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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생명나무와 선악과(창세2:4 -1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4-27 조회수4,502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사용 

 

 생명나무와 선악과
(창세2:4‐17)

 

4 하늘과 땅을 지어 내신 순서는 위와 같았다. 야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였다.  5 땅에는 아직 아무 나무도 없었고, 풀도 돋아나지 않았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던 것이다.  6 마침 땅에서 물이 솟아 온 땅을 적시자  7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8 야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마련하시고 당신께서 빚어 만드신 사람을 그리로 데려다가 살게 하셨다.  9 야훼 하느님께서는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그 땅에서 돋아나게 하셨다. 또 그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돋아나게 하셨다.  10 에덴에서 강 하나가 흘러 나와 그 동산을 적신 다음 네 줄기로 갈라 졌다.  11 첫째 강줄기의 이름은 비손이라 하는데, 은과 금이 나는 하윌라 땅을 돌아 흐르고 있었다.  12 그 땅은 좋은 금뿐 아니라 브돌라라는 향료와 홍옥수 같은 보석이 나는 곳이었다.  13 둘째 강줄기의 이름은 기혼이라 하는데, 구스 온 땅을 돌아 흐르고 있었다.  14 셋째 강줄기의 이름은 티그리스라 하는데, 아시리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고, 넷째 강줄기의 이름은 유프라테스라 하였다.  15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하시며  16 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야훼 하느님’ 히브리어로는 ‘엘로힘 야훼’입니다.  2장 3절까지 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그냥 ‘엘로힘‘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능력의 하느님‘’전지전능한 하느님‘입니다.그런데 오늘 본문부터는 하느님의 이름이 거의 ‘엘로힘 야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엘로힘 야훼’라는 단어가 무려 6,800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 ‘엘로힘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단어인지 아시겠지요? 어떻게 보면 성경 전체의 주제가 바로 그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 안에 모두 내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이름의 의미는 중요한 것입니다. ‘야훼’라는 이름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 출애굽기로 가보겠습니다.  (출애3:14‐15) 

 

 14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1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소개하시면서 그 이름의 의미를 ’스스로 있는 자‘라고 밝혀 주지요?  (출애6:2‐5) 

 

2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야훼다.  3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전능의 신으로 나를 드러낸 일은 있지만 야훼라는 이름으로 나를 알린 일은 없었다.  4 또 나는 그들이 유랑민으로 몸붙여 살던 가나안 땅을 주기로 그들과 계약을 세웠다. 5 나는 에집트인들에게 혹사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 소리를 듣고 내가 세운 계약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제 본격적으로 인간의 창조에 대해 반복 설명이 시작되는 2장 4절에서 ‘야훼 하느님’ 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언뜻 보면 각기 다른 창조기사가 반복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앞부분의 내용과 모순이 되는듯한 내용도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1장 1절부터 창세기 2장 3절까지의 창조와  이 창세기 2장 4절 이하에 나오는 창조의 이야기를 각기 다른 창조로 봅니다.  첫 창조가 실패를 했기에 또 다른 창조가 있었던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실패도 하실 수 있으신 분인가요?
또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2장 4절 이하의 창조가 2장3절까지의 창조를 반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창조의 순서가 1장의 것과 틀리는 것을 보아서 이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당시 고대 근동 지방의 설화들을 짜집기 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과연 그러한 주장들이 일리가 있는 것들인지 보겠습니다.

먼저 2장 4절을 보시면 거기에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때'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단어가 ‘톨르도트’입니다. 그 ‘톨르도트’라는 단어는 ‘역사’ ‘기원’(record), ‘기원에 관한 기록' (record of the origin)이라 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던 때‘라는 구절이 의미는 2장 4절부터 전개되는 이야기는 2장 3절까지의 내용이 다른 관점에서  재 묘사되는 기록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2장 4절 이하가 첫 번째 창조가 아니라 두 번 째 창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단어 연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얼치기들인 것이지요.
그런데 5절을 보시면 아담이 창조되기 직전의 천지의 묘사가 조금 이상합니다. 분명 셋째 날 창조 때 초목과 채소들이 창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섯째 날에 창조된 아담이 창조될 때 초목도 없었고 채소도 없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조금 이상하지요?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창세기 2장3절까지의 창조기사는 천지 창조의 전체를 개괄적으로 기록을 한 것이지만 2장 4절부터는 하느님과 직접 계약을 맺는 당사자인 ‘사람’에 초점을 두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장 4절 이하는 창세기 여섯째 날의 창조를 ‘사람’이라는 존재에 더욱 초점을 두어 부연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시면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모세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느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강조하는 단어와 문투(文套)를 사용해서 2장 4절 이하를 기록하는 것입니다.5절을 잘 보시면 그 문장의 강세(强勢)는 ‘들에 초목이 나지 않았고 밭에 채소가 없었다는 것’에 있지 않고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에 있습니다.  (창세2:5)  

