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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녀 다말 (창세38:1~12)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5-30 조회수2,390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창녀 다말

(창세38:1~12)

1 그 무렵에 유다는 형제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히라라 불리는 아둘람 사람에게 붙어 살았다. 2 거기서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만나 아내로 삼아 한 자리에 들었다. 3 그 여자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에르라 지어 주었다. 4 그는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오난이라 지어 주었고 5 다시 아들을 낳고 이름을 셀라라 지어 주었다. 그가 셀라를 낳은 것은 그집이라는 곳에서였다. 6 유다는 맏아들 에르에게 아내를 얻어 주었는데 그의 이름은 다말이었다. 7 유다의 맏아들 에르는 야훼의 눈 밖에 나서 죽었다. 8 유다는 오난에게 이르기를 형수에게 장가들어 시동생으로서 할 일을 하여 형의 후손을 남기라고 하였다. 9 그러나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고 오난은 형수와 한 자리에 들었을 때 정액을 바닥에 흘려 형에게 후손을 남겨 주지 않으려 하였다. 10 그가 한 이런 짓은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이었으므로 야훼께서는 그도 죽이셨다. 11 그러자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들 셀라가 어른이 될 때까지 친정에 돌아 가 홀몸으로 기다려 다오.' 그마저 형들처럼 죽을까봐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말은 친정에 돌아 가 살게 되었다. 12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러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었다. 유다는 상을 벗은 다음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양털을 깎으러 딤나로 올라갔다.

 

다말과 유다의 이야기는 아주 중요한 복음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이야기 뒤에 붙어있는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서 하느님의 계약이 그 계약 당사자 후손을 통하여 완성이 되는 십자가 복음을 봤습니다. 聖徒라는 계약 당사자들이 진정한 계약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죽음에서 건져지는, 구속사의 과정이 바로 요셉의 버려짐과 수난이라는 것입니다. 야곱과 요셉은 성도와 예수를 상징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예요. 그런데 그 요셉의 이야기 중간에 갑자기 오늘 본문 유다와 다말의 지저분한 이야기가 삽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성경이 갑자기 요셉의 이야기를 하다가 유다의 이야기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는 것일까요?

바로 이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요셉의 삶 전체를 要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야기이며 십자가와 은혜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 속에서 聖經 전체의 일관된 主題를 배울 수 있으며,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역사 전체의 내용을 미루어 알수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 유다와 다말의 근친상간의 이야기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녹아 들어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가 창세기 372절의 야곱의 이야기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도 요셉의 이야기가 그러했던 것처럼 야곱, 즉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되는지에 관한 또 다른 설명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유다가 아둘람으로 내려가서 히라라는 친구를 사귑니다. 아둘람은 가나안 31성읍 중의 하나입니다. 유다가 아버지 집과 형제들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내려가 가나안 친구를 사귄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느님의 택한 백성이 세상과 벗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과 한편이 된 것을 상상해 보시면 더 이해가 쉽겠습니다.

유다는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친구의 소개로 수아라는 가나안 사람의 딸과 동침을 해서 아이까지 낳습니다. 聖經에서 同寢聯合象徵하는 것이라 했지요? 하느님의 축복의 라인에 선 자가 죄인과 연합을 한 꼴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점점 가나안화 되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혈통적 純粹性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이사악의 신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종을 하란까지 보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피가 다른 사람들의 혈통보다 뛰어나서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구별됨, 거룩을 가르치시기 위한 하나의 상징적 장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가나안으로 내려가서 가나안 친구를 사귀고 가나안 여자를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아 버린 것입니다. 약속의 후손을 출산해 내야 하는 하느님의 백성에게서 가나안의 후손들이 나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하느님의 축복의 당사자 야곱이 그것을 용인해 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은 창세기 315절부터 啓示하신, 당신의 백성들에게서 契約後孫을 출산시키시고자 하는 당신의 계획을 절대 중도에 실패하실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유다의 후손으로 태어난 가나안 후손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허락하신 여자에 의한,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야 합니다. 유다가 선택한 가나안 여자의 후손은 안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오늘 본문 서두의 이야기는 유다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불순종의 죄를 지었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유다의 죄를 말리지 못한 야곱, 즉 이스라엘의 상태가 바로 유다와 같은 불순종의 상태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말로 유다는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야곱과 그의 열 두 아들의 대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유다는 敎會(하느님백성)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열두 지파, 영적 의미의 교회를 하느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살려내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다말과 유다 사건인 것입니다.

