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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쪼갠 고기 그리고 할례 (창세15:7~2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5-17 조회수3,366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쪼갠 고기 그리고 할례

(창세15:7~21)

7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야훼다.' 8 아브람이 '내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가 있겠읍니까?' 하고 묻자 9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한 마리씩 나에게 바쳐라.' 10 그는 이 모든 것을 잡아다가 반으로 쪼개고 그 쪼갠 것을 짝을 맞추어 마주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만은 쪼개지 않았다. 11 솔개들이 그 잡아 놓은 짐승들 위에 날아 오면, 아브람은 이를 쫓고 있었다. 12 해질 무렵, 아브람이 신비경에 빠져 들어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데, 13 야훼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똑똑히 알아 두어라. 네 자손이 남의 나라에 가서 그들의 종이 되어 얹혀 살며 사백 년 동안 압제를 받을 것이다. 14 그러나, 네 자손을 부리던 민족을 나는 심판하리라. 그런 다음, 네 자손에게 많은 재물을 들려 거기에서 나오게 하리라. 15 그러나 너는 네 명대로 살다가 고이 세상을 떠나 안장 될 것이다 16 네 자손은 아모리족의 죄가 찰 만큼 찬 다음, 사 대만에야 돌아 오게 될 것이다.' 17 해가 져서 캄캄해지자, 연기 뿜는 가마가 나타나고 활활 타는 횃불이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었다. 18 그 날 야훼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에집트 개울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는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준다. 19 이 곳은 켄족, 크니즈족, 카드몬족, 20헷족, 브리즈족, 르바족, 21 아모리족, 가나안족, 기르갓족, 여부스족이 살고 있는 땅이다

 

하느님은 14장까지에서 이미 수차례에 걸쳐 아들 하나 없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땅이나 이 세상의 자손들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구성의 삼 요소 중 국민과 영토를 약속하신 것이지요. 그 약속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여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시겠다는 하느님의 의지를 천명(闡明)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기대한 것도 아니고 요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에게 던지신 계약 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현실은 하느님의 약속과는 반대로 절박한 기근과 전쟁, 여전한 불임(不姙)의 막막한 어둠이었습니다. 당연히 아브라함에게 두려움과 절망감과 초조함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15장에서도 그렇게 두려워하고 초조해 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또 다시 하늘의 뭇별을 보여주시면서 내가 반드시 너에게 약속한 땅을 줄 것이고 그 땅에 저 하늘의 뭇별처럼 많은 네 자손들을 번성케 할 것이다고 당신의 약속을 반복하여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에 들어가 400년을 종살이 하다가 4대만에 풀려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400년과 4대라는 것은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 예언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반드시 하늘의 뭇별만큼 많아질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예언입니다. 후손이 있어야 이집트로 잡혀가든지 풀려나든지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느님은 여전히 아들 하나 없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의 미래에 관해 예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풀려날 때에 하느님 당신께서 직접 이집트를 치실 것이고 그 후손들 이 이집트에서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오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본문 13절로 가 보겠습니다.

(창세15:1314) 13 야훼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똑똑히 알아 두어라. 네 자손이 남의 나라에 가서 그들의 종이 되어 얹혀 살며 사백 년 동안 압제를 받을 것이다. 14 그러나, 네 자손을 부리던 민족을 나는 심판하리라. 그런 다음, 네 자손에게 많은 재물을 들려 거기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 구절을 읽으시면서 얼른 생각나는 장면이 없으세요?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 그 곳에서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이집트왕 파라오에게 빼앗겼다가 하느님의 은혜로 다시 찾은 후에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그 사건이 생각나시지요? 똑 같은 그림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 사건을 아브라함에게 상기시키시며 그 때와 같은 방식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어떻게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임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하느님은 하느님 백성의 창조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 질 것인지를 성도의 삶 속에서 실재 화시켜 경험케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일생동안에 겪는 모든 사건과 정황들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지신 십자가, 그리고 하느님의 은혜를 알아 가는데 소용되는 것들인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들어가게 되는 이유가 뭐였습니까? 가나안 땅의 기근 때문에 야곱과 그의 식솔들 70명이 요셉이 총리로 있던 이집트로 들어가게 된 것이지요? 아브라함은요? 역시 기근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쏟아 부으시는 열 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지요? 그 때 그들이 이집트의 많은 금은보화를 가지고 출발을 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요? 하느님이 이집트왕에게 퍼부은 재앙으로 하느님의 힘에 의해 이집트에서 나오게 되지요? 그도 역시 이집트왕으로부터 받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올라갑니다. 어떠세요 아브라함의 이집트과 가나안 復歸,  이스라엘의 이집트행과 가나안 복귀가 정확히 같은 그림으로 겹쳐지지요? 따라서 아브라함은 그러한 하느님의 예언을 들었을 때 자신의 후손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탄생될 것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당신이 준비하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방법과 과정이 오로지 하느님의 은혜로만 되어질 것임을 아브라함의 경험과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 교회에게 暗示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오늘 본문에서 좀 더 실감나는 그림으로 반복되어 설명이 됩니다. 지금 살펴본 본문 1314절의 전후를 한번 연결해서 볼까요?

