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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왜곡된 혼인 관계와 심판(I) (창세 6:1 - 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5-08 조회수3,846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왜곡된 혼인 관계와 심판(I)
 (창세 6:1‐8)

 1 땅 위에 사람이 불어나면서부터 그들의 딸들이 태어났다.   2 하느님의 아들들이 그 사람의 딸들을 보고 마음에 드는 대로 아리따운 여자를 골라 아내로 삼았다.  3 그래서 야훼께서는 '사람은 동물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입김이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사람은 백 이십 년밖에 살지 못하리라' 하셨다.  4 그 때 그리고 그 뒤에도 세상에는 느빌림이라는 거인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들로서 옛날부터 이름난 장사들이었다.  5 야훼께서는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시고  6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싶으시어 마음이 아프셨다. 

   
오늘은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를 두루 살펴보면서 왜 하느님은 최후 심판의 모형인 노아의 홍수 심판 근거를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혼인의 왜곡으로 제시를 하셨는지에 관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 들으시면 왜 성경이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들의 관계를 혼인 관계로 묘사하고 있는지 그리고 하느님께서 왜  그 혼인 관계의 왜곡을 간음이라 표현을 하시고, 간음한 자들은 돌로 쳐서 죽이라는 명령을 하셨는지 그리고 아울러 요한묵시록이 왜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끝나게 되는지에 관해서도 확실하게 이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量이 아주 방대하기 때문에 아무리  요약을 해서 설명을 해도 오늘은 다 끝내지는 못할 것 같아서 오늘은 반만 하고 다음번에 결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창세 6:3)  3 그래서 야훼께서는 '사람은 동물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입김이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사람은 백 이십 년밖에 살지 못하리라' 하셨다. 
 
우리가 봤다시피 1절과 2절은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해서 닥치는 대로  결혼했다고 하는, 이미 일어난 사실에 대한 객관적 묘사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느님께서 그러한 인간들의 행태를 연유로 하여 분노를 하시는 장면이 3절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들에게서 당신의 입김을 거두어 버리시겠다는 무서운 경고를 내리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1절과 2절이 3절부터 시작되는 하느님의 분노의 원인이라는 것을 거기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의 입김’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루아흐’는 ‘성령, 영혼, 생명, 생기, 바람’ 등의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 구절을 이해하기를 하느님께서 분노하셔서 인간들에게서 성령을 거두어 가시는 것으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렇게 이해를 해도 별 문제는 없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같은 의미이니까요. 그러나 여기서는 그 단어를 성령이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생명력’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교리적 혼란을 막는 차원에서 옳습니다. 이 구절에서의 ‘입김’을 성령이라고 번역을 하면 자칫 하느님을 제한적 존재로 오해를 할 소지도 있고 하느님의 편재성에 흠을 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성령의 장중(掌中)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 하느님은 완전한 하느님이 십니다. 그 하느님은 偏在하시는 분이지요. 편재(偏在)라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계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범신론이나 만유재신론의 차원에서 설명을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의 전능성과 편재성의 측면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성령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곳에 편재하시며 그 분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경륜해 나가고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성령 하느님의 영향력 밖에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존재론적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모든 만물은 성령의 부재하에 절대 존재 자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성령에 의해 창조되고 존재하며 인도되고, 성령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되는 존재입니다. 지옥에 가는 인간들도 영원히 성령과 함께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성령이 지옥의 불로 함께 하시게 되는 것이지요.
(사도17:28)  28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living) 움직이며(moving) 살아 간다'(being) 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또 여러분의 어떤 시인은 '우리도 그의 자녀라' 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인간은 존재하기 시작하는 being의 시점부터 영원까지 하느님의 生氣에 힘입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지옥의 구더기까지도 하느님의 장중을 떠나서는 한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성경에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주님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한 표현은 구속사 안에서의 성령의 역할, 즉 성부하느님이 계획하시고 성자 하느님께서 성취하신 구원을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적용해 가시는 구속사 안에서의 성령의 협의(狹義)의 역할에 근거한 염원인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다윗이 주님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기도를 한 것은 성령 하느님이 떠났다 돌아왔다 하시는 제한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로 하느님의 구원 事役이 흔들리지 않게 해 달라는 차원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의 생명력이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가 되는 것이고요.
