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방주와 무지개 (창세 9:1~2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5-13 조회수3,487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방주와 무지개

(창세 9:1~29)

1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말씀하셨다. '많이 낳아, 온 땅에 가득히 불어나거라. 2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길짐승과 바닷고기가 다 두려워 떨며 너희의 지배를 받으리라. 3 살아 움직이는 모든 짐승이 너희의 양식이 되리라. 내가 전에 풀과 곡식을 양식으로 주었듯이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 4 그러나 피가 있는 고기를 그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피는 곧 그 생명이다. 5 너희 생명인 피를 흘리게 하는 자에게 나는 앙갚음을 하리라. 어떤 짐승에게도 앙갚음을 하리라.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에게도 앙갚음을 하리라. 6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니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제 피도 흘리게 되리라. 7 너희는 많이 낳고 불어 나거라. 땅 가득히 퍼져 땅을 정복하여라.' 8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9 '이제 나는 너희와 너희 후손과 계약을 세운다. 10 배 밖으로 나와, 너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들짐승과 그 밖에 땅에 있는 모든 짐승과도 나는 계약을 세운다. 11 나는 너희와 계약을 세워 다시는 홍수로 모든 동물을 없애 버리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홍수로 땅을 멸하지 않으리라.' 12 하느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너뿐 아니라 너와 함께 지내며 숨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계약의 표는 이것이다. 13 내가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워진 계약의 표가 될 것이다. 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15 나는 너뿐 아니라 숨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동물을 쓸어 버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나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과 땅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을 기억할 것이다.' 17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이것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세워진 계약의 표이다.' 하고 다시 다짐하셨다. 18 배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었다.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다. 19 이 세 사람이 노아의 아들인데, 온 세상 사람이 그들에게서 퍼져 나갔다. 20 한편, 노아는 포도원을 가꾸는 첫 농군이 되었는데, 21 하루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천막 안에 누워 있었다. 22 마침 가나안의 조상 함이 아버지가 벗은 것을 보고 밖에 나가 형과 아우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23 셈과 야벳은 겉옷을 집어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 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 드렸다. 그들은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 않았다. 24 노아는 술이 깨어 작은 아들이 한 일을 알고 25 이렇게 말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에게 천대받는 종이 되어라.' 26 그는 또 말했다. '셈의 하느님, 야훼는 찬양받으실 분,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어라. 27 하느님께서 야벳을 흥하게 하시어 셈의 천막에서 살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어라.'28 노아는 홍수가 있은 뒤에도 삼백 오십 년이나 더 살아, 29 모두 구백 오십 년을 살고 죽었다.

 

하느님은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들의 참된 안식을 위해 더러운 죄들과 그 죄의 세력들을 모두 깨끗이 청소를 하시고 오직 당신의 은혜로 창세전에 택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선물하실 것임을 우리는 노아의 홍수 사건 속에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청소하고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 올리시는 그 은혜의 수여(授與)방법이 하느님 자신의 투신(投身), 즉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의 익사(溺死)라는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 노아의 홍수 심판의 근거로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막무가내의 혼인을 한 것으로 제시를 한 것은 성경에서 혼인 관계가 담고 있는 내용이 바로 하느님의 은혜의 계약이기 때문에 그 계약의 왜곡은 곧 은혜에서의 유기(遺棄)가 되는 것이므로 홍수 심판의 근거로 혼인 관계의 왜곡이 심판 전에 전제(前提) 되었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성경에서의 혼인 관계나 혼인 계약이 담고 있는 것은 우리 하느님의 백성들이 독수리가 날개로 자신의 새끼를 덮어 인도하는 것 같은, 신랑이 신부를 옷자락으로 덮어 자신의 신부를 정결케 하여 혼인 관계로 들어가는 것 같은 그러한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가 하느님의 처소가 되고 하느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셔서, 다른 말로 삼위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들의 연합으로 우리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이 누리시는 하늘의 모든 것들을 함께 누리게 되는 은혜의 계약 입니다.

하느님은 노아의 홍수 사건을 통해 그 하느님의 덮으시는 은혜, 불가항력(不可抗力)적 은혜가 무엇인지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홍수는 혼인관계의 왜곡으로 시작해서 은혜로 완성이 되는 참 혼인 잔치로 결론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읽었던 본문의 내용이 바로 노아의 홍수 사건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신랑이신 하느님과 더러운 세상과 함께 죽어야 마땅했으나 은혜로 정결함을 입게 된 노아와의 혼인잔치 장면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은혜로 방주에 넣어 심판에서 건져내신 노아와 그의 식구들에게 축복을 하십니다.