(창세 15:810, 17) 8 아브람이 '내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가 있겠읍니까?' 하고 묻자 9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한 마리씩 나에게 바쳐라.' 10 그는 이 모든 것을 잡아다가 반으로 쪼개고 그 쪼갠 것을 짝을 맞추어 마주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만은 쪼개지 않았다. 17해가 져서 캄캄해지자, 연기 뿜는 가마가 나타나고 활활 타는 횃불이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었다.

8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두려움과 초조함을 견디지 못해 증거를 보여 주세요라고 요구를 합니다. 그 때 하느님께서 삼년 된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제물을 마련하고 그 제물들을 쪼개 놓았습니다. 제물을 쪼개는 것은 고대 시대의 계약 관습입니다. 계약 당사자가 손을 잡고 쪼개놓은 제물 사이를 걸어감으로 해서 이 계약을 어기는 자는 반드시 이 제물처럼 쪼개지게 될 것이라는 굳은 약속의 예표인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이 실제로 쪼갠 제물 사이로 지나갔다가 하느님으로부터 쪼개짐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레 34:18~21) 18너희들이 송아지를 두 토막으로 갈라놓고 그 토막 사이로 지나가며 내 앞에서 계약을 맺었으면서도 이제 그 조문을 지키지 않고 계약을 어겼으니 나는 너희들을 그 송아지 꼴로 만들고 말리라. 19 유다와 예루살렘 고관들, 내시들과 사제들 지방유지들 할 것 없이, 갈라 놓은 송아지 토막 사이로 지나간 자들을 20 죽이려고 달려드는 원수의 손에 넘겨 주어, 그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의 밥이 되게 하리라. 21 유다 왕 시드키야와 그 고관들도 달려드는 원수의 손에 넘겨서 죽게 하리라.

그런데 비둘기는 쪼개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어떤 학자들은 모세가 끝까지 순종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순종을 한 것이라고 지적을 하곤 합니다만 훗날 모세의 율법에도 보면 새는 쪼개지 말고 불태우라고 나와 있습니다.

 

