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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랑은 하느님의 본성
작성자김리원 쪽지 캡슐 작성일2018-05-06 조회수1,994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8년 나해 부활 제6주일(생명주일)


<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복음: 요한 15,9-17






그리스도


엘 그레코 작, (1606), 톨레도 주교좌 성당


오스카 와일드의 저만 알던 거인은 사랑과 행복, 사랑과 구원과의 관계를 나름대로 비유적으로 표현한 우화입니다.

한 동네에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풀과 나무와 새들이 많은 정원에서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그 정원엔 주인이 없었기에 아이들은 복숭아열매까지 따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7년 만에 먼 친구와 머물던 그 집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 주인은 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정원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놀고 있는 아이들을 쫓아내고 아이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담장을 쳐 놓았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해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거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담장을 친 정원만 봄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겨울인 것입니다. 눈과 찬바람과 우박이 내렸고 눈 쌓인 복숭아나무는 꽃을 피울 수 없었습니다. 새들도 찾아오지 않아 조용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행복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종달새 한 마리가 거인의 침실 창문에 앉아 노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인은 오랜만에 좋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창문을 내다보니 아이들이 개구멍으로 들어와 놀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곳엔 봄이 와 있었습니다. 기분이 좋아 아이들을 보러 내려갔는데 아이들은 거인이 다가오자 무서워 모두 달아나버렸습니다. 하지만 한 작은 아이만 복숭아나무에 올라가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거인은 아이를 나무에 올려주었습니다. 아이는 거인에게 입맞춤을 해 주었습니다. 거인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이들은 모두 다시 돌아와 이 정원에서 놀기 시작하였고 거인은 담장을 허물어버렸습니다.

며칠이 지났을 때 거인은 그 키 작은 아이를 찾았지만 아이들 무리 속에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도 그런 아이는 자기들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30년이 흘러 기력이 세하였을 때 마지막으로 그 아이가 정원에 나타났습니다. 거인은 그 아이에게 다가갔고 아이는 거인을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이젠 자신의 정원에서 살게 해 주겠다고 말했는데 그 아이 손에는 못 자국이 있었습니다. 거인은 그 복숭아나무 밑에서 행복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결국 그 사랑하는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멀리서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도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은 내가 상대의 정원에 방문하는 것이고 상대를 내 정원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초대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랑하면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그러면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 된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의 정원에 처음으로 하느님을 초대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로 초대받아 올라가실 수 있으셨습니다.

 

사랑이 내가 하느님이 되게 만들고 참 기쁨을 느끼게 해 주는데도 여전히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왜일까요? 그 이유는 사랑의 행복은 사랑을 해봐야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느껴보지 못한 행복을 위해 모험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지금의 행복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들은 사람처럼 두 발로 서서 걷고 언어를 사용하는 행복을 느껴보지도 못했으면서 늑대로 사는 것을 갈망하다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이 아이들을 설득시키지 못한 이유는 이 아이들에게 믿음이 생길만한 큰 사랑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사랑을 하도록 초대받게 되는 이유는 사랑이 행복을 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으면 하느님의 정원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사랑으로만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만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행위가 아닙니다. 행위는 존재를 따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행위를 하시지 않아도 본성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태양은 행위를 하지 않아도 태양입니다. 본성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의 본성을 지니면 두 발로 걷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들은 두 발로 걷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늑대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본성은 믿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자신이 늑대라고 믿으면 본성이 늑대고 그러면 늑대의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개가 두 발로 걷는 것처럼 사람의 흉내를 낼 수는 있더라도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행동은 흉내 낼 수 있어도 본성은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믿어야합니다. 하느님이라고 믿지 못하고 여전히 사람이라고 믿으면 하느님의 자녀인 척 흉내만 내다가 결국 심판 때는 염소의 무리에 속하게 됩니다. 양과 염소는 똑 같은 행동을 하지만 그 본성상 구분됩니다.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어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둡니다. 두 사람이 맷돌질을 해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둡니다. 심판은 행위로 결정되지 않고 그 사람은 사람으로 맷돌질을 했는지 하느님의 자녀로 맷돌질을 했는지에 의해 결정됩니다. 행위로 심판해주기를 바라는 이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느님의 자녀의 본성을 갖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는 마치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인간을 만나게 되는 것과 같고,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부모를 만나게 되는 순간과 같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믿음이 재정립되고 그 정체성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들이 자신들이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면 두 발로 서고 언어를 배우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아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부모는 두 발로 걷는데 자신들만 네 발로 걷고 있는 것을 참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언젠가는 두 발로 걸을 수 있음을 믿기에 수천 번을 넘어져도 지치지 않고 도전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사람의 본성과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돈을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고 교만을 좋아하여 사람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 앞에서 당신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심판관으로 누구 앞에 서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다행인지 심판은 인간 스스로 선택한 본성에 의해 양과 염소로 이미 구분되어 있어서 일부러 심판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녀인데 하느님의 아드님인 그리스도처럼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처럼 살려고 노력합니다. 만약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이전의 본성과 싸우고 있다면 그 사람 안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물론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상태로 죽으면 적어도 연옥은 가지만 바로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예 자신 안에서 죄와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는 하느님의 본성이 아주 조금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내 이전 본성이 어둠이라면 하느님은 빛이십니다. 빛이 들어오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사순절을 살고 있다면 적어도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시기에 그런 상태에서 죽는다면 지옥엔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지만 동물도 사랑을 합니다. 개도 자기 주인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처럼 사랑하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느님처럼 사랑해야합니다.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수준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5-36)

누가 나에게 잘해주든 못해주든 분별하지 말고 모두를 하느님처럼 사랑한다면 하느님처럼 된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을 복음을 전하라는 말과 바꿀 수도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분별없이 사랑해야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십니다. 지옥에 있는 자들까지도 사랑하십니다. 만약 그들이 조금이라도 돌아올 마음만 있으면 하느님은 기쁘게 맞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본성상 빛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회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데 지옥에 간 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자유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사랑하기 위해 하느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실 때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 합하여있지 않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가 부모를 만나면 수천 번을 넘어져도 두 발로 걸으려고 하듯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사랑의 열매가 맺히게 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일어서려고 하지 않는 아기와 같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지 못하는 것은 믿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네 발로 걷는 행복에 머물고 싶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뭇잎을 계속 좋아하고 싶다면 나비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비가 돼 보면 그 꿀맛에 비해 그동안 먹던 나뭇잎의 쓰디쓴 맛에 왜 집착하며 살아왔는지 한탄스럽기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할 것입니다. 기도가 아니면 용서도 사랑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운 마음이 생겨나는데도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청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은 사랑의 길 외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길만이 진리이고 생명이고 그 길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오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이어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자기만 알았던 거인이 예수님을 자신 안에 초대하였을 때 자신도 그분의 동산에 초대받게 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 머물고 싶다면 그분의 유일한 계명인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려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정원에 아기 예수님을 초대한 사람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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