유다는 그 가나안 여자와 결혼해서 아들을 셋을 낳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후손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이 땅에 태어난 자들은 항상 사망에 속한 자들로 분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불순종의 자식들 중 첫째 아들인 에르다말이라는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그 첫째 아들 에르가 하느님이 보시기에 악한 자였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그를 죽여 버리십니다.

(창세38:7) 7 유다의 맏아들 에르는 야훼의 눈 밖에 나서 죽었다.

 

도대체 유다의 장자 에르가 얼마나 악한 사람이었기에 하느님께서 손수 그를 죽이신 걸까요?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느님의 택하심 밖에 있는 모든 죄인들은 악하며 그들은 이미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굳이 하느님께서 그 악을 죽여 버리세요.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악을 반드시 하시고야 마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과 유다의 불순종,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탄생한 그의 후손들은 모두 에르처럼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담 안에 속해있는 모든 인류의 운명입니다. 그렇게 큰 아들이 죽고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시대에는 繼代결혼 levirate marriage, 수혼법(嫂婚法, Levirate Law 이라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형이 자손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반드시 동생이 형수와 결혼을 하여 형의 대를 이어주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풍습이었는데 나중에는 이스라엘에 율법으로까지 주어지게 됩니다.

(신명25:5-6) 5 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의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그 남은 과부는 일가 아닌 남과 결혼하지 못한다. 시동생이 그를 아내로 맞아 같이 살아서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6 그래서 난 첫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 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

 

도대체 대를 잇는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기에 하느님은 율법으로까지 이 수혼법, 계대결혼을 규정하신 것인가? 사실 이 계대결혼은 이스라엘만의 풍습이 아니라 당시 고대 근동의 많은 부족들과 나라들이 그러한 계대결혼의 풍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계대결혼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무언가를 교훈하시기 위해 그것을 율법으로까지 규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창세기 315절의 원시복음에 나오는 여인의후손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은 그들을 구원할 여인의후손이 오실 때까지 반드시 대를 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대를 잇는다는 개념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계약과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하느님 계약의 필연적 성취에 대한 집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繼代結婚이라는 것까지 동원하여 대를 잇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은 반드시 와야 하며 그 어떤 것도 그 여인의 후손의 도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인의 후손의 희생을 근거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하느님의 약속이었잖아요. 그래서 다말, , 라합 등의 여자들이 계약의 후손의 라인에 투입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계약의 후손의 탄생을 막아도 하느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대가 끊기는 것을 하느님의 저주로 표현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엘리 대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비느하스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엘리도 목이 부러져 죽었을 때, 시 아버지와 남편과 남편의 동생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느하스의 아내가 자신이 낳은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짓습니다. 야훼의 영광이 떠나갔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 집안의 대는 영원히 끊어져 버렸기 때문에 비느하스의 아내가 그 아들 이름을 하느님의 영광이 떠나간 저주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20장에서도 어리석고 幼弱한 아브라함 때문에 그랄 왕 아비멜렉 집안의 가 모두 닫히는 저주를 받지요?

