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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과 신교 - 교리비교
작성자김기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8-05-13 조회수2,915 추천수0 반대(1) 신고

 

가툴릭의 교리와 대칭점에 있는 신교쪽의 일부 교리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이 문서는 아래 문서를 참조해서 간단하게 비교한 문서이고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서들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1. 참고문서 :

- 제임스 기본스 추기경님 저서 '교부들의 신앙'

- 여기 굿뉴스 > 신앙마당 > 묻고 답하기 메뉴에서 작성자를 '오성훈' 으로 검색하시면 자세하고 많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래 링크는 예전에 굿뉴스에 올라왔던 형제님들의 호교론 관련글을 html 파일로 모아 놓은 파일들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모은 것으로 아래 두 분께 허락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성훈 형제님과 김신 형제님께 허락을 받은 것을 아닌 것이라 혹 두 분께서 요청하시면

아래 링크는 제거하겠습니다.

다른 의도가 있어가 아니고 좋은 글을 공유하고 싶어하는 것이니 두 형제님께서 양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성훈 형제님 글 https://drive.google.com/open?id=1Z7lyeVqRa9fOoUVsvKkgEHVE5Uki8pNg

김신 형제님 글 https://drive.google.com/open?id=18j3sSPGsqUzcGyeQ68miRbh4E4Vww8it

2. 비교 대상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 믿음이 가장 중요한 구원의 조건이라는 신교교리(가톨릭은 여기에  믿음과 함께 행위를 조건으로 믿음)

- 성경에 없는 내용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신교 교리(가톨릭은 성전도 하느님 말씀으로 믿고 있음)

 
 
 
3. 과연 성경만으로, 행위 없는 믿음만으로 충분한 것인가?
 

성경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a.   성경은 어느 시대에도 항상 존재했어야 했었음.

b.  성경은 언제든 구해서 볼 수 있었어야 했었음.

 

-     성경은 어느 시대에도 항상 존재했어야 했었음.

 

서기 33년 예수님께서 승천. 성령강림으로 교회 탄생

è 마태오 복음서는 이보다 8년 후, 루카 복음서는 이보다 20년 후, 요한 복음서는 1세기 말에야 나타났음. 교회가 탄생하고서도 오랜 시간 동안 신약성서는 없었음.

서기 100년경 요한 묵시록 완성(신약성경 정경완성) 후 서기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 때 정경 73권이 확정됨

è 이때까지 위경들이 있었음. 성 베드로 복음, 성 야보고 복음, 성 마티아 복음은 모두 가짜 성서였음.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 제3, 4 공의회에서 정경과 위경을 판명했음.

1517년 루터 : 73권에서 7권을 빼서 66권으로 함. 믿음을 근거로 선행을 강조한 야고보서는 허수아비 편지라 부르며 모욕했음.

è 근데 우리 나라 신교에는 야고보서 있음. 397년부터 1517년 까지 하느님께서는 잘못된 성경을 천년 넘게 묵인하고 있었다는 얘기.

예수님께서는 한 줄의 성서를 친히 쓰지도 않으셨고

제자들에게 성서를 쓰라고 명하신 적도 없음(요한 묵시록은 예외). 실제 12 사도와 72 제자와 초대교회 신자들 중 8명이 성경을 기록했음. 네 복음서와 서간등은 모두 어느 개인이나 교회에 보낸 것이고, 교회내의 어떤 긴급한 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집필된 내용임.

è 다만 마르 16,5 에 다음처럼 말씀하심.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è 사도들도 성서를 전파했다는 내용은 없음. 다만 마르 16,20 다음처럼 나옴.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è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서와 그리스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면 올바른 번역도 힘들었던 시기들이 있었음.

 

-     성경은 언제든 구해서 볼 수 있었어야 했었음.

인쇄술이 1440 년에 발명되었고 그 전에는 모두 필사로 성경을 옮겼음. 필사로 옮긴 시기가 천년 정도로 시기적으로 길었으니 이 신약의 존재도 알 수 없는 지역도 많았을 것.

성경 정경이 확립된 4세기~ 15세기까지 모든 이들에게 성경을 공급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음. 결국 이 시기에는 성경을 직접 접해보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았을 것. 또 당시는 문맹률이 지금보다 높았기에 성경을 보고서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을 것. 이 사람들은 성경을 제대로 접해보지 못했으니 구원에서 제외되어야 하나?