 

 5 땅에는 아직 아무 나무도 없었고, 풀도 돋아나지 않았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던 것이다. 

 

 ’땅‘에  나무와 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경작하고 다스릴 땅에 초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문장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천지 만물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존재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다스리고 경작해서 풍성한 수확을 거둘 경작지(밭과 들)에 초목과 채소가 존재치 않았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장에서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는 것과 나무와 풀은 사람에 의해 다스려지고 경작되어 질 때  그 존재의 의미가 생긴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나무와 풀이 있었다 없었다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땅‘에 나무와 풀이 없었다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땅(경작지)’에 초목과 채소가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장 19절에 보면 마치 짐승들과 새들이 아담이 창조된 후에 생긴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 구절도 얼치기 신학자들에 의해 자주 회자되곤 합니다.  (창세2:19)   

 

19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하나하나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다 주시고는 그가 무슨 이름을 붙이는가 보고 계셨다. 아담이 동물 하나하나에게 붙여 준 것이 그대로  그 동물의 이름이 되었다. 
 
그렇지요? 분명 1장에서는 짐승과 새들이 각기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아담보다 먼저 창조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마치 아담이 먼저 창조가 되고 그 후에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이름을 짓게 하시기 위해 짐승들과 새들을 창조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문법의 시제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문장이 그렇게 까다로운 문장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동사의 정확한 시제는 문맥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 나오는 ‘지으시고‘ ' had formed'나 ‘having formed'로 해석해야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이 흙으로 지으셨던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러면 1장의 창조와 전혀 문제가 될게 없지요?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1장의 창조와 창세기 2장의 창조를 하나로 이야기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마태19:3‐4)  

 

3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5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고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하고 대답하셨다. 

 
4절은 창세기 1장 27절을 인용한 것이고 5절은 창세기 2장 24절(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를 인용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그 두 구절을 결합시켜서 인용 하심으로 창세기 1장과 2장이 서로 분리된, 그리고 서로 모순된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5절과 6절은 천지 만물 가운데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기록된 구절로 이해를 하면 됩니다. 

 

계속해서 7절을 보시면 하느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흙’이라고 번역이 된 ‘아파르 민 하아다마’ 는 ‘땅의 티끌’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티끌로 지어졌다는 것을 밝힘으로 해서 사람은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력이 끊기고 하느님과 관계가 없는 자가  될  때 그저 티끌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티끌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를 가리킬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창18:27) 27 그러자 아브라함이 다시 말했다. '티끌이나 재만도 못한 주제에 감히 아룁니다. 
(1사무2:8) 8 땅바닥에 쓰러진 천민을 일으켜 세우시며 잿더미에 딩구는 빈민을 들어 높이셔서 귀인들과 한 자리에 앉혀 주시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땅의 밑동은 야훼의 것, 그 위에 세상을 지으셨으니 
 
여기서는 티끌과 잿더미를 동격으로 놓고 있지요? 그러니까 티끌인 인간은 하느님과 관계가 끊어질 때는 똥 더미에 불과 하다는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티끌은 ‘저주와 심판, 그리고 완전한 패배’를 나타낼 때 쓰이기도 합니다.  (왕상16:2‐4

 

  2 '나는 잿더미에서 딩굴던 너를 뽑아 높이 세우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영도자로 삼았다. 그런데 너는 여로보암과 같은 길을 걸어 같은 죄를 짓고 내 백성을 죄의 길로 이끌어 나의 분노를 사는구나. 3 보아라, 내가 바아사와 그의 가문을 모조리 쓸어 버리리니, 네 가문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가문과 같은 운명에 떨어지리라. 4 바아사 가문의 사람이 성 안에서 죽으면 그 시체를 개가 뜯어 먹겠고 들에서 죽으면 새가 쪼아 먹으리라.' 