그리고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당신의 계약을 주십니다. 다시는 홍수로 인간들을 멸하시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에 근거한 혼인계약이 체결이 되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노아의 만취(滿醉)사건입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 벗은 채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중 이 노아의 벗은 모습을 보고 자기의 두 형제에게 함으로 아비에게 저주를 받는 것으로 노아의 홍수 사건이 끝납니다. 도대체 이 이야기가 왜 노아의 홍수 사건의 결론 부분에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냥 하느님과 노아와의 혼인계약으로 끝이 나는 것이 더 깔끔할 것 같지 않으세요?

'심판 속에 꽃피는 은혜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노아의 홍수가 이런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일까요? 이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바로 노아의 홍수 사건 전체를 要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을 보시면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포도주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가 붙어 있습니다. 그 전에도 계속 마셔왔던 포도주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노아가 이미 포도주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노아는 홍수 이전의 패역한 세대와 방불한 상태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종종 술 취함을 패역한 세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기록을 합니다.

(에페 5:8) 8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루가 17:2728)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 간 바로 그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마침내 홍수에 휩쓸려 모두 멸망하고 말았다. 28 또한 롯 시대와 같은 일도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짓고 하다가

성경은 이렇게 패역한 세대의 특징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노아는 그 무시무시한 홍수를 경험하고도 다시 이전의 패역한 세대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만취(滿醉)사건은 홍수 이전 세대와 홍수 이후 세대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었다는 한 예시(例示)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떠한 협박이나 경고에도 절대 스스로 변화될 수 없이 완전한 타락을 해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노아의 아들 함이 본 것입니다. 그게 뭐 그리 큰 잘못이라고 노아는 함과 함의 자식 가나안을 저주했을까요? 아비가 자기 자식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았다고 그 사랑하는 아들과 손자에게 종의 종이 될 것이라는 무서 운 저주를 내렸습니다. 그 결과 함의 후손인 가나안 사람들은 실제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때 노예로 살았고, 역사적으로도 마케도니아, 로마 등의 노예로 살았으며 그 후손인 아프리카 흑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종의 종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잘못은 자기가 저 지른 것이잖아요? 그런데 왜 자기 자식을 저주합니까?

그 구절에서 함이 노아의 벗은 몸, 즉 아담의 벌거벗은 부끄러움과 같은 그 노아의 벌거벗은 죄를 보았다는 데에 쓰인 단어가 라아입니다. 그 히브리어 라아는 단순히 쳐다보는 것을 넘어서 즐기며 조롱하며 보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어 알렸다라는 단어는 와우 계속 형으로 노아의 아들 함이 노아의 벌거벗은 수치를 즐기며 보고 바로 이어서 형제들에게 그 아비 의 부끄러움을 누설하고 설명해 준 것입니다. 알리다’ ‘와약게드라는 히브리어는 배반하다, 재미로 해설하다, 누설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여기에 이 에피소드의 해석의 키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이 담고 있는 중심 메시지가 심판 속에 꽃 피는 은혜의 구원입니다. 모두가 다 심판의 홍수에 빠져 죽어야 하는데 그 중에서 몇 사람이 하느님의 은혜로 方舟 속으로 들어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뭔가 다른 사람들 보다 착하고 성실하고 열심을 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하느님께서 그들의 더러움을 덮어주신 것입니다. 그게 68절의 '그러나 노아만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 ’라는 구절이 가진 메시지였어요. 성경은 하느님의 은혜는 바로 그러한 덮어줌의 은혜라는 것을 노아와 세 아들이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통해 재차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함과는 반대로 노아의 축복을 받은 셈과 야벳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비의 부끄러운 죄를 뒷걸음질쳐 들어가 덮어준 것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의 은혜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함과 같은 자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 이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담고 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23절의 덮다라는 단어 캇싸는 단순히 덮어서 가리다라는 뜻도 있지만 죄를 가리워서 용서하다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시편 32:1) 1 복되어라, 거역한 죄 용서받고 죄허물 벗겨진 자,

여기서 용서받고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캇싸입니다. 셈과 야벳은 바로 인간의 죄를 덮으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모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덮어줌의 은혜는 창세기 초반부터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가장 처음 나타난 곳이 하느님께서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를 無罪한 짐승의 가죽으로 덮어주신 치마 사건입니다. 벌거벗은 노아와 벌거벗은 아담, 이 둘은 모두 부끄러운 죄인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은혜로 그 부끄러움을 그냥 덮어주시고 그들을 救援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敎會입니다.