 

믿음만으로?

신교에서는 아래 내용을 먼저 말함.

마르 16, 14-18


14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 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래의 말씀도 하셨음.

 

마태 7,21

21 “나에게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è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주님이라 부르지도 않을 것 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지도 않았을 것.

 위 마태 7,22 에 나오는 주님의 이름을 마귀를 쫓아낸 사람들이 위 마르16,17 에 나오는 예수님께 불법을 일삼는 사람이라 지칭된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음.

 

또 예수님께서는 아래 말씀도 하셨음.

 

마태25 , 34 - 36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è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불 속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이들이 심판 받는 그 이유를

불 속으로 가는 사람들이 간음해서, 살인해서, 누군가를 저주해서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내가 굶주렸을 때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은 것이 영원한 불 속으로 가는 이유라고 말씀하셨음.

심판 받은 이유가 이들의 개인적인 간음 등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이웃을 돌보지 않은 이유라고 말씀 하심.

 

나쁜 일을 멀리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시고 착한 일을 소홀히 한 것이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는 원인이라 하심. 여기에서 믿음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으심.

믿음이 없어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씀 하지 않으셨음.

 

 

성경 자유 해석 위험 (교도권 필요함): 악마도 성경말씀으로 우리를 다른 길에 빠지게 하려 함

악마는 마태 4,5-7 에서 성경말씀(시편 91,11-12)으로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음.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6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교도권이란? (http://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291&keyword=교도권&gubun=01&gubun=01)

 

 교회가 복음 선포하는 임무를 유권적으로 이행하는 권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지체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하므로 복음선포의 임무를 진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황 주교단 통하여 구원 진리 유권적으로 교시(敎示) 뿐아니라 평신도 통하여 교시한 자료를 발전시키고 체계화 한다.

  
일찍이 그리스도는 가르치는 직무를
사도단 구성원인 사도들에게 주셨다(마태 28:18-20). 사도단 단장이요(교회헌장 18-19) 최고 목자 (요한 21:15-17) 시몬 베드로에게는 형제들인 모든 사도들을 신앙안에 견고케 하는 임무까지 맡겼다(루가22:32). 교회 안에서 주교직 계승하는 주교들과 교황 그리스도께서 사도단에게 주신 교도권을 이어받고 있다(계시헌장 7). 교도권은 계시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꺼내어(마태 13:52) 성령 빛으로 밝혀 줌으로써 신앙 열매를 맺게 하고 오류로부터 신앙 진리 지키는 역할을 한다. 교회는 교도권을 행사하여 새로운 공적(公的)계시를 신앙 유산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교회헌장 25)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나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 대한 유권적 해석임무"(계시헌장 10) 이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높은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 봉사하고 전해진 것만을 가르치며 그것을 거룩히 보존하고 성실히 진술한다.

  
교도권은
성직자단의 교도권과 평신도단의 교도권으로 구분되고, 성직자단의 교도권은 다시 행사상 장엄교도권과 통상교도권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교황 교좌(敎座)에서 선언하거나, 주교단 공의회 모여서 선언할 경우이다. 선언 내용이 신앙 도덕 관한 것이면 그르칠 없다. 후자는 주교들의 유권적인 일반교시를 말하는데,이는 회칙 형식이나 지역 주교단 공동교서 형식으로 발표된다. 이밖에도 주교나 사제들의 설교, 신학자들의 교수 등을 통해서도 교회의 교도권이 표현된다.

  
평신도단의 교도권은
평신도 성직자단의 교도권을 통한 가르침을 받아들일 아니라 이를 세속문화에 적응시키고 이해를 깊이 함으로써 진리 옹호 · 설명하는데 공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순종의 동기는 교황이나 주교들이 오류를 가르치는 일이 없도록 도와 주시듯이, 평신도들이 오류를 믿는 일이 없도록 또한 도와 주신다. 주교단 오류를 제시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평신도단이 오류에 동의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삼위일체, 원죄라는 말은 성서에 없는데도 이를 의미하는 구절이 있다면서 이들은 인정함. 그러나 연옥은 인정하지 않음.