그처럼 성령 하느님은 인간이 창조되는 시점에서부터 그들이 존재하는 영원까지 모든 인간들과 함께 계십니다. 천국에서는 생명의 빛으로 지옥에서는 소멸하는 불로 영원히 함께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1절과 2절에서 언급한 하느님께서 지정하신 혼인 관계를 깨버리는 자들에게서 다른 말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자신의 자랑을 위해 언제든지 하느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타고 넘어들어 올 수 있는 자들에게서 하느님의 생명력, 즉 ‘복 (福)’  ‘바라크’를 빼앗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부어주시는 ‘생명력, 복, 바라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전제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누차 말씀드렸다시피 하느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에 順服하는 피조물들에게 당신의 크신 능력과 선한 뜻에 따라 그들을 가장 행복하고 선한 상태로 유지하시는 것을 ‘福’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과 그 분이 세우신 질서에 순복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복’이, ‘하느님의 생명력’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복’은 하느님의 뜻에, 그 분의 통치에 순복할 때 주어 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순종 해야 하는데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불순종의 자식들은 하느님의 뜻에 反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생명력을 스스로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이 땅에 태어나는 타락을 한 모든 인간들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느님의 생명력을 잃은 모든 죄인들을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바로 그 죄와 허물로 죽은 자가 되어버린 근본적인 이유가 오늘 본문 3절에 명시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나의 입김이 영원히 그들과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그 어구를 통해 또 한 번 하느님의 은혜의 손길을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모두 죽어야 하는 저주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일련의 무리들에게 그 생명력이 다시 부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분명 하느님께서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고 세상의 힘의 원리를 좇아 사는 이들 모두에게서 당신의 생명력을 빼앗아 버리신다고 하셨는데 그 중에서 어떤 이들에게는 다시 그 하느님의 생명력이 영원히 부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하느님의 생명력으로부터 차단이 되었던 그들에게 하느님의 은혜가 부어진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부어졌던 하느님의 노여움이 그 일련의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모두 해결이 되었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당신백성들에게 요구하셨던 삶이 모두 성취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들 사이에는 이제 ‘하느님의 생명력이, 복(福)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들을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묵시20:5,6), 다시 살아난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새 생명을 받은 우리 성도들도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영원히 하느님의 생명력에서 차단이 될 뻔 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모든 자들에게서 하느님의 생명력을 거두시겠다는 경고를 3절에서 하셨습니다. 그런데 즉시 심판을 하지 않으시고 120년간의 유예기간을 두십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오래 참으심과 그 분의 깊은 은혜 를 또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노아를 통해 120년간 방주를 짓게 하시고 그 120년 동안을 인간들이 하느님께 돌아 올 수 있는 기회로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 말미가 인간들의 날 수가 120년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或者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때부터 인간의 수명이 120년이 되었다고 이해를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아닙니다. 11장에 보면 홍수後에도 노아 후손들의 수명이 500살 가까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120년은 노아가 방주를 지으며 세상 에 심판을 선포한 그 기회의 날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20년 동안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3절 한 절에 전체 역사의 개괄적 내용이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역사라는 것은 하느님의 진노의 불에 벌써 끝장이 났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도 이렇게 지속이 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오래 참으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노아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고 창조 질서를 뒤엎어 버린 인간들은 더 이상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자기 자랑과 힘의 과시’를 인생의 목표로 삼아 시집가고, 장가가고, 소도 사고, 아이도 낳으면서 그렇게 살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은 그렇게 끝까지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스스로를 위해서만 사는者들을 모조리 심판해서 멸하실 것을 노아의 홍수를 통해 警告하시는 것입니다.
