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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5.06)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5-06 조회수2,180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8년 5월 6일

부활 제6주일

제1독서 사도

10,25-26.34-35.44-48

25 베드로가 들어서자

코르넬리우스는 그에게

마주 나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였다.

26 그러자 베드로가

 그를 일으키며,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35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44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45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46 이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47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48 그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다.

 제2독서 1요한 4,7-10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복음 요한 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외국에 나가게 되면

답답한 것이 많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터넷입니다.

인터넷 속도가 왜 이렇게

 느린지 모르겠습니다.

웹 페이지 한 면을 열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지난번에 유럽으로 성지순례를

갔다가 호텔 로비에서 외국인

한 분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로 느린 속도였지요.

저 같으면 지루하고 답답하다면서

화를 낼 것 같은데 전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습니다.

여유 있게 차 한 잔을 마시고,

또 옆의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소를 잃지 않으며 천천히

 인터넷을 하고 계셨습니다.
지난 평창 동계 올림픽 때에

외국인들이 인터넷 속도에

깜짝 놀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에

길들여 있어서 일까요?

조금만 인터넷 속도가 느리면

짜증과 화를 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느리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빠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할 것 같지만,

그렇게 많은 것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 없는 것까지

보게 되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면 주변의 작은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를 타고 가면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천천히 걸어야 볼 수 있는

경관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느림 안에서 이루어지는

소소한 기쁨을 통해서

지금 이 순간에 의미를

담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조건 빠른 것에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사람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빠르게 얻을 수 있을까요?

 한 눈에 반한 사랑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사랑은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천천히 다가가는

사랑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화를 내고,

그 사람의 마음이 좁다면서

상대방에 대한 섣부른 판단까지 합니다.

사랑은 절대로 빠르게 얻을 수 없습니다.

빠르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나의 일방적인 집착이 아닐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부터 주님 사랑 안에 머물겠다.’

라고 다짐한다고 해서 곧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의 노력을 통해서만이

그분의 큰 사랑 안에

머물 수가 있습니다.

 그 노력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사랑의

실천을 하는 사람만이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명령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요한 사도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참조).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자신은 할 만큼 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면서

사랑하지 않는 이유만을 계속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베드로 사도도

오늘 제1독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사도 10,34 참조).

그런데 하느님께서도

하지 않는 모습을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빠르게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특히 사랑은 아주 천천히

다가가야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기쁜 소식과

함께 보고 깨달을 수 있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끔찍한

죽음까지도 선택하면서 끝까지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부활하신 뒤에도 배반한 제자들을

 혼내기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을 주십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러한 사랑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요한 15,11 참조)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라.

(벤자민 프랭클린)

예전의 PC통신 화면입니다.

엄청나게 느렸지만 그래도 그때가 그립습니다.

"함께 할 수 있는 삶."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운 장미가

자신을 이렇게 자랑합니다.
“내 가시는 아주

뾰족하고 날카롭지.

 그래서 초식동물들이 내 잎을

 갉아 먹을 염려가 없어.

나의 이 촘촘하고

날카로운 가시들을 봐라.

 아마 새들도 내 가지에는

앉지 못할 걸?”
그러면서 주변에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를 보면서 말합니다.
“너는 덩치는 그렇게 크면서도

자기 몸을 지킬

무기가 하나도 없으니

어떻게 하니?

딱따구리는 네 몸에

구멍을 파고 있고,

다른 동물들이 잎을

마구 뽑고 가지를 함부로

부러뜨려도 가만히

 참고만 있어야 하잖아.”
어느 날 아이들의 숲속으로

소풍을 왔습니다.

그 중에 한 소녀가 나무들

 사이를 걷고 있었지요.

이 소녀는 활짝 핀 장미를 보고

다가서다가 그만 장미의 가시에

 찔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는 떡갈나무를

끌어안으면서 말합니다.
“너는 장미처럼 예쁜 꽃은 없지만,

가시가 없어서 이렇게

내가 껴안아 줄 수 있구나.”
화려하지만 가시와 같은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만큼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편한 사람은 쉽게 다가서고

그래서 편하게 안아주기도 하지요.

절대로 외롭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일까요?

화려하지만 외로운 삶?

아니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함께 하는 삶일까요?

화려한 장미. 그러나 가시가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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