 

천국 = 작은 죄도 있다면 들어갈 수 없는 곳

지옥 = 영벌이니 죄를 없애주는 일은 없는 곳

 

è 천국 지옥 관련 참고 성구

묵시 21,27

그러나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그 도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흉측한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도 결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도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다만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이사 25,8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 야훼, 나의 주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주시리라. 이것은 야훼께서 하신 약속이다.

 

1고린 3,13-15

13 이제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서 각자가 한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줄 것입니다.  

14 만일 그 기초 위에 세운 집이 그 불을 견디어내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15 만일 그 집이 불에 타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음.

 

마태 12,32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내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있다는 말씀

 

결국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함.

구약에서도 죽은 후에도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구절이 있음.

 

2마카 12,43-45

 

43 그리고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은 이천 드라크마를 모아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4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45   그가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마카베오서는 가톨릭에서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부터 정경(正經)으로 되었지만, 유태교 및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현재도 외경(外經)으로 되어 있다

 

개인생각 : 신교에서는 이 부분 때문에 마카베오서를 정경에서 제외시킨 것으로 보임

 

By 제임스 기본스 추기경님 저서 교부들의 신앙

연옥

http://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2422&keyword=연옥&gubun=01&gubun=01

 

한자煉獄 라틴어purgatorium 영어purgatory

 

가톨릭에 있어서의 연옥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죄를 풀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불에 의해서 죄를 정화(淨化)한다고 하는, 천국과 지옥(地獄, infernum)과의 사이에 있는 상태 또는 장소를 말한다. 대죄(大罪)를 지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지만, 대죄를 모르고서 지은 자 또는 소죄(小罪)를 지은 의인의 영혼은 그 죄를 정화함으로써 천국에 도달하게 된다. 바로 이일시적인 정화’(satispassio)를 필요로 하는 상태 및 체류지가연옥이다. 가톨릭의 연옥론(煉獄論)은 하느님의 성성(聖性), 정의, 예지, 자비를 명백히 보여주며, 인간을 절망과 윤리적인 경솔함으로부터 지켜주고, 더구나 죽은 사람도 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증하여 줌으로써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고대 및 중세의 카타리파(Cathari), 발두스파(Waldenses) 등 이단자들은, 죽은 자를 위한 전구와 연옥의 존재를 부정하였고, 루터는연옥론철회≫(Widerruf vom Fegefeuer, 1530)에서 연옥신앙을 부정하였다. 로마 교회가 연옥에 관한 가르침을 정식으로 정의내린 것은, 리용 및 피렌체의 합동공의회(1274년 및 1439), 그레고리오 13세 및 우르바노(Urbanus) 8세의 신경(信經),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여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였다.

 

연옥의 영혼은, 이 세상에서의 경우 은총의 도움에 의해서 행하여진 애덕(愛德)에 따른 통회(痛悔)와 기도에 의하여 소죄가 정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옥에 있어서도 소죄가 정화된다. 하지만 죄에 대한 슬퍼함이 벌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즉 여기서는 적극적으로 착한 일을 하거나 공덕을 쌓는 상태가 아니라, 단지 하느님의 정의에 의해서 내려진 벌의 고통을 견디는 것만으로 정화와 속죄가 되는 상태이다. 내세(來世)에서는 공덕을 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연옥의 영혼은, 신이 내리는 고통을 즐겁게 수용함으로써 죄에 대한 유한적인 벌의 보상을 하면 확실하게 정화되는 것이다. 연옥의 고통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고, 각자의 죄에 상응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 고통의 기간이나 엄중함도, 지상의 신자의 기도와 선업(善業) 즉 신자의 전구에 의해서 단축 또는 경감된다.

 

그 다음 연옥의 영혼은, 신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므로, 고통이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신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연옥의 영혼은 지상의 사람들을 위하여 전구할 수가 있다. 그들은, 지상의 신자에게 연옥의 영혼의 전구를 기도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연옥의 영혼에 대하여 성 토마스는, 연옥의 영혼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지는 못하며, 또한 지상의 일에 관하여 지식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us, 1542∼1621), 수아레스(Francisco de Suarez, 1548∼1617), 구트베를레트(Konstantin Gutberlet, 1837∼1928), 셰벤(M.J. Scheeben, 1835∼1888), 바우츠(Bautz), 두르스트(B. Durst)등 신학자는, 연옥의 영혼이 그 형벌 상태 아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에게는 공덕이 없지만, 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공심판(公審判) 뒤에 연옥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만, 하나하나의 영혼에 있어서는 그 벌로부터 해방되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본다. 정화가 끝나면 영혼은 곧 천국으로 들어가 버린다.