그 덮어줌의 은혜는 출애굽 당시 過越節 어린양의 피로 다시 나타납니다. 죽음의 使者가 장자들을 모두 죽이며 행진을 하고 있는데 무죄한 과월절 어린양의 피가 덮인 집은 그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과월절인 것입니다. 그 모습은 출애굽기 33장에 또 다른 그림으로 나타납니다.

 

(출애 33:1823) 18 모세가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자 19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내 모든 선한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며, 야훼라는 이름을 너에게 선포하리라. 나는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엾이 여긴다.' 20 그리고,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 21 야훼께서 이르셨다. '여기 내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서 있어라. 22 내 존엄한 모습이 지나갈 때, 너를 이 바위굴에 집어 넣고 내가 다 지나가기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가리리라. 23 내가 손바닥을 떼면,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만은 볼 수 있으리라.'

죄인은 절대 하느님을 마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모세도 죄인인 상태에서 하느님을 뵙게 되면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그 때 하느님께서 그를 당신의 손으로 덮으시고 지나가심으로 그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구절을 읽어 드렸느냐 하면 이렇게 죄인의 부끄러움을 덮는 덮개는 하느님 자신이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 덮개가 성막 안에서는 시은(施恩) () 위의 제물의 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실수와 실패를 상징하는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 항아리를 법궤 뚜껑이 덮어 버리고 그 위에 무죄하고 무흠한 제물의 피가 부어져 그 전체를 가리는 것을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 ‘시은(施恩)()’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심판의 자리에서 건짐을 받게 되 는 것입니다.

그 덮개는 다시 골고다 언덕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어집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부어져서 우리가 가려지고 하느님의 눈에는 우리가 그 분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노아의 방주를 한번 떠 올려 보세요. 하느님의 백성들을 품고 그들을 저주의 비로부터 덮어주는 방주가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가려져야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덮어줌의 은혜인 것입니다.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그 덮어줌의 은혜를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로마 4:68) 6 그래서 다윗도 선행과는 관계없이 하느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7 '하느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두신 사람들은 행복하다. 8 주께서 죄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도 행복하다.'

 

이게 바로 노아의 방주가 상징하고 있던 그림이며 노아와 세 아들의 에피소드가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나 열심으로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참선(參禪)이나 고행(苦行)이나 수도(修道)로도 이를 수없는곳이 구원의 문입니다. 우리 인간 측에서 내어 놓을수 있는 가장 최선의 열심과 노력도 성경은 더러운 옷이라 합니다.

(사편 64:6) 6 '누가 감히 우리의 비밀을 알랴?' 하지만,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보시는 이가 알아채시니

성경은 이렇게 우리가 ()’라고 내놓는 것조차도 모두 다 더러운 옷이라 합니다.

(이사 59:56) 5 독사의 알이나 품어 까려는 것들, 거미줄이나 치려는 것들, 그 알을 하나만 먹어도 사람은 죽고, 눌러 터뜨리면 독사가 나온다. 6 그들이 치는 거미줄로는 옷도 만들지 못하고 천을 짜서 몸을 두르지도 못한다. 그들이 한다는 짓은 잔학뿐이요 손으로 한다는 짓은 횡포뿐이다.

 

인간들이 하느님 앞에 내어놓는 것은 전부 거미줄 같은 옷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옷으로는 자기를 가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지어주시는 당신의 살과 피로 지으신 의 흰옷을 입어야만 우리를 가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져 이렇게 우리가 예수를 믿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덮어줌의 은혜에서 버려진 자들은 어떻게 되나요?