   (마태 24:37~43)  37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바로 그럴 것이다.  38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 가던 날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39 홍수를 만났는데,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 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41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 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42 이렇게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43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 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 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 모습은 지금 최후의 심판 때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노아의 때도 똑같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로 데려감을 당하는 이들과 저승에 버림을 당하는 사람들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두십니다. 데려감을 당하 는 사람은 똑같은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좇아 하느님 나라를 준비했던 사람이고 버려둠을 당한 사람은 일상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이 땅의 힘을 좇아 살던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불순종한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무슨 명령을 들었어야 순종도 하고 불순종도 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은 노아의 시대에도 복음을 전하셨나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분명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베전3:19‐20)   19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20 그들은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가 물에 빠지지 않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후에 지옥으로 내려가서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력으로부터 차단이 된 지옥 같은 세상에서 우리 주님께서 노아를 통하여 또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느님의 열심에도 구원 얻은 자들이 겨우 여덟 명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려시대, 조선 시대에 태어났던 우리 조상은 복음도 못 들어보고 지옥에 간 것인가?’라는 愚問을 하시면 안됩니다. 하느님은 창세 이후로 계속해서 당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자연을 통해, 우리 인간들 속에 남아 있는 구조적인 하느님의 형상을 통해, 양심을 통해’ 인간의 죄악상과 하느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계속해서 외치셨고 지금도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로마1:18‐20)  18 하느님의 진노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인간의 온갖 불경과 불의를 치시려고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19 사람들이 하느님께 관해서 알 만한 것은 하느님께서 밝히 보여 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20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슨 핑계를 대겠습니까? 
 
그렇지요? 우리가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은 분명 심판의 遊藝其間을 주셨고 그 유예기간 동안에 그들이 저주의 심판을 면할 수있는 복음을 전해 주셨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120년간의 유예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는 그렇게 모두가 하느님을 등지고 그 분의 말씀을 우습게 여길 때에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 심판의 날을 준 비할 수 있었을까요?  노아는 날 때부터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오직 ‘은혜에의해서’ 입니다. 그 확실한 답이 오늘 본문 8절에 나와 있습니다.
   (창세 6:8)  8 그러나 노아만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 
 
노아가 뭔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심판의 날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노아만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그 저주의 심판 속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도 하느님의 은혜를 입지 못했으면 그 저주의 물속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었던 똑같은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느님의 은혜가 부어지자 그가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者가 되더라는 것이지요. 창세기 6장 9절을 보세요.
(창세 6:9)  9 노아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그 당시에 노아만큼 올바르고 흠없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었다. 
 
8절에서 노아가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진술을 하고 바로 노아는 그 은혜에 의해 의인이 되었다고 9절이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과 동행하여 하느님나라로 입성하게 되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게 된다는 것을 창세기 기자인 모세는 여기서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에녹처럼 영원한 죽음과는 아무 상관없는 하느님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하느님과 동행’ 이라는 동일한 어구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고요. 에녹과 노아는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던 자들이고 그들이 바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모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멸망 속에 꽃피는 은혜의 이야기를 가리켜 우리가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중점을 두고 살피려고 하는 것은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편에 흐르고 있는 하느님의 그 은혜의 교리가 인간의 혼인 관계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이기에 은혜를 입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는 자들의 죄목이 혼인 관계의 왜곡으로 제시되어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신 분들은 성경이 하느님과 우리 성도와의 관계를 종종 혼인 계약 아래에 있는 부부로 묘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하여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에 관한 설명을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발견할수 있을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 말미에서 언급이 된 아담과 하와의 혼인 관계가 요한묵시록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끝나는 것도 익히 알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인간의 혼인 관계를 통해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혼인 관계를 어지럽힌 者들은 ‘간음한 자’라 하여 가장 잔인한 사형 집행 방법인 돌로 쳐 죽이는 벌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노아의 홍수 사건도 그러한 혼인 관계의 왜곡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을 닥치는 대로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불순종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 불순종에 뿌려진 하느님의 은혜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잘 배우시기 바랍니다. 먼저 창세기 1장으로 가서 하느님께서 인간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사건에서부터 출발을 하겠습니다.