(레위 1:1417) 14 누구든지 날짐승을 야훼께 번제물로 바치려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바쳐야 한다. 15 사제는 그것을 제단에 가져다가 목을 부러뜨려서 제단 위에서 사르고 피는 제단 턱에 대고 빼어야 한다. 16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멱통과 오물을 함께 떼어 내어 제단 동쪽 잿더미에 버려야 한다. 17 그리고 두 날개를 잡고 아주 떨어지지 않게 몸통을 찢어 놓으면 사제는 그것을 제단에 피운 장작불에 살라야 한다. 이 번제는 불에 타면서 향기를 풍겨 야훼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제사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새를 쪼개지 않은 것은 제사의 형식이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하느님에 의해 주어져 있었던 것이라 보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 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17절입니다. 해질 무렵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홀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연기와 횃불하면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셨던 하느님의 현현(顯顯), 불기둥과 구름기둥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임재가 쪼갠 고기사이로 홀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자손과 땅은 하느님이 홀로 마련하시겠다는 하느님의 자기선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누가 깹니까? 계약의 당사자인 아브라함이 깹니다. 바로 다음 장인 16장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하느님은 분명 15장에서 네 몸에서 날 자(), 즉 적자(嫡子)가 네 후손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서자(庶子)를 내어놓고는 이가 내 상속자라고 금방 그 약속을 깨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약속은 깨졌습니다. 그러면 그 약속의 당사자인 아브라함이 쪼개져서 죽어야 하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홀로 지나가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쪼개져야 할 아브라함 대신에 당신의 쪼개짐을 통해 계약을 성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처음부터 당신의 계약 완성을 당신의 쪼개짐으로 이루실 것임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애초에 홀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쪼개짐이 십자가에서 쪼개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늘의 뭇별처럼 많은 하느님의 백성들, 즉 교회가 탄생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창세기 15장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예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쪼개다라는 히브리어는 바타르입니다. 그 단어는 역시 쪼개다라는 단어 바라를 어근으로 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바라라는 단어를 어근으로 갖는 또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베리트’ ‘계약이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계약은 모두 그렇게 쪼개짐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에 계약이라는 단어가 쪼개다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칼로 자르다, 칼로 쪼개다라는 단어 바타르의 동의어는 히브리어 이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가 바로 할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쪼갠 고기사이로 하느님이 홀로 지나가시는 장면은 할례 계약의 내용을 그림으로 풀어놓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그림을 할례 계약으로 먼저 끌고 가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본문인 15장에서 쪼갠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 가셨습니다. 그런데 16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아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포기하실 분이 아니시지요? 17장에 보면 13년 만에 나타나신 하느님께서 또 다시 후손에 대한 약속을 하시면서 계약을 하시는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모두 할례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15장에 나타난 쪼개짐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쪼개짐할례라는 방법으로 만들어 내실 것이므로 자꾸 네 방법으로 방해하지 말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창세 17:6,911) 6 나는 너에게서 많은 자손이 태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왕손도 너에게서 나오게 하리라. 9 하느님께서 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뿐 아니라, 네 후손 대대로 지켜야 한다. 10 너희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아라. 이것이 너와 네 후손과 나 사이에 세운 내 계약으로서 너희가 지켜야 할 일이다. 11 너희는 포경을 베어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운 계약의 표다.

여기까지 우선 연결을 해 보자고요? 하느님은 계속해서 당신의 백성과 그들에게 주실 땅에 대해 약속을 하시는데 인간들이 자꾸 엉뚱 한 것들을 내어놓고 그 약속의 성취를 방해합니다. 하느님은 그 약속을 홀로 성취시키시는데 그 방법으로 자신의 쪼개짐’ ‘할례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그 할례가 계약의 표징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쪼개짐이 17장의 할례로 연결이 되는 것은 아시겠지요?

하느님은 이사악의 모리야산 사건을 통해 그 쪼개짐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암시 해 주십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이사악이 8일 만에 할례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22장이 모리야산 사건입니다.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자가 자기가 죽을 나무를 지고 어떤 산으로 오릅니다. 그리고는 아비의 손에 들린 칼에 의해 쪼개져서, 다른 말로 온 몸에 할례를 받고 죽는 것입니다.(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어떤 경우라도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므로)

 

할례가 칼의 계약이지요? 그러니까 지금 이사악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자신이 매달려 죽어야 할 나무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온 몸에 할례를 받으시고 죽으시는 방법으로 하느님 백성들이 하늘의 뭇별처럼 살아나게 될 것임을 이사악이 미리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사악은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되는 하느님 백성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죽어야 할 이사악 대신에 어린양이 대신 죽고 그가 살아나지요(22:13) 그렇게 이사악은 아버지 하느님의 손에 들린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어린양)와 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사망에서 살아나게 되는 자들을 가리키는 이중적 상징을 담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 사건은 야곱의 얍복강 사건에서 또 한 번 구체적으로 설명이 됩니다. 얍복강 이전까지의 야곱의 삶은 그 야말로 些技臨機應變權謀術數로 점철된 인생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불가능한 죄인에게 찾아오셔서 씨름을 하시는데 죄인들의 세상 힘을 향한 욕망과 욕구가 얼마나 큰지 하느님도 이길 수 없을 만큼 강합니다. 그러한 자를 하느님 마음에 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는 그를 죽이고 새로 창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치시는 것입니다. 환도뼈는 인간의 전 인(全人), 전존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생식기를 가리켜 환도뼈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이사악이 모리야 산에서 죽은 것처럼 원리적으로는 거기서 환도뼈가 쪼개져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사악처럼 실제로 죽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다시 살아나 새로운 존재, 즉 이스라엘이라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재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쪼개져 죽고 야곱이 이스라엘로 재탄생하는 사건이 얍복강 사건 인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 역시 죄로 인해 죽어야 할 하느님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되는 하나님 백성의 이중적 상징을 담고 있는 인물인 것입니다.