 

 하느님께서 바아사를 티끌에서 들어서 세웠는데 그 바아사가 하느님의 목적에 맞지 않게 되자 다시 티끌로 돌려보내십니다. 그와 그에게 속한자의 시체를 개와 새들이 먹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묵시록의 언어가 등장하지요? 저주요 심판입니다. 마치 창세기 3장 19 절의 저주가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 같지요? 아담이 죄를 짓자 하느님은 ‘네가 흙이니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티끌인 인간이 하느님과 의로운 관계에 있을 때는 살아있지만 하느님의 생명력이 떠나버린 인간은 그저 티끌인 것입니다. 피조물에게서 하느님이 떠나시는 것 그 자체가 저주요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이 땅의 수많은 불신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서는 ‘믿지 않 는 자들은 벌써 심판을 받았다’라고 명기를 해 놓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지옥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옥(地獄)이 뭐죠?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급되어야  할 하늘의 복과 차단되어 땅에 갇혀버린 상태를 지옥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사람들이 그 지옥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달콤하고 짜릿한 것들을 많이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바쁘게 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어느날 사람들이 그토록 오매불망 추구하던 그 달콤한 신기루들이 쑥 빠져 버렸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느님과 관계없는 상태인 지옥(地獄)이 실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미 이 땅에서 하느님과 관계없는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고통스러운 삶인지를 알게 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믿음 안에 거하려 힘을 쓰는 것입니다.  (여호7:6)  

 

6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옷을 찢고 머리에 먼지를 쓴 채 저물 때까지 야훼의  궤 앞에 엎드려 있었다. 

 

아이城에서 패배한 여호수아의 모습입니다. 티끌이지요?  이렇게 성경에서 ‘티끌‘’아파르‘는 저주요 심판이요 패배요 보잘것없음의 상징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富를 쌓고 명예와 인기를 누린다 해도 하느님과 관계없는 자가 될 때 그 사람은 저주와 심판과 패배의 보잘것없는 티끌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부러운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절대 교만할 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확인했듯이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만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그 외양이 화려해도 죽은사람, 티끌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냐 아니냐‘ 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지 그 가 가진 재산이나 외모나 재력 같은 것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딱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과 하느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입니다. 부자와 가난 한 자, 잘 생긴 자와 못 생긴 자, 똑똑한 자와 어리석은  자 와 같은 그런 모든 분류는 다 잊어버리세요. 이 지구상에 인간은 딱 두 부류밖에 없어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영생을 소유한 자라는 관점에서 평등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은 그저 티끌이라는면에서 역시 평등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 티끌들에게 서로 경쟁을 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올림픽이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다 별 걸 다 만들어놓고 모든 인간들을 경쟁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래서 티끌들은 그 경쟁의 재미 속에서 자신들의 실제 모습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저주인 것입니다.

 

하늘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은 절대 경쟁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기기 위해 남을 밟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티끌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는데 하느님께서 이렇게 생명 있는 자로 만들어 주셨다는 그 복음이 너무나 감사해서 사소한 것들로 경쟁하지 않고 세상이 추구하는 그 ‘힘’이 없다고 풀 죽어 하지도 않습니다.  (야고1:9‐11)  

 

9 가난한 형제는 하느님께서 높여 주시는 것을 기뻐하고  10 부요한 형제는 하느님께서 낮추어 주시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아무리 부요한 사람이라도 들에 핀 꽃처럼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11 해가 떠서 뜨겁게 내려 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움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사업에 골몰하는 동안에 죽어 버리고 맙니다. 

 

 (야고2:1‐4) 

 1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2 가령 여러분의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왔다고 합시다.  3 그 때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 '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밑바닥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한다면  4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떠나서는 티끌에 불과한 사람임’을 아는 사람들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도 안 되고 그들을 경쟁상대로 보아서도 안 됩니다.  (이사2:22) 

   22 다시는 사람을 믿지 말라. 코에 숨이 붙어 있을 뿐, 아무 보잘 것 없느니. 

