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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6.02)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2 조회수2,567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8년 6월 2일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제1독서 유다 17.20ㄴ-25

17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고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20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21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22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23 어떤 이들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살에 닿아 더러워진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
24 여러분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당신의 영광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기쁘게 나서도록

해 주실 수 있는 분,

25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 하느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과 위엄과

권능과 권세가 창조 이전부터,

그리고 이제와 앞으로 영원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 마르 11,27-33

그 무렵 예수님과 제자들은

27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28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31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32 ‘사람에게서 왔다.’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33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언젠가 초등학교 친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거의 30년 만에 만난 친구였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소위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동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아이가 초등학교 때에는

공부도 잘 못하고

찌질이 같았는데,

 어떻게 성공한 거지?”
그러면서 계속 예전의

자신보다 못했던 점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긴 이때 만난 친구가

초등학교 때에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서 선생님이나

아이들에게 인기가

참 많았습니다.

반장도 했었고

상도 많이 탔었지요.

 그에 반해서 소위

성공했다는 친구는

 초등학교 때에는 그렇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는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한 명은 매스컴에도

자주 나오면서 화려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반면,

이 친구는 지방 공무원으로

매일 반복되는 업무에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모습이 성인이

되어서도 똑같아야

공평한 삶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변합니다.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예전의

기억만을 떠올리면서

성공한 친구에 대한 흠집

내기만을 하고 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의 책 ‘불안’에서

이런 글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의 성공이다.”
성공을 좋아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나의 성공을 좋아하지

남의 성공에 대해서는

그리 반갑지가 않습니다.

특히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성공을 목격할 때

 더욱 더 그렇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나보다 부족해

보이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가까운 이웃이 잘 되면 그렇게

배가 아플 수가 없습니다.

 바로 시기심과

열등감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는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을

왜 반대했을까요?

 예수님의 행동 중에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보잘 것 없는 나자렛 출신의

 목수라는 과거에만

얽매어 있습니다.

자신들과 같이 율법을

특별히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여주는 놀라운

말씀과 행적에 시기심과

열등감에 빠지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요?

율법에 관해 객관적으로

 아무리 많이 알았더라도

이 시기심과 열등감이

믿음을 갖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시기심과 열등감을 갖게 되면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이는 내 이웃을 향한

나의 시선에도 해당됩니다.

그 시기심과 열등감이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는 곧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활동하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게 될 때,

주님께서도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기심과 열등감에

쌓여서 진리를 피했던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나도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끝까지

굳세게 밀고 나가라.

(로잘린 카터)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행복은 작습니다."

(‘좋은 글’ 중에서)

행복은 작습니다.

거창하고 큰 것에서

찾지 마세요.

 멀리 힘들게 헤매지 마세요.

비록 작지만 항상

당신 눈앞에 있답니다.
행복은 이기적입니다.

자신을 돌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남의 시선 따위는

무시해 버려요.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도 도울 수 없답니다.
행복은 연습입니다.

그냥 주어지는

행운의 복권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노력하고 연습해야

얻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행복은 습관입니다.

하나씩 날마다 더해가는

익숙함이랍니다.
행복은 투자입니다.

미래가 아닌 현실을 위해

남김없이 투자하세요.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내일도 마찬 가지입니다.
행복은 당신입니다.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당신입니다.

변함없이 사랑하는 당신입니다.

이미 당신입니다.

 

 

 

 

 

 

이 등을 보면서도 행복을 느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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