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가죽옷을 입게 된 자들의 삶 (창세 2,24. 3, 1-2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5-03 조회수2,217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사용-

 

 가죽옷을 입게 된 자들의 삶

 

(창세 2:24,3:1-21) 

 

2;24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3; 1 야훼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가운데 제일 간교한 것이 뱀이었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 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였다.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되, 3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4 그러자 뱀이 여자를 꾀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5 그 나무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6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 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 주었다. 남편도 받아 먹었다. 7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리웠다. 8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야훼 하느님 눈에 뜨이지 않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9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10 아담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따 먹지 말라고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구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12 아담은 핑계를 대었다.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 주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 13 야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물으셨다.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에게 속아서 따 먹었습니다.' 14 야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너는 저주를 받아, 죽기까지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어야 하리라. 15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17 그리고 아담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 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18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19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 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 가리라.' 20 아담은 아내를 인류의 어머니라 해서 하와라고 이름지어 불렀다. 21 야훼 하느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2장24절을 보면 타락하기 前의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몰랐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한 몸이었기 때문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비록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 포하고는 있었지만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義’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상태를 ‘義’라 하지요  
 ‘義人’이라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과 신뢰와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잘 살아내는 者를 말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정하신 질서에 의해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도 자연을 잘 다스리고 정복하는 者이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네가 나이고 내가 너’ 라는 일체의 관계를 유지하는 者이며,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이 하느님이 지시하신 그 질서를 벗어 나서 해(害)를 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者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영화로운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生氣(생명의 기운)’ ‘니스마트 하임’ 에 의해 ‘義’의 모습을 보일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 한시적이지만 의로운 관계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 앞에서 벌거벗고도 부끄러움이 없었던 것이고 서로를 바라보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시고 하느님의 은혜를 거두어 가시자 그 모든 관계들이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 상태를 ‘불의 (不義)’라고 합니다. 그 연합의 상태가 깨져 버리자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갖게 되었고 서로를 향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 부끄러움을 가리는 작업에 착수를 했습니다. 제일 먼저  한 것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치부를 가린 것입니다
(창세 3:7‐10)  7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리웠다. 8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야훼 하느님 눈에 뜨이지 않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9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10 아담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무화과나무 잎은 인간이 자신들의 공허를 메우고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역사 속에서 토해 낸 ‘과학, 문명, 철 학, 종교, 학문, 교육 등등’의 인간 쪽에서의 행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잎의 특징은 잠깐이면 말라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자신들의 공허함을 메우고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 낸 그런 모든 것들은 한시적으로는 만족감과 안전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르나 절대로 인간의 공허함을 온전히 메워 주거나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不意 하게 되어 버린 者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방법으로 自己 이외의 다른 존재들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그 공격 대상에는 창조주이신 하느님도 포함이 되지요.
(창세 3:11‐12) 11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따 먹지 말라고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구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12 아담은 핑계를 대었다.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 주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

죄를 지은 아담이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하느님과 여자를 공격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은혜가 떠난 티끌인 인간은 자신이 임금(王)이 되고픈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하느님을 포함한 자기 이외의 모든 존재들을 敵으로 간주하여 공격하는 者가 된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흔히 볼수있는 시기, 질투, 분열, 전쟁, 험담 이런 것들이 바로 타락의 결과물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타락한 죄인들의 속성이 백일하에 폭로된 곳이 바로 십자가이고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인 것입니다.  걸핏하면 남을 욕하고 비난하고 시기하고 험담하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 스스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주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역사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며 인간들의 열심과 노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경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의중을  깨달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 3:21)21 야훼 하느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만들어 입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를 걷어 버리시고 하느님이 손수 지으신  가죽옷을 입히심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리셨습니다. 이게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행위 계약 下에서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버린 당신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은혜의 옷을 지어 입히시는 모습입니다.   
 이 구절 속에는 하느님께서 티끌에 불과한 인간들을 어떻게 영화로운 당신의 백성들로 만드실 것인가에 대한, 하느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그 분을 거역한 티끌인 인간이 부끄러움이 가려진 영화로운 그 분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무죄한 제물이  대신 죽고  그 제물의 공로로 옷을 입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 21절에서  이미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옷을 벗고 사는 아담과 하와를 최종 목적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옷을 벗고 사는 아담과 하와를 통해, 생기를 받고  하느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의 '한시적 義‘를 설명하시고 하느님의  은혜로 그러한 한시적인 義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영원한 義의 흰옷을  입은 당신의 백성을 탄생시키시는 것을 목적으로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의 모든 내용이, 하느님의 구속사가 모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 15절을 이해하시면 본문 전체의 이해가 아주 용이할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창세 3:15) 15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하느님께서 뱀에게 저주를 하십니다. 뱀과 여자가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도 원수가 되게 하고, 여자의 후손은 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저주입니다. 왜 이 구절이 원시(原始)복음, 最初福音이라  간단하게 복습을 하고 넘어가지요.  뱀은 사탄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聖經은 그 뱀을 ‘사탄‘이라고 부릅니다.