  (창세1:2‐3)   2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3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보시다시피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때 세상은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상태였습니다. 그 혼돈과 공허와 어둠속에 하느님의 숨결이 수면 위에 운행을 하였고 암흑 속에 빛이 생겨났습니다. 이 첫 창조는 그 자체로서  완전한 목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들과 그들이 함께할 새하늘과 새 땅,  즉 새창조의 그림자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의 새 창조를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으로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신 것이고요. 그러니까 ‘창세기의 첫 창조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 그리고 교회의 탄생과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우리 성도들의 복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정확하게 같은 이야기를 점진적이며 반복적으로 설명을 해 놓은 것입니다. 몇 가지 증거를 대드리겠습니다.
   (신명 32:10‐12)   10 야곱을 만나신 것은 광야에서였다. 스산한 울음소리만이 들려 오는 빈 들판에서 만나, 감싸 주시고 키워 주시며 당신의 눈동자 처럼 아껴 주셨다. 11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고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를 향해 날아 내려 와 날개를 펼쳐 받아 올리고 그 죽지로 업어 나르듯 12 야훼 홀로 그를 인도해 주실 때, 어느 다른 신이 그와 함께 하였더냐? 
 
지금 이 구절은 모세의 노래의 한 부분입니다. 모세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건지신 사건을 가리켜 빈들판(황무지)에서 건지시고 독수리가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는 것처럼 그들을 인도하셨다고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쓰인 ‘황무지‘ ’토후, 에레쯔‘라 는 단어가 성경의 다른 곳에 똑같이 쓰인 곳이 있는데 거기가 창세기 1장 2절입니다.
   (창세1:2)   2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여기 보시면 ‘땅이 혼돈하다‘라는 부분이 있지요? 바로 그 단어가 ’토후 에레쯔‘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읽었던 신명기 32장 11절의 ‘독수리가 새끼 위에 너풀거리다’라는 어구에서 ’너풀거리다‘라고 번역 이 된 히브리어 ’라하프‘도 성경의 다른 곳에  한번 나오는데 그 단어도 창세기 1장 2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하느님의 기운이 수면 위에 ‘휘돌다‘는 단어가 나오지요? 거기서 ’휘돌다‘라는 단어가 ’라하프‘입니다. 천지창조 때 쓰인 단어들과 이스라엘의 출애굽에 쓰인 단어들이 정확하게 같습니다. 모세라는 저자는 모세 오경을 쓰면서 천지 창조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묘사를 함으로써 하느님의 천지 창조가 하나느께서 혼돈과 공허와 암흑 속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해 내시는 새 창조를 미리 힌트하고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에도 보면 이스라엘이 빠져있는 죄악 된 세상을 지칭할 때에 혼돈과 공허와 암흑이라는 단어가 등장 했었지요?
   (에레 4:23)  23 '땅을 내려다보니 끝없이 거칠고 하늘을 쳐다보니 깜깜합니다. 
 
이렇게 창세기의 첫 창조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그들이 처해있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구원의 이야기를 含意하고 있는 새 창조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조금 더 확실한 증거를 대 드리지요. 그 창세기 1장 2절의 장면이 출애굽기에서 판박이처럼 나타나는 곳이 있습니다.