 

한 발 더 나가 볼까요? 출애굽기로 가면 그 쪼개짐의 계약’ ‘칼의 계약’ ‘할례 계약이 좀 더 구체적인 그림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출애14:21) 21 모세가 팔을 바다로 뻗치자, 야훼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바람을 일으켜 바닷물을 뒤로 밀어 붙여 바다를 말리셨다. 바다가 갈라지자

여기서 갈라져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쪼개다, 베어내다라는 뜻입니다. 역시 바라라는 단어를 어원으로 하고 있는 바카라 는 단어입니다. 그 저주의 쪼개짐, 베어냄 속으로 이스라엘이 들어가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저주의 쪼개짐 속으로 들 어갔다가 살아서 나옵니다. 어떻게 살아나왔을까요? 바오로가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줍니다.

(고전10:12)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꼭 기억해 두셔야 하겠습니다. 모세 때에 우리 조상들은 구름의 인도를 받았고 모두가 홍해를 무사히 건넜습니다. 2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의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는 백성과 땅이 창세기의 하느님의 계약대로 온전히 확보가 된 상태입니다. 물론 모형과 상징으로서의 백성과 땅입니다. 하느님은 거기에 왕에 대한 계약을 보태십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왕을 약속하시는데 그 왕위가 영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 후손이 가리키는 일차적 인물은 솔로몬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왕위가 지금까지 영원하지 않은 것을 보더라도 그 후손은 솔로몬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영원한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 18:36~37)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 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37 '아뭏든 네가 왕이냐?' 하고 빌라도가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 하고 대답하셨다.

보세요.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지요? 다윗 계약에서 약속된 그 영원한 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이 말씀 하시기를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의 땅은 새 하늘 과 새 땅을 말하는 것이고 그 나라의 백성은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늘나라의 땅과 백성이 아브라함에게 계약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그 계약이 다윗 때에 이르러 성취가 되고 또 다윗 왕 때에는 왕에 대한 계약이 추가되고 그 전체의 계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국민, 주권, 영토) 오늘 본문이 어떻게 할례계약으로, 출애굽 사건으로, 다윗계약으로, 십자가로 이어지는지 이제 이해가 가시죠. 이렇게 우리 옛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 받아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 옛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이미 그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고 과거 시제를 사용하여 선언합니다.

(골로 1:13)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미 하느님 아들이 다스리시는 하느님 나라로 옮겨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죄의 권세와 지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5:24) 24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3:9~10) 9그리고 거짓말로 서로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렸고 10 새 인간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와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전부 과거시제입니다. 우리 옛사람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이 현실이 바로 예수 안에서 할례 받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제 죄의 나라는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가 없습니다.

(요일5:18) 18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그를 지켜 주시기 때문에 악마가 그를 다치지 못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난 자의 지킴으로 악한 자가 성도를 만지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가까이 오지도 못합니다. 성도는 이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죄의 나라에서 빠져 나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요한사도가 분명이 말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요.