(묵시 6:1517) 15 그러자 세상의 왕들과 고관들과 장성들과 부자들과 세력자들과 모든 노에와 자유인들이 동굴과 산의 바위 틈에 숨어서 16 산과 바위를 향하여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서 옥좌에 앉으신 분의 눈을 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숨겨 다오. 그리고 어린 양의 진노를 면하게 해 다오. 17 그들의 큰 진노의 날이 닥쳐왔다. 누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덮어줌의 은혜로 덮지 않은 자들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산과 바위에게 하느님의 진노의 눈으로부터 우리를 좀 숨겨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 그 자리에서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 자신이 우리를 덮으심으로 우리가 그 진노의 멸망에서 건져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이 전체의 이야기가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보여주신 구름 속의 무지개에 모두 다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무지개라는 단어 케쉐트는 원래 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활이 하늘을 겨누고 있는 모양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홍수 후에도 인간의 죄가 여전히 악하기에 다시는 홍수로 인간들을 멸하시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그 말은 다소 알레고리적 해석이긴 하지만 하느님 당신께서 화살을 맞으시고 그의 백성들을 살려 주시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자해(自害)사건, 하느님 당신의 투신(投身) 사건인 십자가에 의해서만 하늘과 땅이 하나로 연결이 될 수 있음을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있는 무지개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무지개는 구름과 빛의 합작품입니다. 그래서 그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났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름은 하느님의 영광의 현현을 나타내는 것이라 했지요? 그 하느님은 죄를 절대 묵과하실 수 없는 순결하고 온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에게는 홍수 심판이 무서운 하느님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 광야에서 보여 졌던 것처럼 구름기둥은 항상 불기둥을 그 안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 구름과 빛의 합작품이 바로 무지개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름 사이로 무지개가 뜨는 것입니다. 심판의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어떤 한무리를 구원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무지개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피로 당신 백성의 더러움을 다 가리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그 구름 속의 무지개를 통해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 13절로 가볼까요

 

(창세 9:1316) 13 내가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워진 계약의 표가 될 것이다. 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15 나는 너뿐 아니라 숨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동물을 쓸어 버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나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과 땅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을 기억할 것이다.'

잘 보시면 무지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계약의 표징으로 주신 것이기도 하시지만 그 무지개는 하느님께서 두시고 하느님께서 보시는 무지개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한 세상을 보실 때에는 노아때와 마찬가지로 저주와 심판의 구름으로 다 쓸어 버리셔야 하지만 하느님께서 세우신 하느님의 무지개를 보시고 어떤 무리들에게서 그 저주와 심판의 물을 거두시겠다는 계약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무지개는 하느님 백성들의 죄와 허물을 하느님의 눈으로부터 가려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무지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세상과 함께 모두 다 멸망시켜 버리셔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그를 믿는 우리를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아의 홍수 자체의 목적은 인간들의 개선(改善)이나 변화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의 목적은 하느님의 투신과 자해로 거저 가리움을 받게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부어지는 하느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신실하심, 자신을 죽이고 비워 원수들을 살려내시는 하느님의 투신(投身)이야말로 하느님의 성품과 속성을 대표하는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이며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그 무지개가 하늘나라, 하느님 보좌에도 등장하는 것입니다.

 

(묵시 4:23) 2 그러자 곧 나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보니 하늘에는 한 옥좌가 있고 그 옥좌에는 어떤 분이 한 분 앉아 계셨습니다. 3 그분의 모습은 벽옥과 홍옥 같았으며 그 옥좌 둘레에는 비취와 같은 무지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에제 1:28) 28 사방으로 뻗는 그 불빛은 비 오는 날 구름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보였다. 마치 야훼의 영광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땅에 엎드리자, 말소리가 들려 왔다.

하느님의 顯現이나 하느님의 영광의 보좌에 이렇게 무지개가 등장하는 것은 노아 홍수 사건에서의 하느님의 무지개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더욱 확고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본질상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며, 오래 참으시며,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시면서까지 원수를 사랑해 주시는 온유한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나라에서는 모든 존재가 바로 그 십자가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삼아 살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무지개가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의 무지개,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은혜가 이 땅에 가시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게 될 것인지에 관해 좀 더 구체적인 암시가 본문 4절부터 6절까지에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창세 9:46) 4 그러나 피가 있는 고기를 그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피는 곧 그 생명이다. 5 너희 생명인 피를 흘리게 하는 자에게 나는 앙갚음을 하리라. 어떤 짐승에게도 앙갚음을 하리라.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에게도 앙갚음을 하리라. 6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니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제 피도 흘리게 되리라.