이렇게 구약 성경이 하느님의 저주를, 태가 닫히는 것으로 표현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참 은 하느님으로부터 차단되었던 하느님의 生命力回復입니다. 그런데 그 회복에 이르는 길은 약속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함을 받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후손의 라인에서 태가 끊어지게 되면 그 여인의 후손과의 관계가 단절이 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태가 끊기는 것을 하느님의 복과의 반대 개념으로, 종종 하느님의 저주로 표현을 하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복은 여인의 후손에 의한 하느님과의 화해,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영생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축복의 계약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약속의 후손을 보장하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후손의 팽창에 대한 약속은 혈통적 후손의 증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손이 많아지는 것이 뭐 그리 큰 복입니까? 그 말은 加算적 의미의 숫자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 후손은 갈라디아서 316절에서 확인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선택에 의해 탄생되는 수많은 성도들을 지칭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 후손이라는 단어는 단수로 쓰여졌어요. 아시다시피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이라는 부사구와 자손이라는 단수 명사는 어울리지가 않는 조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이러한 파격적 조합으로 그 약속의 후손을 묘사하는 것은 그 어구가 참 약속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서 연합되어 탄생하게 될 수많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함께 지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 대가 끊긴다는 것이 상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필연적 성취가 실패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하느님 백성들의 탄생도 좌절이 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와 교회(하느님의 백성)는 하나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을 상징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대가 끊긴다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태를 닫으시는 것을 저주의 상징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맏형인 에르가 죽었을 때 당연히 둘째 오난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유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하느님께서 유다의 후손으로 실로즉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로 작정을 하셨기 때문에 유다의 대는 반드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유다가, 구속사를 설명하는 이 지저분한 이야기의 모델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난이 형의 대를 이어주는 일에 순종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자기의 아이가 되지도 못 할 것이고, 그 아이가 태어나서 유다 집안의 장자의 대를 잇게 되면 유산 상속 문제도 복잡해지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에 순복하지 못하고 땅에다 泄精을 해 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은 가차 없이 오난도 죽여 버리세요. 그들은 약속의 후손을 출산할 수 없는 죄인들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인의 후손을 보내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하는, 하느님의 실패할 수 없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한 것이죠. ‘이 세상의 죄와 악이 어떠한 방해를 한다 해도 반드시 약속의 후손 예수를 보내고야 말 것이고 그 예수와 연합된 나의 백성들의 탄생을 반드시 보고야 말 것이라는 하느님의 의지 말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끝까지 방해를 해요 마치 요한묵시록 12장의 여자와 아이와 용의 이야기가 다른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용은 끝까지 교회인 여자가 예수라는 계약의 후손을 출산하는 것을 방해를 하지요?

어쨌든 유다는 마땅히 셋째 아들 셀라에게 다말을 주어야 했음에도 유다는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 버립니다. 유다에게 있어서 다말은 아들 둘을 잡아먹은 불길한 며느리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시면 유다가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는 이유가 나오는데 그 이유가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유다가 인간적인 유익을 챙기기 위해 하느님의 계약 성취의 방해자로 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다와 그 아들들의 불가능함이 완전히 폭로가 되자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한 여자를 보내시는데 그게 다말입니다. 녀의 수난과 수모를 통하여 약속의 후손이 태어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다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아들을 보내고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내 버린 후 얼마 있다가 유다의 아내가 죽습니다. 그렇게 유다의 아내가 죽고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통기간(보통 30)이 지나자 유다는 양털을 깎기 위하여 자신에게 가나안 여자를 소개시켜 주었던 가나안 친구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갔습니다. 농경과 목축을 주업으로 삼아 살던 당시 사람들에게 양털을 깎는 때는 축제였습니다. 특히 가나안 사람들은 양털 깎는 때를 정해놓고 그 기간 동안에 큰 잔치를 벌이며 너나 할 것 없이 술에 흠뻑 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자신들이 섬기던 풍요의 신 바알과 아스다롯 신전에 가서 제사를 지내어 더 많은 풍요를 기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바알과 아스다롯 신전에서의 祭儀 행위는 신전에서 제물을 드려 제사를 지내는 것도 있었지만, 들의 주된 祭儀 행위는 돈을 주고 사제들과 성행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풍요의 인 바알과 아스다롯 신은 인간의 성행위를 보면서 흥분을 하게 되는데 그 신이 흥분을 하게 되면 인간들에게 비를 충분히 내려주고 햇빛을 알맞게 내려주는 등 풍요와 다산의 축복을 더 많이 부어주게 된다는 신앙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양털 깎는 기간에는 신전의 사제들이 사제복을 입고, 풍요를 바라며 제의 행위를 하러오는 외간 남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신전문 앞에서 요염을 떨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제들이 娼女 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유다가 그 곳엘 간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다말이 과부의 옷을 벗고 창녀의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딤나 길옆 에나임 城門에 앉아 있었다고 하지요? 거기서 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일반 집의 문을 가리키는 솨아르가 아니라 페타흐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가나안 종교의 神殿門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으로 실로, 메시아가 오시기로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느님이 하신, 가나안 여인과 결혼을 했고, 가나안 친구를 사귀었으며, 계대결혼으로 대를 이어야 하는 하느님 백성의 의무 또한 소홀히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가 죽은지 30일이 겨우 지났는데 娼女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거기는 일반 매음굴도 아니고 바알과 아스다롯 신전의 매음굴입니다. 그 말은 그가 가나안의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이라는 우상까지 섬기고 있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게다가 유다가 며느리의 얼굴도 못 알아보았다는 것은 당시 신전의 여사제들이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기도 했지만 유다가 당시의 양털 깎기 축제에 참석한 다른 남자들처럼 술에 흠뻑 취해서 精神이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지금 유다를 통하여, 하느님의 선택을 입고도 여전히 풍요와 쾌락을 좇아 하느님께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罪性이 낱낱이 폭로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느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대를 잇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것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의 필연적 도래를 기다리고 기대하는 신앙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가 끊긴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 밖의 外人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고 그 건 곧 저주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성경이 하느님의 저주를 대가 끊기는 것으로 표현을 하지요.