 (출애 14:21)   21 모세가 팔을 바다로 뻗치자, 야훼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바람을 일으켜 바닷물을 뒤로 밀어 붙여 바다를 말리셨다. 바다가 갈라지자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입니다. 물 위에 ‘바람’ ‘루아흐’가 운행을 하자 저주의 바다가 마른 땅이 되는 장면입니다.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그 자체 안에 하느님의 계약을 담고 있는 것이지요.  첫째 날의 창조에서 우리는 어둠이 모두 물러가고 빛만 남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하느님의 계약을 읽어 낼 수 있었고, 둘째 날의 창조를 통해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로 막고 있는 穹蒼을 예수 그리스도로 박살내 버리시고 하늘과 땅이 하나로 연합을 하는 대 연합의 계약을 읽어 낼 수 있었으며, 셋째 날의 창조를 통해서는 저주의 바다가 모두 물러가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징인 마른 땅이 드러나게 될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그 속에서 읽어 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가로 막고 있는 저주의 바다 홍해 위에 ‘루아흐’가 운행을 함으로 마른 땅이 드러나게 되는 홍해의 갈라짐은  삼위 하느님에의해 새하늘과 새땅이 창조되는 것을 모형처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가 하느님의 백성들이 그들이 처해있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구원의 이야기를 含意하고 있는 새 창조의 그림자라는 것을 이제 확실하게 이해하시겠지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주시면서 한번은 하느님이 엿새 동안 창조를 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셨으므로 안식을 지키라고 첫 창조의 이야기를 근거로 안식일을 지키라 명령을 하시지만(출20:8‐11)(출31:12‐17) 신명기에서는 내가 너희를 이집트에서 건져 낸 하느님이므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십니다.(신5:12‐15) 거기서도  천지 창조와 출애굽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안식’ 이라는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다른 모양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1장 2절에서 창조에 앞서 나타나신 하느님의 모습을 삼위 하느님이라 하지 않고 하느님의 기운이라 했을까요? ‘하느님의 기운‘ 은 성령 하느님만을 지칭하는 것 아닙니까?
창세기의 첫 창조가 하느님의 백성들의 구원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을 모형으로 담고 있는 것이라면 그 일을 계획하시고, 실행에 옮기시고, 적용을 하시는 삼위 하느님이 수면 위를 運行하고 계셨어야지요.
창세기 1장 2절에서 수면 위를 운행하고 있는 하느님의 기운은 단순히 성령 하느님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기운이라 번역 이 된 ‘엘로힘 루아흐’  ‘spirit of  god' 이라는 단어만 보면 그냥 그 단어는 성령 하느님만을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만  잘 생각해 보세요. 성령 하느님만 영이신가요? 성부 하느님, 성자 하느님, 성령 하느님 모두 영이십니다. 성자 하느님도 성육신 하기 전에는 영이셨습니다.’엘로힘 루아흐‘라는 단어는 성령 하느님만을 지칭할 때도 있지만 삼위 하느님을 모두 지 칭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엘로힘 루아흐‘는 삼위 하느님이라 해석을 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일관성에 비추어 볼 때 적합한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로 가서 성경이 창세기 1장의 하느님의 기운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보시면 조금더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히브 1:2‐3)  2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주시기로 하셨습니다.  3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기서는 창세기 1장2절에서 창조를 위해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그 기운을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기술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창세기 1장 2절의 하나님의 기운은 삼위 하느님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일관성에 비추어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그 자체가 온전한 목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힌트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힌트하고 있는것은 삼위 하느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암흑으로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될 어떤 한 무리에게 빛을 비추셔서 그들을 빛의 나라로 이끌어 내시는 새 창조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렇게 구약에서 그림으로 보여 주었던 새 창조 이야기가 신약에서 밝히 드러납니다.  에베소서 2장으로 가보지요.