 

   [참고문헌] F. Schmid, Das Fegfeuer, 1904 / M. Landau, Holle und Fegfeuer im Volksglauben, 1909 / J.P. Kirsch, Sprazzi, d'oltra tomba, Roma 1924 / V. Kerns, The Traditional Doctrine of Purgatory, IrEccl Rec 80, 1953 / M. Schmaus, Vom den letzten Dingen, Aufl. 5, Munich 1959 / John A. Hardon, S.J., Modern Catholic Dictionary, New York 1980.

3.   고해성사

관련 성구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예수님께 있음

마태 9:1-8

 

1.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è 이 사죄권을 사도들에게 부여하심.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주교들과 그 협조자인 신부님들에게 사죄권은 계승됨.

 

마태 18: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요한 20,19-23

21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0 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21 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가톨릭대사전

http://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233&keyword=%EA%B3%A0%ED%95%B4%EC%84%B1%EC%82%AC&gubun=01

 

한자 告解聖事 라틴어 Sacramentum poenitentiae

영어 Sacrament of penance

 

성세성사를 받은 신자로 하여금 성세받은 이후에 지은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 그 용서를 받으며 교회와 화해하도록 해 주는 성사. 인류를 교회로 불러 모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간은 성세성사를 통하여 원죄와 자신이 지은 죄(본죄)의 사함을 받고 교회안에 하느님의 자녀로 탄생한다. 그러나 성세를 받은 신자에게도 악으로 이끌리는 경향은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다시 범죄하게 된다. 이런 사정을 잘 아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를 위해 고해성사를 세우셨다. 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사죄권(赦罪權)을 가지셨고(마태 9:1-8) 이 권한을 교회의 지도자들인 12사도들에게 주셨다(마태 18:18). 이는 지상(地上)에서 '맺고 푸는' 권한 행사의 효과가 하늘에서도 그대로 유효한 권한이요, 공동체를 해치는 행위를 한 형제들에게 행사하는 권한이다. 이 권한은 요한복음 20 19-23절에서 자세히 언급되고 있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 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사도들의 이 사죄권은 다시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과 그 협조자인 신부들에게 계승됨으로써 지상에서 죄 사하는 그리스도의 직무가 존속되고 있다. 그러나 고해성사의 회수, 사죄(赦罪)의 대상이 되는 죄의 종류, 참회의 방식 등 그 구체적인 형태는 교회 역사상 조금씩 달랐다.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고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칠성사의 하나로서 성세받은 이후 범한 사죄(死罪)를 용서해 주는 제도이므로 구원을 위하여 필요하다. 그 필요성의 정도는 성세의 경우와 같아서[화세] 위급할 때에는 고해성사를 받으려는 원의(願意)를 가짐으로써 실제로 성사를 받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다. 고해성사를 이루는 표지는 참회자의 통회, 고백, 보속과 고해신부의 사죄이다. 이를 고해성사가 집행되는 순서에 비추어 볼 때 참회자는 먼저 양심적으로 성찰을 하여 지은 죄를 생각해 내고, 그 죄를 깊이 뉘우치는 통회를 하며, 다시는 이같은 죄에 빠지지 않기로 정개(定改)하고 나서 고해신부 앞에 나아가 죄의 고백을 한다. 그러면 고해신부는 사죄를 하고 보속을 정해 준다. 참회자는 받은 보속을 실천함으로써 고해성사가 끝난다.

 