따라서 다말이 유다와 대조적으로, 창녀의 취급을 감수하면서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약속의 후손의 대를 이으려고 한 것은 구속사 속에서의 이해로 볼 때에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신앙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뜻을 좇기 위해 창녀보다 못한 죄인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심을 감수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흠을 찾아서 성경의 메시지를 훼손시키시면 안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도덕과 윤리를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살인과 방화, 거짓말과 간음도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이면 인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 나라의 善惡의 개념입니다. 하느님이 선하다 하시면 선이라 해야 하고 하느님이 악하다 하시면 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절대 순종의 원리로 살아야 하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하느님 백성들의 자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지저분한 간통 사건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거기에서 오히려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인간들에게 쏟아 부어진 하느님의 은혜의 크심을 발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다는 며느리 다말과 잠자리를 하게 되었고 다말은 그 일로 姙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유다가 창녀에게 줄 화대를 미처 챙겨오지 못한 것입니다. 다말이 유다에게 묻습니다. ‘나에게 무엇을 주겠습니까?’ 유다는 염소새끼 한 마리를 화대로 약속 합니다 그리고 그 염소새끼를 화대로 지불하기까지 담보물로 자신의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맡겼습니다. 그리고는 나중에 가나안 친구인 히라를 시켜서 염소새끼를 가져다주도록 시켰는데 그 창녀를 못 찾습니다. 다말이 임신을하고 숨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잘 됐다, 그 까짓 지팡이와 도장 가지라고 해하고 호기를 부렸습니다. 그런데 삼개월 후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자기 며느리 다말이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유다가 노발대발합니다. 그런 부정 한 여자는 당장 불살라 죽여 버리라고 엄명을 내립니다. 자신의 부정은 하나도 기억 못하고 오히려 다른 이의 부정에 大怒함으로 해서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하려는 악한 죄인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어요. 바로 우리의 모습이죠.

(38:24) 24 석 달쯤 지나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창녀 짓을 하여 아이까지 가졌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되었다. 유다는 그를 끌어 내어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때 다말이 시아버지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자기를 임신시킨 사람이 바로 이 물건의 주인이라고 하면서, 유다의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보냅니다. 유다는 즉시 그것들이 자기의 물건들임을 알아차립니다. 거룩한 척 연극을 하던 유다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그 자신의 물건들 앞에서 폭로당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수시로 우리 앞에 우리의 죄인 됨의 증거들을 들이 미십니다. 그 때 우리는 하느님, 이 땅에 의로우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저는 하느님 앞에서 여전히 죽어야 할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그게 自己否認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생활은 그런 하느님의 허다한 폭로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죄인 됨을 들켜 버림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否認해 가게 되는 사건들로 點綴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죄인됨의 증거인 지팡이와 도장과 끈이 수시로 우리 앞에 제시가 되어야 그게 복입니다. 그것이 自己否認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거기에서 진짜 순종의 삶이 나오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성도의 삶 속에서 교만이라는 것이 나올 새가 없어요. 끊임없이 자신의 지팡이와 도장과 끈이 폭로가 되는 삶 속에서 僞善과 위장의 삶을 살지 않는 이상 어떻게 다른 이를 淨罪하며,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적합니까? 유다가 자신의 죄가 폭로되자 다말에게 뭐라 하는지 볼까요?

