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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18-04-23 조회수2,860 추천수12 반대(0)

어제는 성소주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날씨를 주셨고, 신학생들이 열심히 준비해서 성소주일 행사가 잘 끝났습니다. 새삼 예전에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께서는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성소주일을 지내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지난 피정에는 원로사목자들이 함께 하셨습니다. 강론을 통해서 신부님들의 경험과 연륜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전화를 받으면 임 화백입니다.’라고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셨는지요? 라고 말을 하면 신부님께서 이렇게 대답을 하신답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백이 아니고요, 화려한 백수입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노년을 재미있게 사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할 일이 있고, 사랑할 사람이 있으며,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이웃 본당의 주일 새벽 미사를 도와 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책을 읽을 수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신부님께서 외할머니의 십자가 영성을 들려 주셨는데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오늘은 외할머니의 영성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신부님의 아버지, 할머니의 사위는 6.25 때 총살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뒷산에 숨어 있다가 잠시 마을로 왔는데 이웃 사람이 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이웃 사람은 자식이 잡혀갔는데 다른 사람을 신고하면 자식을 풀어 준다는 말을 들었고, 마침 할머니의 사위를 신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사위의 주머니에 묵주를 넣어 주었고, 사위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주머니에 묵주가 있는 시신을 찾아서 고향에 묻어 주었습니다.

 

손자가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 할머니는 신부님의 아버지인 사위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95일이 아버지의 기일입니다. 이제 사제 서품을 받았으니 고향으로 와서 아버지의 기일 미사를 해 주세요. 신부님은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고향으로 갔습니다. 미사를 드리려는데 할머니가 할아버지 한 분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에게 이야기 합니다. 이 사람이 신부님의 아버지를 고발한 사람입니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이 사람을 용서해 주세요. 그러면서 할아버지의 손과 신부님의 손을 마주 잡게 하시고 십자가를 쥐어 주셨습니다. 할머니는 십자가는 더하기입니다. 그러니 지난날의 모든 잘못은 용서하시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시기 바랍니다. 신부님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십자가의 영성은 배우지 않았지만 십자가의 영성을 삶으로 이미 살고 계셨습니다.

 

주변을 보면 신학을 배우지 않았어도, 배움이 많지 않았어도 이미 삶으로 십자가의 영성을 보여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굴욕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로 내려오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이웃에게 그 사랑을 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고난과 박해와 시련과 아픔이 있겠지만 십자가는 더하기이며 그를 통해서 부활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야기를 하십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뒤를 이어 조선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두 가지를 주장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양반과 천민이 없는 평등한 세상입니다. 서양의 학문을 배웠던 최양업 신부님은 바로 그런 세상이 발전하는 것이고, 그런 나라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이 되셨고, 사람들의 생각과 사람들의 언어를 배우셨듯이, 선교사들은 먼저 선교해야 하는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충돌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도 이런 문제들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도들은 서로 생각이 많이 달랐습니다. 같은 유대인이었고, 같은 전통과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체험한 예수님을 전하려고 하였고, 유대인들은 사도들의 말을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전통과 자신들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대화를 하지만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거의 모든 일에 합의를 보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저도 동료들과 대화를 할 때 듣기는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선입견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사목적인 결정을 하였습니다. 사람을 해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면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결정을 통해서 교회는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지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선교는 바닷물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우리가 희생과 사랑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입니다. “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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