  (에페 2:1‐5)  1 여러분도 전에는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여러분이 죄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고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의 두목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으며 오늘날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조종하는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습니다. 3 실상 우리도 다 그들과 같아서 전에는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서 육정에 끌려 살았던 사람들로서 본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4 그러나 한없이 자비스러우신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5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해가 가시지요? 이렇게 허물과 죄로 죽었던 불순종의 상태, 다른 말로 혼돈과 공허와 암흑의 상태인 하느님의 백성들을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건져 내실 것임을 성경은 천지창조에서부터 차근차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내신 하느님의 이끄심을 ‘황무지에서 보호하고 독수리가 새끼 위에 너풀거리는 것 같은 이끄심’ 이었다고 묘사를 했는데 과연 모세는 어떠한 모습을 보고 그렇게 묘사를 한 것일까요? 무엇을 보았으니까 하느님의 顯現을 그렇게 묘사를 했을 것 아닙니까? 광야에서 밤낮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한 것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지요 그러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무기나 방패정도가 아니 라 하느님의 현현(顯現)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함을 하느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 다. 그러니까 창세기에서는 삼위 하느님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느님의 기운으로 묘사가 되었다면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시는 출애굽 사건에서는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삼위 하느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묘사가 된 것입니다.
   (하께 2:5)  5 너희가 에집트에서 나올 때 너희와 계약을 맺으며 약속한 대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을 터이니, 겁내지 말아라.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하느님의 기운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다고 하시지요?  하느님의 氣運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처럼 덮어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하느님의 형상과  영광, 그 분의 현현을 구름 과 불, 그리고 소리로 묘사 할 때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곳을 한 곳 보고 가지요.
  (에제 10:3~5)  3 그 사람이 들어 가는데 거룹들은 성전 오른쪽에 서 있었고, 울 안에는 구름이 덮여 있었다. 4 그런데 야훼의 영광이 거룹 있는 데서 떠올라 성전 문지기 방으로 옮기셨다. 그러자 성전을 구름으로 덮이고 울 안에는 야훼의 영광이 가득 빛났다. 5 그리고 거룹들의 날개 치는 소리가 바깥 마당에까지 들려 나오는데, 그 소리는 마치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때 나는 소리와도 같았다. 
 
여기 보면 하느님의 영광의 顯現을 구름과 光彩(빛) 그리고 날개 소리 같은 하느님의 음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구름과 빛, 그리고 소리로 묘사되고 있는 하느님의 영광, 형상,  현현은 혼돈과 공허와 암흑을 물리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빛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새 창조의 주체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105:38~39)   38 에집트인들은 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이 떠나는 것을 기뻐하였다.  39 하느님께서는 구름을 펼쳐 덮어 주시고 밤에는 불로 비추어 주셨다. 


여기서도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독수리가 날개로 그 새끼를 덮는 모양처럼 이스라엘을 구름으로 덮으시고 불로 밝히시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요?
그러한 구름과 빛의 모습, 새 창조의 하느님의 모습은 노아의 홍수 사건에도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식구들을 은혜로 구원하신 후에 그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는데, 수면 위에 바람(르와흐)이 불어 물이 줄고 새로운 하늘 과 새 땅이 드러납니다. 창세기 1장 2절과 출애굽기의 홍해 사건에서 본 장면이지요. 그리고는 그들 앞에 무지개를 보여주십니다. 무지개는 무엇과 무엇이 만나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까? 구름(수증기)과 빛의 作品입니다. 그러니까 무지개는 단순히 약속의 징표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현으로 노아와 그의 식구들 앞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저주의 물로 세상의 혼돈과 공허 와 암흑을 다 쓸어버리고 당신의 백성들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신 당신을 무지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지개는 창 세기 1장 2절의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느님의 氣運의 다른 모습이며 출애굽 광야에서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또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묵시록에서 예수님께서 무지개를 밟고 서신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무지개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을 혼돈(混沌)과 공허와 암흑에서 건져내시는 하느님의 현현인 구름과 빛과 소리가 신약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지요? 오순절 날 다락방에서요.