(38:26) 26 유다는 그 물건들을 알아보고 '그 애가 나보다 낫구나! 내가 아들 셀라에게 그애를 아내로 맞게 하지 않았으니...'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유다가 다말에게 '낫구나.'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에서 낫구나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 짜다크입니다. 그 단어는 라는 말입니다. 유다가 다말의 행위를 의롭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폭로되자 금방 自己否認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 짜다크는 관계라는 틀 속에 들어 있는 어떤 존재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責任義務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상태를 라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성경은 때때로 하느님의 계약이 완전히 성취된 그 상태를 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모든 관계가 서로가 요구하는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게 되는 때이니까요. 그런데 다말의 행위가 랍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 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의로운 분은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따라서 다말의 수난과 수모는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신실하게 당신의 책임을 다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보내어 그에게 당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수모, 즉 십자가를 상징했던 것입니다. 유다가 대표하고 있는 야곱, 즉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죄와 예수를 상징하는 다말이 聯合이 되어 그 죄를 자신의 것으로 전가시켜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땅히 죽어야 할 유다가 살아나는 것이고(유다의 후손으로 예수가 오게 됨으로 그는 예수를 출산 한 자가 됨) 그 유다의 부끄러움을 다말이 짊어지고 부끄러운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다말의 姙娠 이죠.

그 길에 유다가 한 일이라고는 이 세상을 상징하는 가나안의 친구를 사귀고, 가나안 아내를 얻었으며, 쾌락과 풍요를 좇고, 심지어 豊饒인 바알과 아스다롯이라는 우상을 섬긴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죄인들의 삶속으로 하늘의 사람이 개입하여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수난과 수모를 감수하며 결국 그들의 모든 죄를 자신이 가져가 부끄러운 죄인의 모습이 되어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바로 다말과 유다의 사건이 품고 있는 하느님의 십자가 복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렇게 전적인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약속의 후손은 탄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거기에 죄인들의 자격과 업적이 눈곱만큼도 개입될 수 없어요. 그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놓는 모든 業績과 열심은 하느님 앞에서 棄却이 되고 오직 예수의 만이 하느님 앞에서 有效한 것이지요.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약속의 후손이신 예수님의 족보에, 다른 이름이 아닌, 다말의 수난과 수모로 탄생을 한, 그 이름도 부끄러운, 시아버지의 아들 베레스가 떡하니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1:2-3) 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았고 이사악은 야곱을, 야곱은 그의 형제를 낳았으며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제라를 낳았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헤스론은 람을,

이렇게 하느님의 구원은 인간의 지혜와 추측과 상상을 뛰어넘는, 은혜라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 앞에서 아무리 의로운 척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 불가항력적 사랑 앞에서 아무리 고고한 척해도 소용없어요. 하느님은 그 때마다 우리의 지팡이와 도장과 끈 을 내 놓으실 것이니까요. 우리는 그저 하느님의 은혜 앞에 납작 엎드려 저는 하느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나이다.’라는 항복의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티끌들일 뿐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否認되어지고 우리 안의 예수가 오롯이 드러나는 것이 聖徒의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진짜 창녀는 유다입니다. 그런데 그 창녀인 유다의 구원을 위해 다말이라는 여자가 창녀가 되어 그 진짜 창녀 유다의 죄상을 백일하에 폭로하고 자신은 부끄러운 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짜 창녀들인 우리 대신 이 땅에 창녀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창녀 됨을 가져가시고 십자가에서 창녀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죄를 다 해결하시고 새롭게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이렇게 여전한 창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당당하게 고백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구원 事役에 의해 구원을 받은 것이 야곱, 즉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를 길게 설명해 놓은 것이 요셉의 이야기이기 때문 에 요셉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를 마치 서문처럼 삽입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바로 우리 자신이며 다말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성경은 인간 쪽에서의 모든 조건과 자격을 棄却하고 오직 하느님의 은혜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결론도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나온 쌍둥이 베레스와 제라의 장자 쟁탈전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창세38:28-30) 28 그런데 몸을 막 풀려고 하는데 한 아이가 손 하나를 내밀었다. '이 아이가 먼저 나온 놈이다.' 산파는 그 손을 잡아 진홍실을 매 두었다. 29 그러나 그 아이는 손을 안으로 다시 끌어 들였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아우가 나오자 '이 밀치고 나온 놈!' 하고 산파가 말하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베레스라고 지었다. 30 뒤따라 손에 진홍실을 맨 형이 나오자 그의 이름을 제라라고 지었다.

