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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의 희망 한 스푼(내가 목자로서 어찌 사랑하는 조선의 양떼를 버릴 수 있으리오?)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5-29 조회수2,075 추천수2 반대(0) 신고

 


"내가 목자로서 어찌 사랑하는

조선의 양떼를 버릴 수 있으리오?"

지난 2014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에 맞춰 시복되신

124위 순교 복자들 가운데

눈에 띄는 인물이 한 분 계십니다.

중국 소주(蘇州)출신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1752~1801)입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조선천주교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인물인데,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해외 선교사이기도 합니다.

당시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님께서는 당시

북경 교구 내에서 외모가

조선인과 흡사한 사제를 찾았는데,

바로 주문모 신부님이 당첨되셨답니다.

아직 천주교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정조 즉위 18,

1794년 조선 초기 천주교회

신자들의 집회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제 우리도 외국인 신부를

모셔 와서 포교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신자들이

크게 동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황이라는 사람을

북경으로 파견하였는데,

북경 천주당(天主堂)에 머물고

계시던 주문모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황은 신부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는데,

유심히 사연을 전해들은

신부님께서는 흔쾌히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42세 때인

1794년 북경을 떠나 의주 외곽에

대기하고 있던 조선인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안내로 마부로 변복을 한 후,

일년여 만에 드디어

조선 잠입에 성공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지칠 줄 모르는

사목적 열정과 탁월한 다재다능함,

놀라운 덕행으로 조선교회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당시 신자들은 신부님에 대해

큰 존경을 표하며 한 목소리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께서는

지칠 줄 모르셨습니다.

먹고 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사목에 헌신하셨습니다.

밤에는 전국을 떠돌아다니시며

성사(聖事)를 집전하셨습니다.

낮에는 조용히 번역이나

집필 작업에 전념하셨습니다.

신부님은 틈만나면 단식과

고행을 거듭하셨습니다.

조선 교회에 끼친 주문모 신부님의

영향력은 수치상으로만 봐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사목활동을 시작하신 1795년부터

순교하신 1801년까지,

6년여 동안, 수차례에 걸쳐

삼천리 방방곡곡을 순회하셨습니다.

신부님 입국 당시 4천명이던

신자수가 6년여 만에 두배 이상인

만여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거듭되는

박해의 위험 속에서도

오늘날로 치면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혹은 가톨릭 교리 연구회격인

명도회를 창립하여 신자들 스스로

교회를 이끌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초대 남성 회장으로는 정약종을,

여회장에는 강완숙을 임명하여

교우들 신앙의 활성화를 도모했습니다.

천주교에 박해를 가하지 않았던

정조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은 급격히 변화되었습니다.

정조에 대해 사무칠 정도의

원한을 품고 있던 정순왕후가

순조에 대한 수렴청정을 시작했습니다.

천주교에 호의적이었던 인사들이

하나 하나 제거되었습니다.

결국 순조 1(1801) 정순왕후는

하교를 내려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 유명한 신유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며,

동시에 인륜을 위협하는

금수(禽獸)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

자연스레 주문모 신부님의 목숨도

경각을 다투게 되었습니다.

사실 신부님께서는 착한 목자로서

조선 교회 뿐만 아니라 조선과

조선인들을 무척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주문모 신부님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일단

고국으로의 귀국을 결심하였습니다.

우여곡절끝에 드디어

국경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제 압록강만 건너면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이요,

죽음도 피할 수 있는 고향으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님은 국경을

넘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번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내가 목자로서 어찌 사랑하는

조선의 양떼를 버리고

강을 건널 수 있으랴?”

라고 외치며,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한양으로 되돌립니다.

한양으로 돌아온 그는

자기 발로 관아로 나아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바로 당신들이 그리도 애타게

찾아헤매던 그 주문모 신부요!”

자신으로 인해 무고한 신자들이

더 큰 고통을 당할까봐 스스로 순교,

다시 말해서 십자가형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의금부 이송된 주문모 신부님은

419, 50세의 일기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받고

순교하셨습니다.

군문효수형이란 조선시대

사형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나라의 근간을 뒤흔든 죄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죄인에게

내렸던 중한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사형수를 백성들 앞에 세운 후,

죄명과 판결문을 낭독한 다음,

양쪽 귀에 화살촉을 꿰었습니다.

그리고 사형수의 웃옷을 벗긴

다음 목을 베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어진 목은

다른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군문에 높이 매달아 놓는

그런 잔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순교 직전 이런 말씀을 남기셨답니다.

살아 있어서 도움이 안 되니

죽기를 원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의 희망 한 스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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