 통회에는 죄로 인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리게 되었음에 주목하고 이 점을 크게 마음 아파하는 상등통회가 원칙적인 모습이나 이와 달리 범죄의 결과 처벌을 받게 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뉘우치는 하등통회도 고해성사의 유효요건이 된다. 참회자는 성세이후 범한 죄 가운데 고해로 용서받은 적이 없는 사죄를 기억나는 대로 모두 고백할 의무가 있으며 경죄(輕罪)의 고백도 권장하고 있다(교회법 제988). 고백한 내용은 고해비밀로 보장된다. 죄에 대한 보속을 함으로써 참회자는 하느님의 정의의 엄격함과 죄의 무게를 체험하며 악으로 이끌리는 경향을 거슬러 싸워 죄를 피하고 죄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깊이 참여하게 된다. 고해성사의 집전자는 사제이며(교회법 제965) 그가 사죄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을 뿐 아니라 재치권을 부여받아야 한다(교회법 제966). 그 행사는 사죄경을 염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며, 사죄권의 범위는 참회자의 통회를 전제할 때 죄의 종류나 회수를 묻지 않고 적용되는 것이 원칙이다(예외 교회법 제982). 한편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연령에 달한 모든 신자는 적어도 일년에 한 번 그들의 사죄를 고백하여 용서받을 의무가 있다(교회법 제989). 이와 같이 고해성사는 참회자의 통회, 고백 및 보속행위와 사제의 사제행위로 이루어진 결과에서 참회자는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받고 교회와 화해하게 된다.

 

 

 

성전(聖傳) 무시 ==> 성경에 없으면 믿지 않음

http://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7523&keyword=성전&gubun=04&gubun=04

 

한자聖傳  영어 Tradition

 

이어받은 생각이나 행동 또는 태도의 유형을 가리킨다. 가톨릭교회의 성전은 주 그리스도와 성령으로부터 사도들에게 위임되었고 교회를 통해 기도와 신경, 전례 예식, 권위 있는 저술들(교황 및 교황과 일치한 주교들)로 사도들의 후계자들에게 위탁된 하느님의 말씀이다.

 

 사도들의 성전은 마지막 사도가 죽을 때까지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삶에 실천한 방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사도들의 성전과 성서는 함께 교회에 위탁된 단일한 하느님 말씀의 거룩한 유산을 이룬다. 그러므로 성서와 사도들의 성전과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교도권은 전체적으로 어떤 특정한 순간에 우리에게 하느님의 계시를 전해 준다. 「교리 교육 지침」에서 발췌한 다음의 글은 교회 안에서 전통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 준다.

 

  “신앙은 말과 행위로 표현된다. 우리가 믿는 것은 성전과 성서 안에서 발견되며 성전과 성서는 함께 교회에 위탁된 단일한 하느님 말씀의 거룩한 유산을 이룬다. 성서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다. 성전이란 주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위탁하신 하느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을 후계자들에게 온전히 전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진리의 성령의 비추심을 받아 설교로 충실히 보존하고 설명하며 널리 전파하도록 한 것이다.

 

사도들로부터 전해지는 성전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회 안에서 교회에 의해 그 뜻이 밝혀진다(1고린 12,2-3 참조). 신앙인은 연구와 관상을 통해 통찰력을 키워간다. 그와 같은 성장은 그들이 경험한 영적인 것들을 잘 이해하고 주교들의 승계를 통해 진리의 확실한 선물을 받은 사람들의 설교를 통해 이루어진다.

 

신앙인들의 공동체가 이해의 폭을 넓혀 가면서 그 신앙은 신경과 교의, 도덕 원칙들과 가르침으로 표현된다. 교의적 형식문들의 의미는 더욱 명확하게 표현되거나 더욱 발전되더라도 항상 교회 안에서 진리로 남으며 항구하게 머문다. 그러나 교의적 형식문들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의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그 형식문들은 때로 교회의 교도권에 의해 제안되고 승인된 새로운 형식문으로 바뀌기도 한다. 새 형식문들은 동일한 의미를 더욱 분명하고 완전하게 표현한다.

 

우리가 믿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행위들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문제의행위들이란 신앙 공동체에 봉사하거나 교회의 보편적 사명 안에서 자발적으로 봉사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기 위해 바쳐지는 경배(특히 성체성사 거행을 가리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 안에서 당신 교회에 말씀하시며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신다)와 기도를 가리킨다(에페 4,11-12 참조). 우리의 행동이 우리가 하는 말의 성실성을 입증하듯이 우리의 말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가톨릭 신도들은 교리 교육을 통해 자신들이 하는 행동과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할 때 침묵하지 않고 신앙에 관해 쉽게 말할 수 있도록 배운다.