 

 하느님과 관계없는 인간들은  코에서 숨이 멎는 순간 순식간에 허망한 티끌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엄청난 부를 쌓고 어마 어마한 명성과 인기를 누렸어도 그 코에서 숨만 멎으면 그 사람은 며칠 안가서 티끌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지요. 그래서 욥기4장에 보면 인간을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도 눌려 죽을 자’라고 묘사를 하는 것 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자기부인) 하느님의 도우심만을 구하며 겸손하게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관계없는 우리는 그저 티끌이니까.
 하느님께서 그렇게 티끌로 만들어진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쓰인 ‘생기‘’네솨마 ‘는 ’생명의 기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최초의 인간에게 부어졌던 ’생기’는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이었지 생 명 자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생명의 기운’을 소유했던 아담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지를 기록해 놓은 책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기희생,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백성 안에 영원히 내주 하시는 방법으로 그 백성들을 생명의 기운 정도가 아닌 ‘생명’으로 만들어내실 것임을 성경 전체에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8절부터는 에덴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따로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인간을 그 곳에 두셨습니다. ‘에덴’은  ‘garden of joy' '기쁨의 동산’ 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동산’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은 ‘울 타리를 치다’라는 의미의 단어인 ‘가난’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은 울타리가 있는, 다른 말로 외부와 차단된 그 런 곳이었습니다. 그 에덴동산은 하느님의 백성들만 들어갈 수 있는 울타리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덴을 창설하셨다’에서 ‘창설하다’로 번역이 된 ‘와이잇타’라는 단어는 원래 ‘심다’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에덴은 ‘어떤 특별한 것이 심겨진 곳‘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것들이 심겨져 있었나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심겨져 있었습니다. 그것도 동산 중앙에 심겨져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울타리가 쳐진 동산과 두 나무’의 그림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어떤 원리에 의해서 완성이 될 것이며 어떤 원리로 움직이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잘 보이는 동산 중앙에 두 그루의 나무를 심으셨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는 그 두 나무의 상호 관계를 통해 완성될 것이고 통치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개처럼 보이는 나무의 상호관계가 지향하고 있는 통합된 하나의 원리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선악과나무는 하느님의 계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나무의 열매인 선악과는 단순히 먹어서는 안 되는 금 단의 열매가 아닌 것입니다. 만일 그런 것이었다면 동산 중앙이 아니라 동산 구석에 심어 놓으셨겠지요?) 그리고 생명나무는 말 그대로 생명의 발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최초의 하느님의 백성에게 하느님의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창2:17)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하느님께서 최초의 인간에게  계명을 주시고 그 계명을 어길시 는 죽이시겠다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에서만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느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면서 살아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분께 자신의 전부를 의탁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계명을 상징하고 있는 선악과나무를 통과하지 않고는 생명나무로 나아갈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묵시2:7)  

 7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나는 승리하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겠다.' 

 

여기 분명 생명나무의 열매(果實)를 먹을 수 있는 자는 ‘승리하는는 자’ 라고 나오지요? 그러니까 생명나무의 열매는 선악과나무의 시험을 이긴 자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둘 다 좋은 나무인 것입니다. 그런데 티끌에 불과한 인간은 도저히 그 선악과나무의 시험을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꼭 알아둬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 이 그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안 따먹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선악과의 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 볼수 없으신 분이 하느님일 수 는 없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왜 복잡하게 선악과나무를 에덴에 두신 것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어떤 것을 설명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티끌에 불과한 인간은 도저히 하느님의 말씀을 좇아 생명을 얻고 영원히 살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하느님은 하느님의 방법으로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만드셔서 반드시 안식을 주시고야 마시겠다는 복음을 그 두 나무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나무를 동산 중앙에 심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 선악과나무를 통해 너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티끌인지를 만 천하에 폭로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내시는지를 인격과 오성을 가진 인간들에게 성경을 통해 보여주시면서 하느님께 자발적인 항복과 순종을 할 수 있는 자로  설복시키시기 위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라는 소품을 에덴에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왜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동산중앙에 함께 심겨져 있었는지 조금만 더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에게 생명나무가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시점이 언제입니까? 인간이 언제 그 생명나무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됩니까? 인간이 선악과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위반한  결과로 발생하게 되는 ‘죽음’이라는 것이 등장했을 때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도래했을 때 생명나무는 드디어 인간의 욕망의 대상이 됩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생명은 누군가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은혜를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지켜주기를 은근 히 기대를 하셨던 것이 아니라 티끌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체를 그냥 폭로시키신 것입니다.
 