여기 보시면 하느님께서 피를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피는 반드시 피로 갚아야 한다고 천명(闡明)하십니다. 이 말은 복수(復讎)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하느님 백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생명에 상응하는 피가 흘려져 야 함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12장에도 똑같은 구절이 있지요?

(신명 12:23) 23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피만은 먹지 못한다. 피는 곧 생명이라, 생명은 고기와 함께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절들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반드시 흘려져야 함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담아 제사 제도가 주어졌던 것이고 그 제사는 참 제사인 십자가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 9:12,22) 12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 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22 율법에 따르면 피로써 깨끗해지지 않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일이 없이는 죄를 용서받지 못합니다.

정확하지요? 노아의 홍수 사건에 왜 갑자기 피가 생명이라는 말씀이 나오는지 잘 아시겠지요?

심판 속에 꽃피는 하느님의 은혜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이 무지개로 나타난 것이며, 노아와 노아의 세 아들의 에피소드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이 덮여지는 것입니다.

 

(히브 9:12,22) 12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 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22 율법에 따르면 피로써 깨끗해지지 않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일이 없이는 죄를 용서받지 못합니다.

갈라디아서에도 이 노아의 방주와 무지개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갈라 1:4) 4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내시려고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악한 세대에서, 다른 말로 홍수에서 건지시기 위해 자기 몸에다가 화살을 쏜 것입니다. 좀 더 확실하게 로마서로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로마 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홍수 속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품어 안고 자기가 대신 익사함으로 그 품어 안은 백성들을 살려내는 방주와 예수 그리스도를 그려 보세요. 방주는 정확하게 우리를 품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 방주로 덮여있는 들은 절대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창세 7:1) 1 야훼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식구들을 다 데리고 배에 들어가거라. 내가 보기에 지금 이 세상에서 올바른 사람은 너 밖에 없다.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령을 하시는 것으로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동사 들어가다라는 뜻보다는 들어오다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일 뿐 아니라 문맥상으로 보더라도 들어오다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게 왜 중요한가하 면 하느님께서 방주로 들어오라고 명령을 하셨다는 것은 그 곳에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직접 방주가 되셔서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을 품으시고 저주의 비를 대신 맞아 주시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들어오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권고는 창세기에서부터 요한묵시록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70인 역에서 그리스어 엘코마이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 단어가 요한묵시록 22장에 나옵니다.

(묵시 22:17) 17 성령과 신부가 '오소서!'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도 '오소서!' 하고 외치십시오. 목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마시십시오.

그 단어는 주님께서도 즐겨 쓰시던 단어였습니다.

(마태 11:28)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이사야서에서도 들어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사 1:18) 18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렇게 내게로 오라는 하느님의 초청은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에 이르기까지 600번이 넘게 나옵니다. 하느님은 이토록 애절하게 죄인들에게 초청의 메시지를 띄우십니다. 그런데 죄인들이 하느님께로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방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한 무리에게 은혜를 부어 당신의 은혜로 그들을 방주로 밀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방주로 밀려들어가게 된 사람들은 반드시 그들의 순종의 행위가 동반이 된다는 사실입니 다.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부으셨지만 노아를 반짝 들어서 방주에 억지로 밀어 넣으시지는 않으셨지요? 하느님의 은혜가 부어지자 노아에게서 순종의 몸짓이 나왔습니다. 노아가 자기 발로 자신의 식구들을 데리고 방주 속으로 들어 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방주를 만들어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아마 한순간에 노아가 지은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멋진 방주를 지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를 위해서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으면서 정말 120년간 늘 기쁨과 행복 속에서 방주를 지었을까요? 여러분 신앙생활 하는데 정말 늘 기쁨과 행복만 있던가요? 노아는 방주를 지으면서 수많은 의심과 원망과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왜 비도 안 오는 세상에 이런 커다란 배를 지어야 할까? 이 배를 짓느라 나의 인생은 완전히 고단한 인생이 되어 버렸다. 왜 꼭 내가 이것을 지어야 하나? 사람들의 저 손가락질을 하느님은 왜 안 막아주실까?’ 등등 노아는 수많은 의심과 불평과 원망 속에서 방주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나약한 노아를 통해 하느님은 방주를 완성해 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노아는 하느님의 신실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그 분의 사랑과 은혜를 직접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이 누구이시며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자 노아는 서슴없이 방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가 자기 식구들을 이끌고 하느님의 말씀을 좇아 방주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의 집이나 전답이나 가구들이나 그가 자신을 위해 이 세상에서 아끼고 가꾸었을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걸 다 가지고 방주로 들어갈 수는 없었으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방주로 들어와 있는 자라면 우리는 우리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쌓아두었던 모든 세상의 힘들을 놓아버리는 행위가 반드시 우리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그러한 세상 정욕이나 그 정욕을 채워줄 세상의 힘이 아니라 의로움이나 경건함이나 거룩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는 결국 그렇게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온전한 순종이 우리에게서 나오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인생의 시간 동안에 열심히 방주를 짓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불평과 원망과 한탄이 쏟아지기도 하지만 끝까지 가보는 것입니다. 아니 끝까지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끌고 가시니까요.