(묵시 12:9)9 그 큰 용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계를 속여서 어지럽히던 늙은 뱀인데, 이제 그 놈은 땅으로 떨어졌고 그 부하들도 함께 떨어졌습니다. 
(묵시 20:2) 2 그는 늙은 뱀이며 악마이며 사탄인 그 용을 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 


옛(늙은) 뱀이라고 번역이 된 ‘오핀’이라는 단어 앞에 ‘’이라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그 옛 뱀 ‘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창세기의 그 뱀을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뱀이 사탄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증명이 되었지요? 그런데 그 사탄은 하느님의 저주로 여자와 원수가 됩니다. 
(묵시 12:5‐6) 5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릴 분이었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느님과 그분의 옥좌가 있는 곳으로 들려 올라 갔고   6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 곳은 하느님께서 천 이백육십 일 동안 그 여자를 먹여 살리시려고 마련해 두신 곳이었습니다. 

 

여자가 낳은 아이는 鐵鋹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이입니다. 그 철장(쇠지팡이)으로 다스릴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시편 2:6‐9) 6 '나의 거룩한 시온산 위에 나의 왕을 내 손으로 세웠노라.' 7 나를 왕으로 세우시며 선포하신 야훼의 칙령을 들어라.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 8 나에게 청하여라. 만방을 너에게 유산으로 주리라.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너의 것이 되리라. 9 저들을 질그릇 부수듯이 철퇴로 짓부수어라.' 


그러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여자가 누구입니까? 그 것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원인을 규명하면 되겠지요? 그 분을 이 땅에 오시게 한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게 된 원인이 될 테니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하느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교회들의 필요에 의해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예수를 낳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창세전에 택해진 하느님의 백성들을 총칭하는 상징어인 것입니다. 그래서 철장(쇠지팡이)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들을 낳은 여자가 광야에서 1260일 동안 하느님께 양육을 받는다는 부연 설명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그 1260일 이 요한 묵시록에, 다니엘서 9장에서   한때 두때 반때 1260일 은 모두 같은 기간입니다. 그 기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제사로 말미암아 이제 더 이상 성전제사와 제물이 없어지게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  로마의 타이터스를 들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신 후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이 세상  끝 날까지의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천 이 백 육십일은 교회가 탄생하여 그들이 신앙의 여정 동안 겪어야 할 광야 인생길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숫자 인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하느님께 양육을 받는 여자는 교회, 하느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는 단순히 하와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여자로 지칭되는 교회에 의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실제로도 여자(마리아)의 아들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뱀과 여자가 원수가 될 것이라 말씀하심으로 사탄과 교회가 원수가 될 것임을 밝히십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 한 패거리가 되어 하느님과 원수가 되어 버린 사탄과 여자에게 그들이 서로 원수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심으로 둘 중 하나인 여자는 하느님 편으로 만드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묵시 20:10) 10 그들을 현혹시키던 그 악마도 불과 유황의 바다에 던져졌는데 그곳은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괴롭힘을 당할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뱀의 운명은 영원한 불과 유황의 바다( 불못)입니다. 여자는 교회입니다. 하느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티끌 같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하느님의 은혜로 그 티끌의 자리에서 끌어올리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표본인 뱀과 그의 후손들의 삶은 하느님과 원수로 사는 삶이며 패망의 삶이라는 것을 경고하시고 주지시키시기 위해 뱀의 후손들도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와 원수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이 누구입 니까?
(요한 8:44) 44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 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장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여기 보시면 악마의 후손은 사탄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신의 욕심을 위해 하느님마저도 타고 넘는 모든 자들을 악마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느님을 절대 상위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어 사는 자들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 라 부르심으로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반드시 그 원수의 자리에서 건져내시겠다는  의지를 창세기 3장 15절에 서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뱀은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고 여인의 후손은 그 뱀의 머리를 밟아 버리시는 방법으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뱀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사건은  아시다시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여 버리면 자신이 승리할 줄 알았습니다. 그 것은  마귀의 생각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고 싶어 하는 모든 죄인들의 어리석음입니다. 아담이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을 때 이미 인류는 그 곳에서 하느님을 살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사이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죄인이라 몰아 부치는 그 빛이신 예수만 죽여 버리면 마음이 편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책망하고 지옥을 설교하는 신부. 선교사는 신자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그저 잘 한다 잘 한다 해 주면 좋아합니다. 

