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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황님 미사 강론]하느님의 자비 주일 거룩한 미사 [2018년 4월 8일 주일]
작성자정진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8-04-16 조회수1,884 추천수2 반대(0) 신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s://www.vaticannews.va/en.html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8.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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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 201848일 주일[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강론 당일 독서와 복음 말씀] 1독서 : 사도행전 4,32-35

화답송: 시편 118(117),2-4.13-15ㄱㄴ.22-24( 1)

2독서 : 요한 1 5,1-6

복음 : 요한 복음 20,19-31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8696&gomonth=2018-04-08&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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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자비 주일 거룩한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

                                                  성베드로광장                                       

부활 제2주일 2018 4 8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8/documents/papa-francesco_20180408_omelia-divina-misericordia.html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반복해서 보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 복음 20,20). 그들은 토마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복음 20, 25). 그러나 복음 말씀은 그들이 그분을 어떻게 보았는지는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즉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한가지만을 상세하게 묘사하여 언급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요한 복음 20, 20). 복음은 우리에게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이야기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바로 그분의 상처들을 통해. 같은 일이 토마스에게 일어났습니다. 토마스도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요한 복음 20, 25), 그리고 보고 난 후에 그는 믿었습니다(요한 복음 20, 27).

 

그의 신앙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토마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남에게 듣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또는 단순히 몸을 가진 그분을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안을 들여야 보고 자신의 손으로 주님의 상처, 그 사랑의 징표를 만져보고 싶어했습니다. 복음은 토마스를 쌍둥이를 의미하는 디디모(Didymus)라고 부르는데 이 안에서 그는 진실로 우리의 쌍둥이 형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셨지만 멀리 계시는 하느님은 우리의 삶을 채우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정의롭고 거룩하시지만 냉담하신 하느님은 우리 마음을 끌지 못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보아야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그분을 만져야 하고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것,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볼 수 있습니까? 제자들처럼 볼 수 있습니다. , 그분의 상처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상처들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은 그분 사랑의 깊이를 알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분을 부인하고 그분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 그들을 용서하셨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상처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분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한없는 사랑을 바라보며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방법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심장은 우리를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고동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고 또 신앙의 수많은 아름다운 가치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처럼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만짐으로써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오로지 이렇게 해야만 우리는 제자들처럼 신앙의 마음으로 갈 수 있고 모든 의심을 넘어서 평화와 기쁨(요한 복음 20,19 – 20)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는 주님의 상처를 본 후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복음 20,18). 나는 토마스가 반복해서 말한 형용사 저의(my)’에 대해서 묵상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소유격 형용사입니다. 우리가 그 단어에 대해 생각할 때 하느님께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하느님이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내가 전능하신 분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진실은 이렇습니다. ‘저의(my)’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신성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에 영광을 바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것이 되기를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러브스토리에서럼 우리가 그분께 이렇게 말씀 드립니다. “당신은 저를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당신은 저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당신께서는 단지 하느님이기만 하시지 않고 당신은 나의 하느님 당신은 나의 생명이십니다. 당신 안에서 저는 제가 찾고 있었던 사랑을 발견했고 제가 이제껏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하느님이 되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마음 상해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확신이 요구되고 자비는 신뢰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처음에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기 20,2) 그리고 이렇게 다시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기 20,5).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너의 하느님이라고 부르시는, 질투하면서 사랑하는 존재로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는지 봅니다. 토마스의 마음 깊은 곳에서 대답이 올라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상처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자비가 단순히 그분의 다른 특성들 중에 한가지가 아니라 바로 고동치는 그분의 심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토마스처럼 우리는 더 이상 확신하지 못하고 독실하지만 흔들리는 제자들처럼 살지 않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사랑에 빠집니다! 우리는 이 말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과 사랑에 빠진다’.

