마가

다락방에 있을 때

예수님이 또 들어오십니다.

두 번째 다락방 방문은 오로지

토마스 때문에 오신 겁니다.

물론 토마스 때문에 왔다는

얘기는 성서에 없습니다만

내 생각에는 또 올 이유가 없어요.

그러면서 토마에게

뭐라고 그러시죠?

‘자, 네 손가락으로

여기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라.’

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토마의

입장이라고 한다면 뭐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토마는 변명을 안 합니다.

그 자리에 털썩 꿇으면서

딱 한마디 하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토마는 성격이

의심이 많았습니다.

그 의심은 확신에

이르기 위한 의심입니다.

얼치기로 알고 있는

신조보다는 성실하게 회의 속에

우리는 믿음을 찾습니다.

대충 넘어가선 안 되지만

일단 확신에 이르면

토마 사도는 물불을 안 가리는

성격이었습니다.

우리는 토마를 의심쟁이

대표로 알지만 성실한 회의는

꼭 필요한 겁니다.

하지만 토마 사도는

이성을 너무 앞세웠습니다.

너무 합리성을 앞세웠죠.

그리고 토마 사도의 밑바탕에는

회의주의가 깔려 있었습니다.

다락방에 있던 토마 사도가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하는

그 위대한 역사적인

순간을 놓쳤던 것은

이성주의요, 합리주의요,

회의주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이성주의가 판을 치고

합리주의가 판을 칩니다.

세상을 사는 방식 그대로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예수님과도 손익 계산을 하고

대차대조표를 만듭니다.

현대 교회의 가장 큰 위험은

이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따질 수가 없는 겁니다.

까맣더라도 주님이

하얗다고 하시면 하얀 것으로

믿고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까망이지 어떻게 하얀색이냐며

눈알 동그랗게 뜨고 대드는 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을 만났던 누가 생각납니까?

티베리아 호숫가에 제자들이 보입니다.

원래 생업이었던 어부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호숫가에 그물을

치는데 고기가 안 잡힙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호숫가 문 쪽에서

바닷가 쪽을 내려다봅니다.

조금 높은 데서 보니 오히려

 물고기 떼가 움직이는 것이

더 잘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물을 어느 쪽으로

치라고 그러시죠? 오른쪽으로.

그때부터 천주교 다니는

낚시꾼들은 항상 오른쪽으로

낚시를 던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그랬더니 그물이 터질 정도로

고기가 가득 들어옵니다.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그물질을 하던 그 제자들은

숙명론자였습니다.

‘우리 주제에 무슨

출세를 하겠다고.

뱃놈이 뱃길이나 해야지

그분을 쫓아다니겠다고. 안 돼.’

그동안 주님이 3년 동안 하셨던

얘기에 대해서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할 거라는 얘기,

내 왕국은 지상이 아니라

하늘이라고 했던 얘기,

그 수많은 기적들을 눈으로 봤던

주인공들이었지만 이 제자들은

운명론자로 바뀝니다.

숙명론자로 바뀌어버리고 맙니다.

그 제자들은 예수님이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할 때도 예수님인줄 몰랐던 겁니다.

 던졌더니 고기가 그득하고 배가

 끌려갈 정도로 그물이 휘청휘청

거리고 그때 사랑하는 제자가

자세히 물가에 계신 그분을 보니까

누구에요?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합니다.

베드로는 홀랑 벗고 있었는지

겉옷을 대충 걸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는 말이 나와요.

나가 보니까 예수님이

불을 피워놓고 빵을 준비해놓고

잡은 고기에서 몇 마리를

가져 오라고 합니다.

죽은 유령을 못 먹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사가는

정말로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환각이나

영적인 현상이 아니라 정말

한 인간의 부활이라고

하는 것을 생시처럼 표현합니다.

 그런데 고기가 몇 마리

걸렸다고 나와 있지요?

153마리.무슨 뜻입니까?

100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숫자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이방인을 뜻합니다.

50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김씨면 무슨

김씨라고 있듯이

이스라엘에는 12지파이지만

그것에서 갈려나간 지파들을

합치면 50지파가 됩니다.

바로 유대인들을

50은 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3이라고 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그물은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만

있어도 교회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호숫가에서 베드로 사도가

마지막으로 그물을 끌어올립니다.

부활한 후에 베드로에게

또 예수님이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왜 자꾸

사랑하는데 또 물으세요?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배반했던 전과가 있고

그 배신은 마음 안에는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상처가 많을 때는 우리는

부활한 예수님을 못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 번을

다시 물어주심으로

그 상처를 치유해주시고

으뜸사도로 보내주십니다.

 지금 간단히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못 본다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눈물이 막을 수도 있고,

방향성이 잘못될 수도 있고,

절망감에 빠져 있어도

주님 부활을 체험 못합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지나친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로

교회를 재단하고 신앙을

잣대로 재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 못 할 겁니다.

생애 중에 부활을

7-80번 맞이하여도

우리는 토마 사도처럼

 될 수도 있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될 수도 있고,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숨소리를 들으면서도 엉뚱한 데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못 볼 수도 있습니다.

또 모든 것 포기하고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 깡그리 잊어버리고

숙명론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상처만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물었다 싶으면 또 손등으로

파낼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삶 속에

이런 어두움이 숨어있다면

우리 역시 부활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부활은 현재

진행형인 숙제입니다.

부활은 한마디로

영적 진화입니다.

죽을 때까지 커야 됩니다.

사제도, 주교도,

그 어느 누구도 영적

성장을 멈추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시체입니다.

 일본에 가면 정원이

 참 예쁘게 꾸며져 있습니다.

정원을 참 잘 가꿔요.

일본에 갔더니 어떤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가 참 열심히

조그만 나무를 다듬어요.

그래서 얘기하게 됐는데,

작은 나무는 늘 작아야 되기에

가끔 끄집어내서

뿌리를 자른 데요.

커지지 않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뿌리를

자른다고 합니다.

사람이라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플까요?

철사를 잡아당겨 모양 만들고

두께만 두껍고 조그만

화분을 벗어나지 못하게

난쟁이 나무를 만듭니다.

다시 말하면 진화를

할 수 없게끔 만듭니다.

 영적 진화를 하는데,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데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눈물은 아니었나?

엉뚱한 방향에 서서

가고 있던 것은 아니었던가?

희망과 기쁨보다는 훨씬

더 절망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자신은 아니었던가?

지나친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와

 회의주의 때문에 어떤 일을

보더라도 좋게 보이지 않고,

사람을 만나 장점보다는

늘 눈에 거슬리는 점만 보인다면

우리는 절대 부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지, ‘이건 내 운명이다,’

아닙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절대 숙명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배반했던 상처만을 끌어안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를 위해 말씀과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오시어 하실 일을 하십니다.

 여러분들, 정원 심어져 있는

사람 발에 치이는 조그만

나무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늘로 쭉쭉 자라

많은 사람들이 여름이면

그늘 밑으로 쉬러 오는

나무가 되기를 원합니까?

사람 발에 밟히는

난쟁이 나무가 아니라

하늘을 향하여 쭉쭉 뻗어가는

나무로 영적 진화할 것을

하느님 앞에 다짐합시다. 아멘.

 2018년 04월 은총의 밤 (4/07)

서운동성당 김웅열

-(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서운동성당 - photo by - 느티나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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