(사도 2:1‐3)   1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2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바람(루아흐), 소리, 불 다 나오지요? 이 장면이 어떤 장면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事役이 완성이 되고 구원받은 敎會가 탄생하는 장면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창세기의 첫 창조, 출애굽 등의 사건으로 점진적으로 啓示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창세기 1장 2절의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하느님의 기운에서 시작해서 사도행전의 마르코의 다락방까지 왔습니다.여기까지 이해가 가지요? 

 

성경은 지금 한 이야기를 여러 모양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한 발짝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독수리 날개처럼 이스라엘 위에 너풀거리며 그들을 덮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출애굽 사건이 조금 다른 모습으로 기록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에제16:7‐14)   7 들풀처럼 자라나거라 하였더니, 너는 자라고 커서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너는 젖가슴이 부풀고 거웃도 자랐는데 알몸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8 나는 지나가다가 네가 꽃다운 한창나이가 된 것을 보고 내 겉옷 자락을 펴서 너의 맨몸을 감싸 주었다. 나는 맹세하고 너와 약혼한 사이가 되었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너는 내 사람이 되었다.  9 나는 너를 목욕시키고 너에게 묻은 피를 닦아 주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10 수놓은 옷을 입혀 주고 고래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겨 주고 아마포띠를 띠어 주었으며 비단 겉옷을 입혀 주었다.  11 너를 보석으로 단장하고 팔에는 팔찌를, 목에는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12 코에는 코고리를, 두 귀에는 귀고리를 달아 주었고 머리에는 아름다운 족두리를 씌워 주었다.  13 이렇게 너는 금은패물로 단장하고 모시옷에, 비단옷에, 수놓은 옷을 입고 고운 밀가루 음식과 꿀과 기름을 먹게 되었다. 너는 점점 아름다와져 마침내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14 내가 너에게 입혀 준 영화는 한점 티없이 아름다왔으므로 네 명성은 만방에 떨쳤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지금 이 모습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에제키엘서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벌거벗은 赤身, 즉 부끄러움에 노출된 아담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암흑,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상태와 같은 모습입니다. 계속보면 하느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을 옷으로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그 벌거벗은 자를 신부로 삼으시는 분으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시면 ‘옷으로 너를 감싸’라는 어구가 있지요? 거기서 옷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히브리어 ‘카 나프’입니다. 그 단어는 ‘날개’라는 단어입니다. 어디서 보신 장면이지요? 독수리 날개로 이스라엘을 감싸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느님  묘사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그 단어를 그대로 써서 하느님의 구원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婚姻잔치로 묘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룻기에도 똑같은 단어가 나옵니다. 룻이 媤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보아즈가 누워있는 발치에 누워 있다가 보아즈에게 발견이 되었을 때 룻이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라고 말을 하지요? 그 때 쓰인 단어들이 정확하게 같은 단어들입니다. ‘카나 프’ ‘파라쓰’ 그 말은 ‘나를 당신의 신부로 삼아주세요‘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혼인 잔치나 혼인 관계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罪惡에 빠져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열심과 은혜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계약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하느님의 기운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다’와 출애굽기의 ‘독수리 날개로 덮다, 독수리 날개가 새끼들 위에 너풀거리다’ 그리고 ‘야훼의 영광의 구름이 이스라엘을 덮다’ ‘신랑이 신부를 옷자락(날개)로 덮다’가 하나로 연결 되십니까? 
   (예레 2:2)   2 '예루살렘에 가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똑똑히 일러 주어라. '나 야훼가 하는 말이다. 씨 뿌리지 못하는 땅 사막에서 나를 따르던 시절, 젊은 날의 네 순정, 약혼시절의 네 사랑을 잊을 수 없구나. 
 
하느님께서 출애굽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그 때를 이스라엘의 신부 시절이라고 하시지요? 이렇게 성경에서의 婚姻 관계, 夫婦 관계는 혼돈과 공허와 암암 속에서 빛으로 인도함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들과 하느님의 이야기, 구속사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상 징적인 것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 2장의 아담과 하와의 혼인에서 시작하여 요한묵시록19장의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마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혼인 잔치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救贖이야기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지요.