 

하느님은 분명 구약의 여러 예언자를 통해 ‘평안하다 평안하다’를 외치는자들은 전부 가짜라고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우리는 죽는 날까지 죄에 대해 책망을 받고 지옥에 대한 경고를 받아야 해요.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하느님과 그 분의 약속과 자기 자신의 불가능함을 잊어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죠. 사탄은 그렇게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었지만 주님은 그 십자가에서 마귀의 머리를 깨 버리셨습니다. 마귀는 십자가에서 이미 패배를 한 것입니다.
(히브 2:14) 14 자녀들은 다 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예수님의 죽으심인 십자가가 마귀를 없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뱀의 머리를 밟으신 것이지요. 그건 정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하느님의 지혜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사들도 그 십자가의 비밀을 몰라서 알고 싶어 안달을 했다고 합니다.  
(베전 1:2) 2 여러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미리 세우신 계획에 따라 뽑혀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분의 피로 죄가 씻겨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가 충만하기를 빕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5절에 그 천사도 알고 싶어 하던 비밀이 이미 계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역사를 마귀와 하느님의 전쟁으로 오해 마세요. 마귀는 하느님의 피조물이죠. 마귀는 하느님의 전쟁 상대가 안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마귀의 머리를 밟으셨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냐?
하느님을 떠나 자신이 하느님 자리에 앉으려는 모든 피조물들은 마귀라는 이름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마귀적 발상과 시도들을 하느님의 죽으심으로, 즉 은혜로 소멸시키시고 그들을 당신만을 바라보며 당신만을 사랑하며 당신만을 의뢰하는 당신의 자녀로 만들어 내실 것임을 역사 속에서 그림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마귀나 그의 세력들을 소품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하느님의 희생으로 그 원수의 자리에서 건져진 자들의 삶은 어떠한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까? 마귀와 마귀의 후손들이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리에서 떠나 열심히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며 자신의 욕심을 구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라면 거기서 건져져 가죽옷을 입은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지요?  하느님께서 내 위에 절대 상위자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2:36) 36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은 그저 ‘그리스도’라고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은 ‘주님 그리스도’ 이시라고 합니다. 여기서 ‘’라고 번역이 된 ‘큐리오스’라는 단어는 ‘주인’ ‘최고권위를 가진 자’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분을 우리의 구세주로서만이 아니라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은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 2:6‐7) 6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 들였으니 그분을 모시고 살아 가십시오. 7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박고 그 터 위에 굳건히 서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여 넘치는 감사를 하느님께 드리십시오.  


사도 바오로는 너희가 예수를 로 받은 자들이 맞는다면 그 안에서 교훈을 받은 대로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주인이 시키신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 일을 행할 것 아닙니까?  하느님이 우리에게 지키라고 주신 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을 하면~  

(마태 22:35‐40)  35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36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37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38 이것은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39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40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주님께서 율법과 예언자의 강령을 딱 두 가지로 要約을 해서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굴까요? 

 

