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4.29."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_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8-04-29 조회수2,126 추천수2 반대(0) 신고

 

 

요한 15,1-8(부활 5 주일)

 

 오늘은 부활 제 5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에서 <1독서>에서는 예수님 부활을 체험한 바오로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2독서>에서는 그 부활의 삶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그리고 <복음>에서는 부활한 영혼이 어떻게 예수님과 결합되고 일치되어 있는 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1독서>에서는 바오로의 회심이 그 자신에게 있어서 얼마나 단호하고, 결정적인 사건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참으로 그의 회심은 죽음을 담보로 한 회심이었습니다. 그의 회심은 신앙이 하나의 장신구가 아니라, 신앙이 아니면, 삶이 의미도 없다.’라는 실존적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윤리 도덕이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이토록 사도 바오로에게 목숨을 불사하게 한 신앙의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이 진리에 대해서 오늘 <2독서>에서 말해줍니다. 말로써가 아니라 행실과 진리로써 사랑합시다.”(1요한 3,18)라는 사도 요한의 말은 단지 언행일치의 윤리 도덕차원의 차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윤리도덕차원의 사랑이 아니라, 진리로써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라는 단어는 <요한계 문헌>에서 신적 속성을 지칭합니다. 곧 우리의 사랑의 행위가 윤리적 틀을 뛰어넘어 하느님다운 신적 속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적 속성인 진리로써 사랑한다.” 것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바로 그 근거를 오늘 <복음>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단지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참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서, 예수님의 진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참된 진리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 곧 참 된 진리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머물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신비스런 단어인 머물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는 우선적으로 붙어있음을 말합니다. 곧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서, 다른 데서가 아닌 바로 그 포도나무로부터 수액을 받아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 물을 떠나면 죽음이듯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머물다는 말은 우선적으로는 뗄레야 뗄수 없는 상호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붙어있음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포도나무에 붙어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결코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뭇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다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려져 불에 태워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붙어있되, 열매를 맺는 이라야 머물러 있는 이 입니다.

 따라서, 머물다는 말의 의미는 단지 그분께 붙어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열매 맺으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비워드림이요, 그분의 말씀의 권능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허용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참 생명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요, 그분과 결합하여 있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에서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 분과 한 영이 된다.”(1코린 6,17)

 

   

그러기에, 머물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상호내주 혹은 상호공유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상호 내주 혹은 공유는 상호 안에 단순히 머물러 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벌리는 역동적인 활동이 벌어지는 상호 친교, ‘상호교제, ‘상호 교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오늘 <예물기도>에서는 거룩한 교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가 그의 둘째 편지>에서 밝히듯,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하찮은 우리에게 영광의 관을 씌어주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우리 안에 계시며 활동하십니다. 참으로 우리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분과 이토록 신비롭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적 박사라 불렸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공동본성(Connaturality)에서 오는 앎에 경탄하여 탄성을 질렀습니다. , 우리가 하나라는 걸 그토록 모르는가?” 바로 이 공동본성이 우리에게 신적 진리, 참된 진리를 가능케 하는 자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가 신적 진리로써 사랑이 피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스런 참 사랑, 하늘스런 참 생명이 피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토마스는 공동본성에서 오는 사랑의 지혜, 하느님 사랑으로 주어지는 신적 지혜 혹은 관상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신적 진리, 참된 진리에 참으로 머물러 있고,

열매를 많이 맺을 수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아본다면,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곧 가지는 나무에 속해 있을 뿐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가지가 나무를 지탱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존속시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열매를 맺으실 수 있는 그분께 승복하여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라야, 참된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단지 붙어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머물러 있어야 할 일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내주하신 그분의 수액을 받아 마시며, 말씀 안에 머물고, 사귀고, 교제하면서, 당신께서 열매를 맺으시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 사도 바오로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