원래 형이 누구입니까? 제라 입니다. 그런데 제라 가 나오려고 하는데 베레스가 형을 뒤로 하고 먼저 나와 버렸습니다. 제라의 손이 나 왔다가 다시 들어가고 베레스가 나왔다는 것은 그 안에서 베레스가 잡아당겼다는 상상을 하게 합니다. 마치 야곱이 자기 형 에사오의 발을 잡고 나온 것과 흡사하지요? 이렇게 성경에 肉積 長子權자들이 遺棄 되고 차자 우선권이 반복되어 記述이 되는 이유는 하느님의 은혜는 우리 인간들이 상상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부어지게 된다는 것을 暗示하는 것입니다. 육적 장자라는 것은 인간들이 합의 해 놓은, 세상적 가치의 개념으로 볼 때, 가치 있음과 힘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것들을 구원의 근거로 삼지 않으십니다.

인간들이 내놓는 가치와 힘, 심지어 착함이라는 것까지도 하느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filthy rag)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이사 64:6) 하느님은 인간들이 내놓는 그 어떤 조건과 자격도 구원의 조건으로 받으실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 중에 착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구제 사업도 타 종교인들이 더 많이 합니다. 타 종교인들 중에 유명한 인사가 더 많고, 부자도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관계없는 착함, , 명예 모든 것이 악입니다. 자기의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끊임없이 폭로당하고 자기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못한 상태, 自己否認이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모든 도덕적 윤리적 행위는 전부 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그런 착한 삶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가 하느님을 임금으로 대접해 드리는 그 삶 속에서 나오는 진짜 한 삶, 토브의 삶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속사 속에서의 육적 장자의 모델이었던, 율법을 목숨 걸고 지키겠노라 다짐하고 그렇게 행했던 유대인들을 참 포도나무에서 잘라버리시고 차자의 모델이었던 들포도나무인 이방인들을 참 포도나무의 줄기에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세상적 관점으로 볼때 착한 삶을 살던 자들을 잘라버리시고 창녀와 세리와 강도를 건지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탕자의 비유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려 했던 내용인 것입니다. 그렇게 구약에 나오는 차자우선권은 바로 그 참포도나무와 들포도나무의 이야기를 미리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는 그렇게 무조건 적이며, 불가항력적인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아무렇게나 막 살수 있는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은혜의 임금 노릇이 우리의 삶 속에서 치열하게 우리를 이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과 열두아들들의 더러움과 불가능함과 무력함이 폭로가 된 후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본격적으로 이집트로 끌고 가십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있으면 계속해서 가나안 친구 히라와 가나안 여인들의 유혹, 그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의 시험에 빠지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들을 가나안 사람들의 손에서 빼내셔서 이집트로 보내어 종살이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그마나 그들이 자신들의 혈통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배가 부르고 편해지면 항상 엉뚱한 쾌락을 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발을 씻는 자의 삶, 이 세상의 종의 삶으로 우리를 열심히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는 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로 넣으실 수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해 주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여자의 후손의 수난과 수모를 통해 구원해 내시고야 마실 것인데 그 總論으로서의 구원이 이 땅에서 各論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때 우리가 이 세상의 종살이를 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가산적 단어인 총론으로서의 구원이 이 땅의 성도의 삶 속에서 각론의 모습으로, 가산적 현상으로 현실화되어 나타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여인의 후손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여인의 후손을 출산해 내는 산고의 진통, 다말의 수모와 수난의 삶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나타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다말의 이야기 다음에 본격적인 이집트로 몰아붙임의 이야기가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를 구원의 총론으로 이해를 하고 이제 그 다음부터 전개되는 요셉의 이집트과 야곱과 열두지파의 이집트을 구원의 각론, 즉 이 땅에서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의 삶 속에서 현실화 되어 나타나는 다말의 삶이라고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영적 이스라엘, 교회의 다말의 삶이 하느님의 손에 들려 쓰이게 될 때 또 다른 유다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 나라의 확장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쉬운 말로 우리 교회는 다말에 의해 구원을 얻게 되지만 한편으로 다 말의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아주 잘 요약되어 설명되어 있는 곳이 요한묵시록 12장입니다.