(디도 2:1113) 11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12 그 은총은 우리를 훈련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해 줍니다. 13 그리고 위대하신 하느님과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그 복된 희망의 날을 기다리게 해 줍니다.

방주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바로 이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방주 속에서 절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수가 없습니다. 방주 안에 있는 자들, 다른 말로 예수 안에 들어간 자들은 그 예수가 사신 삶을 추구하며 그리로 향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방주에는 그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방향키라든지 운전대라든지 돛이라든지 닻이 없습니다. 그냥 예수라는 방주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 방주 안에 들어간 자들의 운명인 것입니다. 방주가 나중에 아라랏산에 도착했지요? 노아가 그 아라랏산을 목표로 삼아 방주를 운전했습니까? 아닙니다. 방주가 움직이는 대로 자신은 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만일 노아가 방주가 가는 방향을 바꾸기 위해 이런 저런 꾀를 부렸다면 그 방주가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었을까요? 아니요. 시간만 지체될 뿐 방주는 하느님이 목적하시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 성도는 예수가 움직이는 대로 좇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좇고 싶은 꿈, 그러한 세상의 비전과 야망을 모두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가 이끄는 곳으로 끌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 자신의 야망을 좇아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려고 하면 시간만 지체되고 매만 많이 맞을 뿐 하느님은 절대 양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목적지까지 이끌고 가십니다.

(고후 5:17~19) 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18 이것은 모두 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남을 밟고 죽이는 그런 삶에서 돌이켜 자신을 비워 화평과 화목을 전하는 화목케 하는 직책을 부여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이 아닌 하느님과 다른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방주 안으로 초청이 되어 그 방주 속으로 들어간 하느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부어진 하느님의 은혜를 다른 이들 에게 전해 주는 은혜와 복의 통로로 사용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노아 한 사람에게 은혜를 부으셨고 그 만을 '의로운 자, 완전한 자'라 칭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방주 속으로는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가 들어갑니다.

(창세 7:1) 1 야훼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식구들을 다 데리고 배에 들어 가거라. 내가 보기에 지금 이 세상에서 올바른 사람은 너 밖에 없다.

그렇지요? 이 구절은 혹자(或者)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집안의 가장이 예수를 잘 믿으면 온 가족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구원은 가족 단위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은 하느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의인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함께 방주에 오르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을까요? 분명 1절 말미에 보면 노아만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자였습니다. 그런데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모두 구원을 받지요? 그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의인으로 말미암아 다수에게로 전파되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작은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사람의 온전한 의인에 의해 많은 의인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확장 또한 그러한 원리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들이 받은 은혜와 복을 다른 이들에게 흘려 보내주는 삶을 살아서 그 은혜와 복이 다른 이들에게로 전파되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로마 5:18~19) 18 그러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올바른 행위로 모든 사람이 무죄판결을 받고 길이 살게 되었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른 여러 이웃이 득을 보는 삶 말입니다. 의인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들이 함께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의인들의 화평케 하는 삶, 자기희생 의 삶, 은혜와 복의 통로로서의 삶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하느님 나라의 삶이고 그 삶을 가리켜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 성도는 영생을 얻었다라고 과거완료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이 땅에서 영생을 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되지요? 그런데 영생은 단순히 긴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생명을 영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신적 생명은 하느님께서 그 삶이 어떤 삶인지 가르쳐 주시지도 않고 그저 우리에게 살아내라고 강요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럼 이 땅에서 완벽하게 그 하느님 나라의 삶, 신적 생명, 영생을 살다가 가신 분이 있다는 말인데 그 분이 누구일까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결국에 살게 될 하느님의 처소로서의 삶을 완벽하게 살다가 가셨지요?