 

신앙은 시각 예술, 시와 문학, 음악, 건축, 철학, 과학이나 기술을 통한 성취에서도 표현될 수 있다. 이들 역시 하느님 현존과 하느님의 지속적인 창조 활동의 표지들일 수 있고, 신앙인들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자신들의 신앙에 관해 세상에 증거하는 도구들일 수 있다”(59).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례가 교회 성전(聖傳)의 기관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의 신학자들은 교회 가르침의 정확한 성격, 예를 들어 세례성사의 정확한 성격을 찾아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전례를 연구하고 있다. 고고학, 전례(典禮 考古學 Archeology, Liturgical), 교도권(敎導權 Magisterium), 교의(敎義 Dogma), 데이 베르붐(Dei Verbum) 참조.

 

출처 : [전례사전]

2.   성경은 역사서가 아니라 우리를 진리로 이끄는 책임

그러나 신교에서는 성경에 없는 내용은 인정하지 않음.

이런식으로 논박하자면 사실 끝도 없음.

è  베드로 사도의 묘가 로마에 있는데도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는 기록이 신약에 없음. 그럼 이들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로마가 가지도 않았던 것이고 죽고나서 시체만 로마에 가져온 것인가? 사실은 신교측도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서 순교한 사실 인정함. (가톨릭에서 파문당한 신부 한스 큉은 자신의 저서 가톨릭의 역사 P.35 에서 서기 90년경 클레멘스 편지 110경 안티오크의 주교 이그나티우스는 베드로가 로마에 체류했으며 거기서 순교했다고 증언하고 있다고 쓰고 있음. 그러나 이 사람의 글은 결국은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기 위해 쓴 글임)

è  베드로 사도가 천국에 갔다는 기록이 성경이 없으니 베드로사도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è  베드로 사도가 화장실 갔다는 기록이 없으니 베드로 사도는 화장실도 안 간 것인가? …

è  신약에 당시 동방에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으니 고구려는 당시 없었던 나라이었던가???? 

è  성경집필 당시에는 지금저럼 낙태 방법등이 다양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낙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데 성경에 없으니 낙태란 존재하지 않는 무엇인가…. 등등

 

3.   신교신자들은 목사님들은 하느님의 기름을 받은 하느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가톨릭 교황님은 사람들이 뽑은 것이라고 함.

4.   가톨릭을 예수님께서 비난하셨던 율법주의자 같다 하면서 정작 지금은 저들이 바로 율법주의자들의 행태를 보이고 있음. 구원의 조건을 믿음만으로 공식화하고 있고 믿음으로 자신들은 의로워진다고 생각하고 있음.

 

-     예수님 당시 율법의 요청은 다음과 같았음.

 

a. ~ 을 하라.

b. ~ 을 하지 말라

 

이에 따라 ~ 을 하지 않은 사람은

~ 을 하지 않았으니 의롭다고 생각했고,

~ 을 하라를 행한 사람은

~ 을 했으니 의롭다고 생각한것.

 

사실 욥도 이런 생각으로 하느님께 항의했던 것( 13,26에서 욥은 자기가 젊었을 때 몇가지 잘못을 저질렀음을 시인한다. 욥은 자기가 무죄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토록 심한 고통을 받아야 할 만한 범죄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율법주의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심

 

마태 5,20,27-28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

율법의 명령, 금령을 따랐다고 충족하지 않다고 하심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마음으로 간음한 것에 대한 말씀은 우리안에 악의 뿌리가 있다는 말씀으로 보임.

 

단지 행동화 되지 않았다는 것 뿐이지 우리를 선으로 이끌지 않는 무엇이 우리에게 있으니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지 말고 우리의 한계성을 인정하라는 것으로 보임.

 

우리의 한계성을 부인할 때 우리 스스로를 우상으로 만들고 마귀가 했던것처럼 하느님이 되려하고, 우리 스스로가 자신도 모르게 구원의 조건을 하느님처럼 정하고 그대로 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사실상 하느님 역할을 하려고 하는 것.

 

è 그렇다면 우리안의 악의 뿌리가 있다는 것이 우리 잘못인가? 처음부터 악의 뿌리 때문에 죄를 짓는다면 이것은 우리 자신의 잘못이 아니잖아?

è  그런데 우리에게는 선의 뿌리도 있다.

è  결국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우리 자신들에게 맡겨진 것임. 선택의 자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

è  위험하게 왜 우리가 선택하게 하시냐고 자유를 주셨냐고 항의하는 자들이 있겠지만 사실 이런 자들은 자유를 주지 않았다면 또 항의할 것.

è 왜 자유를 주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유없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불평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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