 티끌로 만들어진 인간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조차 지켜낼 수 없는 그런 연약한 존재임을 선악과를 통해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 런데 거룩하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티끌들(성경은 그들은 죄인이라 부른다)은 절대 함께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티끌에 불과한 자들이 어떻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함께할 수 있지요? ‘은혜’입니다. 티끌인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저 똥 덩어리, 거름더미일 수밖에 없음을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그러한 티끌들을 어떻게 용서하시고 하느님의 아들로 만드시는 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하느님은 에덴동산과 두 나무 의 이야기를 통해 흙은 흙일 수밖에 없음을 폭로하시고 그 땅(흙)이 어떻게 하늘을 덧입게 되는지를 성경 전체를 통해 설명해 주시 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그 이야기를 이렇게 요약해 줍니다.  (고전15:48‐49)   

 

48 흙의 인간들은 흙으로 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습니다.  4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또한 지니게 될 것입니다. 

 

 (로마4:7‐8)  7 '하느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두신 사람들은 행복하다. 8 주께서 죄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도 행복하다.' 

 

이렇게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이 두 그루의 관계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죽음 속에 숨겨진 생명’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창조주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를 살해하는 피조물을 보는 것입니다. 만일 아담 과 하와에게 하느님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명령을 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살해했을 것입니다. 아니라고 요? 실제로 이 땅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생명나무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티끌로 살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힘과  열심으로 선악과를 안 먹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켜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를 통해 티끌인 인간의 실체를 폭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선악과나무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너희들은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티끌이니까 그런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노력일랑 집어치우고 하느님의 은혜 를 받으라’ 복음을 전파하셨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아담들이 하느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살해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애초에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에 의존하지 않고 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이 티끌인 자기 주제를 모르고 하느님의 은혜를 거부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주제넘은 티끌들에게 살해를 당하심으로 자신을 살해한 티끌들에게 생명을 부어주시는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고 통치하실 것이라는 것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속에 들어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잘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실 십자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 나무에 예수 그리스도를 매달아 버리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그 십자가 안에는 선악과를 따 먹어버린 지워지지 않는 주홍 같은 인간의 죄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안에는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그 죄를 하얗게 사함 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은혜로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만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티끌이라 절대 그 은혜의 삶을 누릴 수 없는 존재들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품고 그 선악과나무의 시험을 통과하시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티끌이었던 아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 생명을 가진  자들이 된 것입니다. 생명의 기운 정도가 아닙니다.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은혜 앞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또 무엇을 더 달라고 요구 하시겠습니까? 

 

그 엄청난 선물 앞에서  이 땅에서 잠깐 주어지는 우리의 처지나 상황으로 절망하며 낙담하겠습니까?  신앙인은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는게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복음 안에서  그 처지를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내 소원이 들어지지 않아서 울고불고 하는자들이 아니라 왜 그 놀라운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있는데도 이처럼 작은 고난에도 일엽편주처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가를 고민하시면서 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상황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사건에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에게 허락 된 상황과 사건과 조건 속에서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나에게 보내신 나를 괴롭히는 저 원수를 어서 없애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저 원수의 핍박을 내가 감당할 수 있게 해주세요.’그리고 저 악당도 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 주세요‘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실력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실력자들에게 더 나은 성숙을 위해 감당할 능력과 함께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인생 속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세상의 힘들이 그저 티끌임을 경험케 해 주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이 내가 의지할 힘임을 깨닫게 해 주 십니다. 그걸 믿음의 성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육신 속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로 이루어진 십자가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이 세상의 티끌들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좀 보여주고 오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은 대로 그 자리에서 겸손함을 보여주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자리에서 당당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자리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병약한 사람은 병약한 자리에서 하느님 백성 됨의 행복과 기쁨을 뿜어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 게 신앙인의 삶인 것입니다

 

 

 

공부했던 자료입니다. 참고하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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