(요한12:49) 49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어떻게 말하라고 친히 명령하시는 대로 말하였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나라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 그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만 했고 시키시는 말씀만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환언하면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하느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며 바로 그 삶이 영생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좇아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도가 좇아 살아야 할 그 하느님의 말씀, 율법의 마침을 사랑이라 합니다.

(로마 13:810) 8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라는 계명이 있고 또 그 밖에도 다른 계명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0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그럼 이제 영생의 정의가 조금 더 좁혀졌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영생을 사는 길은 예수께서 그렇게 사신 것처럼 아버지가 내 안에 서 나에게 시키시는 것을 모두 행하는 것인데 성경은 그러한 삶을 한 마디로 나가 아닌 남을 사랑하는 삶이라 합니다.

 

(요일 4:78) 7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보시다시피 성경은 하느님께 속한 자, 방주 안에 들어가 있는 자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고 그들이야말로 하느님을 아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바로 그런 십자가의 사랑을 속성으로 가지고 계신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하느님을 아는 자들은 그 하느님 아버지의 속성을 좇아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들을 가리켜 하느님을 아는 자, 영생을 소 유한 자, 영생을 사는 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생을 가리켜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고도 정의를 하는 것입니다.

(요한 17:3) 3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방주 속으로 들어간 하느님의 백성들은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흘려보내어 그들을 방주로 초청하는 자들로서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 삶은 내가 아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며, 그 삶이 바로 영생이고, 그 삶이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인 것입니다.

 

(요한 13:34~35) 34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십자가의 삶은 이 세상의 힘의 원리와 정 반대되는 삶이기에 이 세상에서는 고난의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 다. 예수님의 삶을 보세요. 예수님은 죄인들과 약한 자들, 병든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인도 약한 자리, 낮은 자리로 열심히 내려가 다른 이들을 섬기고, 사랑해 주며, 참아주고, 용서해 주는 사람을 사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렇게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결국 그 분을 채찍으로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십자가의 삶에서 쏟아 부어진 은혜와 복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전해지게 되었 고 이렇게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원수들의 생명으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게 영생입니다. 그 영생의 삶은, 다른 말로 원수를 사랑하는 삶은 이 땅에서는 고난의 모습으로 고통의 모습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정말 그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 속에는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 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내게 있는 평화와 기쁨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곧 잡히셔서 원수들에 의해 침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 평화와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요한 15:8~14)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11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13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천국에서는 우리 주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전부 그렇게 나가 아닌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섬기고 사랑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 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움직여지는 나라. 천국(天國)

 

하느님의 덮어줌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노아의 아들 함처럼 다른 이들의 부족함이나 실수나 실패를 즐기며 조롱하듯 바라보아서도 안 되고 그러한 실수나 실패나 부족함을 남들에게 재미삼아 설명하고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저주 받을 죄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우리가 남들보다 뭐가 특별하게 잘 나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덮으심에 의해 우리는 정결하다 여김을 받게 된 것이고 하느님의 신부가 된 것이라는 것을 진정 안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의 실수 나 실패를 절대 조롱할 수 없고 고소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은혜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를 아직 깊이 이해하지를 못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은혜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은혜의 방주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향하여 정죄를 화살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덮어주고 용서해 주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잠언 17:9) 9 남을 흉보면 의가 상하지만 남의 허물을 감싸 주면 사랑이 돌아온다.

그리고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언젠가 우리 성도들이 모두 방주에 들어가게 되는 날 그 방주의 문이 밖에서 닫히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누구도 그 문을 열고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처럼 문이 닫힌 뒤에 아무리 두드려도 그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오직 그 문의 열쇠는 주님만이 갖고 계십니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 분만이 그 문을 열고 닫으실 수 있습니다. 그 분이 지금 말씀하십니다. ‘방주로 들어오라’ ‘come into the ark' 지금이 은혜 받을 때요 지금이 구원의 때입니다. 지금 방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방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도 당부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 만 방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힘을 초개처럼 버리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인내하며 하느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 그렇게 진짜 방주로 한발 한발 들어가십시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그 덮으심의 은혜와 무지개의 의미와 방주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지금부터 우리 예수님이 살다 가신 그 하느님 나라의 영생을 살아내십시다. 거기에만 진정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이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