(묵시12:1-6) 1 그리고 하늘에는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 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습니다. 2 그 여자는 뱃속에 아이를 가졌으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었습니다.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큰 붉은 용이 나타났는데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고 머리마다 왕관이 씌워져있었습니다. 4 그 용은 자기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리고는 막 해산하려는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그 아기를 삼켜 버리려고 그 여자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5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릴 분이었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느님과 그분의 옥좌가 있는 곳으로 들려 올라 갔고 6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 곳은 하느님께서 천 이백육십 일 동안 그 여자를 먹여 살리시려고 마련해 두신 곳이었습니다.

 

여자인 교회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예수를 낳는다는 이 이야기는 교회가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에서 예수가 출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자인 교회는 여인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적 도래를 인정하고 바라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가 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스스로의 능력과 지혜로 예수의 필연성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여인 앞에서 아이의 출생을 막는 용의 방해입니다. 아담 안에서 자기들의 힘으로 하느님처럼 되어보겠다고 선악과를 따 먹어 버린 죄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합니다. 과학과 문명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전쟁을 하기도 하며, 율법을 지키기도 하고, 착한 일을 내어놓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자꾸 감추고 위장하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아이를 출생하지 못하게 하는 용의 방해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결국 태어나고 맙니다.

그렇다고 여자가 아이를 출산할만한 실력이 있어서 아이가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여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아이를 출산 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래서 아이를 먼저 출생을 시키시고(성육신) 그 후에 여자를 광야로 데리고 가서 천 이백 육십일 동안, 즉 그들의 인생의 기간 동안 그들을 양육 시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출산 할 수밖에 없는 자로의 양육입니다. 그러니까 그 양육은 자기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게 하고, 자기를 부인하게 하며, 하느님의 은혜를 목숨 걸고 희망하는 자로의 양육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여자의 후손에 의해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는(3:15) 우리의 인생 속에서 실제로 예수를 낳는 양육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체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시느라 모든 것을 비우시고 목숨까지 바쳐가며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의 십자가 정신입니다. 그게 올바른 자기부인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낳는다는 것은 그 예수의 정신인 순종의 삶, 십자가의 삶을 사는 자로 성숙이 되어져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인 다말이 예수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가 여자의 후손을 낳기 위해 여자의 후손이 살 십자가의 삶을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말의 삶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상징함과 동시에 그 예수라는 후손을 출산해 내야 하는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삶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을 낳을 여자가 여자의 후손의 삶을 사는 자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도저히 불가능한 유다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다말을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전가 받게 하시고 그 다말을 부끄럽게 죽여 버리심으로 해서 우리를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은 후에도 늘 우리의 지팡이와 도장 과 끈을 폭로 당하면서 살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그렇게 놔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집트로, 바벨론으로 보내셔서 우리를 지켜내십니다.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그런데 그 삶은 이 세상의 종으로 살게 되는 종살이의 삶입니다. 발을 씻기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이끌려 이 세상에서 종으로서의 삶, 발을 씻는 삶으로 인도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또한 다른이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수모와 수난을 감수하는 다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는 확장이 되어 결국에 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뜻을 위해 다말의 순종을 하는 자들로 완성이 되어 라는 우상이 아닌 하느님과 내 이웃의 유익을 위해 나의 수모와 수난을 감수하는 참된 다말들이 될 것입니다. 거기가 완성된 하느님 나라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마치 창녀 같은 모멸과 창피함과 부끄러운 상황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것을 손해보고 있나요?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지금 복된 다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니까요. 아멘.

 

지금까지 창세기를 통하여 바라본 구약과 신약의 연계성을 보면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참 신앙이 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때로는 글이 너무 길어서 중간을 생략할까도 했어요.

그래도 읽고 익히실 분들은 다 읽을실 걸로 보고 그냥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느님 백성 되세요. 살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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