 

우리가 어떻게 이 사랑을 만끽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손으로 예수님의 자비를 만질 수 있을까요? 그날의 복음 말씀이 다시 우리에게 실마리를 줍니다. 부활하신 바로 그 저녁에(요한복음 20,19 참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위한 성령을 주시는 것으로 시작하신다는 것을 복음은 강조합니다. 그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거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용서받도록 놓아 두는 것. 우리 자신을 용서받도록 놓아 두는 것. 나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묻습니다. 나 자신을 용서 받도록 놓아 두고 있습니까? 그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도록 놓아두고 있습니까? ““하지만 신부님, 고해하러 가는 것은 어려운 것 같아요…”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제자들이 복음에서 했던 행동을 하도록 유혹 받습니다. 잠가 놓은 문 뒤에서 우리 자신을 바리케이드로 막아 놓는 것. 제자들은 두려워서 그렇게 했는데 우리도 아직 두려워할 수 있고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의 죄를 고백하기에는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깨닫는 은총을 주소서. 닫혀 있는 문으로서 부끄러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만남을 향한 첫 걸음으로서 부끄러움을 보는 은총을 주소서. 우리가 부끄럽다고 느낄 때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래서 그것은 선한 것입니다. 부끄러움은 하느님께서 악을 이기셔야 하는 영혼의 은밀한 초대입니다. 비극은 우리가 더 이상 아무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입니다. 부끄러움을 경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부끄러움에서 용서로 넘어갑시다! 부끄러워하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아직 하느님의 용서 앞에 닫혀 있는 하나의 문이 있습니다. 포기의 문입니다. 포기는 언제나 닫힌 문입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부활 때 경험했습니다. 그들이 모든 것이 어떻게 예전으로 되돌아간 듯 한지 실망스럽게 인정했을 때입니다. 그들은 낙담해서 아직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그들 삶의 예수님이라는 페이지는 끝난 것 같았고 그분과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난 후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그들은 체념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모든 때에 그리스도인이었어. 하지만 아무것도 내 안에서는 변한 것이 없네. 나는 계속 같은 죄들을 짓고 있네.” 그리고 나서 용기를 잃고 자비를 포기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하십니다. “너는 내 자비가 너의 비참함보다 크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너는 되돌아가는 자이냐? 그렇다면 자비를 구하면서 되돌아가는 자가 되어라, 그러면 우리는 그 맨 위에 누가 나타나는지 보게 될 것이다.” 어떤 일에서건 그리고 고해성사에 익숙한 사람은 누구나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 모든 것이 예전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용서를 받을 때마다 우리는 다시 확신하게 되고 용기를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더 큰 사랑을 체험할 때마다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더 깊은 포옹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쓰러질 때 바로 우리가 사랑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훨씬 더 큰 슬픔 - 우리를 죄로부터 서서히 떨어 뜨리는 유익한 슬픔 - 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삶의 힘은 하느님 용서를 받는 것이고 용서에서 용서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삶이 나아가는 방식입니다. 부끄러움에서 부끄러움으로, 용서에서 용서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부끄러움과 포기 다음에 또 다른 닫힌 문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은 철갑을 두른 것 같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 같은 죄입니다. 중대한 죄를 지을 때 만약에 내가 진심으로 솔직하게 나 자신을 용서하고 싶지 않다면 왜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해야 합니까? 하지만 이 문은 오로지 한쪽 방향, 우리를 향한 한쪽 방향으로만 닫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향해서는 어떤 문도 결코 완전히 닫혀 있지 않습니다. 복음말씀이 우리에게 말해준 대로 우리가 들은 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문이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일 때 닫힌 문을 통해서바로 그렇게 들어오십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는 선택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해를 할 때 미증유의 일이 일어납니다. 계속 우리를 주님에게서 떼어 놓았던 바로 그 죄가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 장소가 됩니다. 그곳에서 사랑으로 상처 입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만나러 오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비참한 상처들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상처들같이 만들어 주십니다. 변화가 있습니다. 나의 비참한 상처들이 그분의 상처들을 닮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자비이시고 우리의 비참함 속에서 놀라운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토마스처럼 그분을 알아 보고 고백하는 은총을 간청합시다. 그분의 용서 안에서 우리의 기쁨을 발견하고 그분의 자비 안에서 우리의 희망을 발견하는 은총을 간청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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