(요일3:9) 9 누구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본성을 지녔으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이기 때문에 도대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아닌 것 같지요? 여전히 우리는 죄에게 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모두 가짜입니까?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제 우리 성도는 결코 정죄치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성 도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죄가 이미 용서되었기 때문에 성도의 죄는 하느님 앞에서 모두 기각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죄의 모양이 수시로 나오지요? 그것은 지금 우리가 저 건너 편 흑암의 나라에서 우리에게 소리치고 있는 죄에게 지레 겁을 먹고 옛 습관에 빠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나의 새사람 이 짓는 죄가 아니라 옛사람의 습관일 뿐입니다. 나의 영혼은 새로워졌는데 여전히 부패한 몸을 지니고 있는 우리는 그 몸속에 옛 습관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먼 죄의 나라에서 죄가 우리를 격동하고 협박을 하면 그 습관들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그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로마 7:19~20) 19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20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사도가 죄를 의인화시켜 설명을 하지요? 내가 지금 죄의 협박과 격동에 못 이겨 옛 습관으로 다시 빠져드는 것은 나의 죄가 아니라 내 속에 남아있는 옛 사람의 부패한 성향과 특성과 경향과 습관들이 튀어나오는 것이므로 하느님께서 그것들을 내 죄로 간주하지 않으시고 죄의 소행으로 간주해 버리신다 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과거에 미국의 노예들이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 만치서 옛 주인이 기침만 해도 두려워 벌벌 떨었다는 기록이 있지요? 심지어 어떤 노예들은 자유인으로 사는 것이 너무 어색해서 자진하여 노예로 복귀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죄는 우리를 건드리지도 못하고 범접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그 죄가 저 멀리서 눈을 부라리며 , 너 옛날 에 내 종이었잖아. 이리와하고 위협을 하면 지레 겁을 먹고 우리 몸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부패한 성품과 성향과 경향이 무조건 반사작용처럼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없는데 그 옛사람의 습관과 성향과 경향만이 남아 계속해서 우리 몸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는 그것을 이미 온전하게 된 영과 구별하여 죽을 몸이라 부릅니다.

(로마 6:12)12 그러므로 결국 죽어 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할례를 받아 우리 주님 보좌 우편에 앉아있는 사람들이지만(에페2:6) 아직 부활의 육체를 받지 못하고 죽을 몸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죽을 몸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성향, 습관, 경향 등에 수시로 노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은 죄의 삯을 받아 죽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우리 성도는 그 몸의 구속, 즉 그 몸마저도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그 날을 간절한 희망으로 기다리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로마 8:23) 23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죽을 몸에 남아 있는 옛사람의 부패한 성품이나 습관이나 경향이나 특성 등이 자기에게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될 날을 기다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신이 하느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쪼개짐을 받아 구원을 선물 받은 자라는 올바른 자각이 있는 성도는 자기 몸이 죄의 공갈 협박에 넘어가 다시 죄의 종처럼 살게 되는 그 삶을 피흘리기까지 싸우며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게 올바른 성도의 삶이라는 것이지요.

 

(로마 6:12) 1 그러면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 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죽어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2절의 죽은이라는 단어는 부정 과거 시제입니다. 과거에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미 죄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단지 우리가 마귀에게 속아서 죄의 종으로 살 때의 습관과 성향을 반추해 내는 것에 불과한 것임을 확실히 깨달아 거기에서 벗어나 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은 신기루 같은 것입니다. 우린 이제 결코 정죄되지 않습니다.(로마 8:1) 그 말은 구원받은 우리가 짓는 모든 죄는 하느님께 카운트가 안 되는 죄라는 것입니다. 換言하면 지금 우리는 신기루 같은 죄에게 속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확실한 眞理 위에서 對敵을 하면 魔鬼는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들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야고 4:7) 7 그러므로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는 여러분을 떠나 달아날 것입니다.

자신이 쪼개지시면서 까지 우리를 향한 계약을 성취해 내신 하느님의 열심 앞에서 우리가 여전히 옛사람의 더러운 모습으로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이미 우리 것이 아닌 신기루 같은 죄에게 계속 놀림감이 되고 그로 말미암아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살겠습니까?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쪼개져 죽었습니다. 이제 우린 새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새사람답게 살아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삽시다.

 

 

이제 창세기가 성경을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 흐미하게나마 보이시나요?

지루하고 힘드시겠지만 역사와 우주속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느끼실수 있게 될 것입니다.

조금만 더 보세요 유다와 다말 얘기까지 올리겠습니다.

상경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참고하시면서 가 봅시다. 살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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