(루카 10:25‐28)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27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고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28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어떤 율법교사가 주님께 永生을 얻는 방법에 대해 묻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가를 묻습니다. 율법교사는 律法이 가리키는 바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라고 아주 똑똑하게 대답을 하죠  주님께서 '그럼 가서 그렇게 해 하면 영생을 얻어' 하지요.  율법교사가 ‘ 누가 내 이웃입니까? ‘그 때 주님께서 대답으로 주신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길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강도에게 맞아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 때 사제와 레위인이 차례로 그 곁을 지나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느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래서 그들은 부정한 것을 만지거나 보면  안 되었습니다. 아마 그러한 이유에서 그들은 그냥 그 곁을 지나친 것 같습니다.   현장에 유대인들과는 원수지간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주님은 그 비유에서 의도적으로 원수를 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원수이자 그들에 의해 개처럼 취급을 받았던 사마리아인이  그 곁을 지나다가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상처를 치료해 줍니다. 그리고는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에 누이고 자기의 소유를 털어 여관 주인에게 주고는 그 사람을 부탁하고 갔습니다.
그렇게 비유를 마치신 주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묻습니다. ‘누가 선한 이웃이냐? ‘ 율법사가 대답합니다.’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루카 10:36‐37)  36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율법교사에게 주님은 ‘네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를 묻지 말고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자가 되어라’ 라고 결론을 맺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에 유대인의 원수인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하느님과 이웃을 공격하는 자가 되어 버린 모든 인간은 그러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러한 타락의 상태에 빠져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품에 안으시고 죽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 백성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시키셔서 그들에게 의로운 흰옷을 입히심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제 이 땅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그러한 자신들의 회복된 신분에 대해 배워가면서 자주 실패하고 넘어지지만 그 신분에 맞는 회복된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의 후손(뱀의 후손)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그 신분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들어 입은 인위적인 옷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로, 가죽옷에 의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가 예수를 주님(큐리오스),  주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자로 살겠다는 의지도 함께 포함된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만, 구세주로만 받아들이고 그 분을 ‘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신앙을 반쪽짜리 가짜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  은혜의 복음을 정말 알아들은 사람이 맞는다면 그 노력은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를 밟거나 다른 이의 아픔을 모른 척하며 지나가는 자가 아니라 자기의 소유를 털어 원수를 도와주는 선한 이웃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요 책임인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 성도가 되신 분들이 맞는다면 여러분은 당연히 하느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가시적인 증거가 바로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남을 밟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속에서는 이웃 에 대한 사랑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성경의 모든 계명을 ‘이웃 사랑하기‘라고 한 마디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가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그 소중한 계명을 빼고 그냥 ’이웃을 사랑하라‘는 한 마디로 하느님의 계명을 정의한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계명을 그냥 ’이웃 사랑하기 ‘라고 말한 것입니다.

 

(야고 2:8‐9) 8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최고의 법을 지킨다면 잘 하는 일이지만 9 차별을 두고 사람을 대우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여러분은 계명을 어기는 사람으로 판정됩니다. 

 

사도 바울도 똑같은 의미로 온 율법을 한 마디로 ‘이웃 사랑하기’라고 정의를 합니다. 

(갈라 5:13‐15) 13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여러분의 욕정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십시오. 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15 그러나 여러분이 서로 물어 뜯고 삼키고 하면 피차 멸망할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서로 물고 먹는 삶을 사는 사람은 멸망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의 서간문에서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람이 만일 형제 사랑하기를 하지 않는 다면 그는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요일 4:7‐12) 7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10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이 세상에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게 되면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 고 확고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증인으로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증거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사랑이 안 나오는데 어떻게 사랑을 합니까? 그런 분들 많지요? 사랑하고 싶고 용서하고 싶은데 감정이 내 의지를 따라주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이 있어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자기의 감정이 움직일 때까지 사랑하기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성경이 이 땅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사랑 이라는 것은 감정 이전에 의지이며 선택입니다.  
감정에 의해 나오는 것은 ‘like''좋아함’입니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물론 사랑의 한 요소로 감정이 들어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는 감정과 함께 의지와 선택이라는 요소도 들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예로 들어볼까요? 성경은 분명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을 미워한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 성도들 은 모두 다 죄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우리를 미워하시는 상태에서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세요? 하느님은 당신의 언약에 의해, 미워해야 할 자들을 사랑하시기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 땅에 있는 오염된 육체를 갖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일차적으로 요구하는 사랑은 감정까지 포함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에게서 나오게 될 사랑은 감정까지 포함된 사랑이 맞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죄에 오염된 육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감정까지 포함한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실력이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요구하는 사랑은 선택적이며 의지적 부분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원수를 좋아하라‘고 하셨으면 우리 는 큰일 날 뻔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네 감정이 지금은 그 상대방을 좋아하지 못하더라도 너는 네 의지를 발동하여 사랑의 선택을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남편이 혹은 아내가 혹은 이웃이 죽이고 싶도록 미울 때 그를 향해 도끼눈을 뜨는 대신 커피를  한잔 타서 은근한 미소와 함께 전해 주는 것을 의지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비록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미운 감정이 있지만 하느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내 의지를 발동하여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감정을 좇아 살지 않고 하느님의 명령을 좇아 살게 된, 의로운 흰옷을 입고 있는 자라는 신분의 확인이 그러한 선택적이며 의지적인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이해하는 그 깊이만큼, 그 분량만큼의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숙해 지다보면 정말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이 종이 한장 차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결국 나의 감정까지 동원 된 그런 멋진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남을 해코지 하는 그런 티끌의 자리에서 벗어나 오히려 나의 옷을 벗어 남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 사람들 아닙니까? 잘 참고 잘 견디며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보여 주십시오. 아멘.

 

 

공부한것 참고하새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