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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4.17)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4-18 조회수1,476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8년 4월 17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사도 7,51─8,1ㄱ

그 무렵 스테파노가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말하였다.
51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습니다.

52 예언자들 가운데

여러분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그 의로우신 분을 배신하고

죽였습니다.

53 여러분은 천사들의

지시에 따라 율법을 받고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54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밀어

스테파노에게 이를 갈았다.
55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56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57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58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59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

8,1 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

복음 요한 6,30-35 

그때에 군중이 예수님께

 30물었다.
“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어제 다음 순례 장소로

이동 중에 잠시 고속도로

휴게소에 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자매님께서

 휴게소 옆 잔디밭에서

네 잎 크로버를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다른 분들도

 크로버가 있는 잔디밭으로 가서

네 잎 크로버를 찾기 시작하십니다.

다시 차에 타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었거든요.

특별히 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니

잔디밭에 모여서 크로버를 찾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이

네 잎 크로버는 ‘행운’을

 상징한다고 하지요.

그리고 세 잎 크로버는 ‘행복’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크로버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행복이 이렇게 많은데,

행운만을 찾고 있는 우리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여유를 가져야 행운이든

행복이든 상관없이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여유를 갖지 못하다보니

주위에 널려 있는

행복이라는 크로버도,

그 사이에 끼어 있는 행운이라는

크로버를 찾지 못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차를 타고

다음 순례지를 이동하고 있던 중에

 맑은 하늘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너무나 멋졌습니다.

 지금 한국에 미세먼지가 많아서

이런 구름을 보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구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도 구름을 본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분명 한국에서도 멋지고 예쁜

 구름이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바쁘고 여유 없는 삶으로

 인해서 내 근처에 있는 많은

행복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행운 역시 당연히 놓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러한 행복과 행운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이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

 끊임없이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일으켜서

자신들이 주님을 따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기분이 나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금 현재 인터넷 안에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라는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제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런 식의 메일을

보내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쓰시면

이제 더 이상 신부님 글을

보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이 제 묵상 글을 본다고

해서 무엇인가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저 제 묵상한 것을 나누고만 싶어서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해서 오랫동안

써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메일을

보내시니 기분이 좋았을까요?

그리고 ‘제발 그러지 말아 주세요.’

라고 눈물을 흘리며 부탁했을까요?

솔직히 이런 메일은 답장도

보내지 않고 휴지통으로 버립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들은

바로 주객이 전도된 모습이었습니다.

 왜 이런 괘심한 모습을 보인 것일까요?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과도한 관심으로

인해서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어떻게 보면

괘심한 모습으로 주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내 기도 들어주지 않으면

이제 성당 나가지 않겠다면서

끊임없이 공갈과 협박을

 외치는 우리입니다.
이제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더 많은 행복과 행운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손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여쁜 역할은 누군가를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 촉감 앞에서 우린 공포,

설움, 아픔으로부터 진정된다.

(김소연)

크로버를 찾고 있습니다.

"정말 소중한 것이란 무엇일까?"

(‘좋은 글’ 중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잃어버리고 난 뒤에야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 손안에 있을 때는

그것의 귀함을 알 수가 없고

그것이 없어지고 나면 그제야,

 아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아쉬움이 남는 것이랍니다.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고

난 뒤에야 아쉬움을

느껴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그 때 그냥 둘 것을,

하면서 후회해 본 일이 있으십니까?
사람이란 그런 것이지요.
항상 손닿는 곳에 있을 때는

모르고 있다가 내 손을 떠나고 나면

그렇게나 큰 미련으로 하염없이

아쉬워하는 그런 것이

바로 사람의 모습이지요.
내 주위에 있는 이젠 없어도

 될 것 같은 것들 이젠 더 이상

쓸모도 없고 없어도 그다지

아쉽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것들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요?
혹시나 그것들을 잃고 나서야

후회하게 되면 어떻게 할까요?
가끔은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봐 줄 필요가 있는 겁니다.
책을 읽을 적에 너무 눈앞에

바싹대면 무슨 글씨인지

알 수도 없듯이 소중한 것들도

너무나 가까이 있기에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
때로는 내 주위의 모두를

잠시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야 잃고 난 뒤에 아쉬운

 미련에 매달리는 그런 모습

조금이나마 덜 겪게 되겠지요.

부르고스 대성당의 야경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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