  (창세 2:22‐24)   22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다음, 아담에게 데려 오시자 23 아담은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 24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묵시19:7~9)   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 양의 혼인 날이 되었다.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고,  8 하느님의 허락으로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게 되었다. 이 고운 모시옷은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이다.'  9 또 그 천사는 나에게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행복하다' 고 기록하여라' 하고 말했습니다. 또 이어서 '이 말씀은 하느님의 참된 말씀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성경 전체는 천지 만물의 주관자이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열심과 은혜로 당신의 백성들을 택하시고 그들과 함께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임하실 것이라는 계약을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이며 점진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것을 제한된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婚姻관계를 들어 설명을 하신 것이고 인간들에게 婚姻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혼인을 하든 안하든 인간들은 혼인이라는 것이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을 추구하는 制度라는 것을 알잖아요. 그래서 하느님은 혼인이라는 것을 인간들에게 허락하시고 하느님과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가르침처럼 離婚  한 사람은 하느님의 명령을 어긴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 천국에 못 간다는 주장은 얼토당토한 주장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離婚을 禁하라고 하신것은 혼인 안에 신랑이신 하느님과 신부인 교회의 관계가 상징적으로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 관계에서 갈라져 나가는 자들은 모두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 이라는 상징적 경고이지 이혼 자체에 대한 경고가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하느님 나라에서는 新婦가 男便에게 목숨을 걸고 순종해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께 온전한 순종을 하고 新郞이 新婦를 목숨 걸고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목숨 걸고 사랑해 주시는 그러한 나라라는 것을 婚姻 관계를 통해 우리에게 미리 맛보기로 설명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는 혼돈과 공허와 암흑이 물러가고 빛과 질서와 풍요만 이 있는 곳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라서 그 분의 뜻에 순종하기만 하면 인간은 찬란한 빛과 질서와 풍요 속에서 永遠히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 하고 하느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자랑하고 싶어 하는, 하느님 앞에서의 네피림, 勇士, 有名한 者들, 힘의 원리 속에 젖어 있는 인간들은 절대 하느님께 순종할 수 없고 그들은 빛과 질서와 풍요가 아닌 暗黑 과 混沌과 空虛 속으로 빠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심판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종종 혼인 관계의 왜곡을 심판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며 혼인 관계 속에서의 불성실을 姦淫으로 명명하여 돌로 때려죽이는 것입니다. 그건 단순히 나쁜 일을 했기 때문에 相應하는 벌을 주는 차원이 아니라 그 혼인 관 계의 왜곡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않고 ,나의 힘으로 삼지 않고, 세상의 힘의 원리를 좇아 나를 왕으로 삼겠다는 不順從의 죄이기에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하나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의 모형으로 주어지는 노아의 홍수 사건의 원인이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마구잡이로 결혼을 했다는 혼인관계의 왜곡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같이 못난 자들을 택하셔서 당신의 신부로 혼인 계약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신랑으로서 당신의 최선을 다해 목숨을 걸고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지금도 그렇게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그 혼인계약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렇다면 신부인 우리가 지금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여전히 우리의 배만을 위해 신랑을 이용해 먹는 그런 파렴치한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지요. 신부인 우리의 본분이 있잖아요.  신랑의 말을 목숨 걸고 좇는 삶. 신랑이 뭐라고 했어요?  ‘네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우린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로서 열심히 그 일에 매진해 보자고요.
  다음에는  이어서 이 신부의 옷과 제사장의 예복과 에페소서의 전신갑주와 예수 그리스도와 고린도서에서 바오로가 말하는 우리가 입게 될 장막과 하느님의 처소와 우리의 처소,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에 관해 자세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지루하셨죠? 올바른 성경을 알려면 참고 보세요.

바로 다음편이 이어질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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