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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은 당신에게 필요한 절반입니다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2 조회수2,146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8년 나해 성체성혈 대축일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은 당신에게 필요한 절반입니다>



복음: 마르코 14,12-16,22-26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다.


 (1400)



 


한 아이의 어머니이자 이혼한 아내의 글이 뉴스에 올라와 읽어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운전을 하다가 자살충동을 느껴 몇 번이나 길을 벗어나려다가 마지막 순간에 핸들을 꺾었습니다. 어머니의 아픔은 유일한 중학생 아들 때문입니다. 학교에 가지 않으려하고 자퇴하겠다고 말하며 교복을 입은 채로 몇 시간씩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아들은 엄마를 폭발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퇴근 후 집은 항상 전쟁터가 됩니다. 아들 초3때 이혼하였지만 아들은 엄마의 노력으로 잘 성장하는 듯 보였습니다. 특별한 문제도 없었고 관계도 좋았으며 통장엔 돈이 쌓여갔습니다. 싱글 맘이 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사춘기에 접어들기까지 마음속에 엄마에 대한 원망을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밖에 있을 땐 얌전한 학생인데 집에만 오면 180도 돌변합니다. 차라리 TV라도 보고 컴퓨터 게임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집을 미친 듯 어지르고 그 무더기 위해 몇 시간씩 누워서 천정만 바라봅니다. 울어봐야 아들은 본척만척합니다. 혼자만의 싸움에 지쳐 가끔씩 이혼한 남편이 생각납니다.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고 무관심한 가장의 모습에 지쳐버려 이혼을 했지만 지금은 남편이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아내는 자존심과 감정을 다 버리고 남편에게 연락하였습니다. 아이의 마음이 지독한 감기에 걸렸으니 아들과 자신 사이에 잠시만 서 있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남편이 밖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얼마의 빚을 져서 자신에게 불똥이 튈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남편은 특유의 무심함으로 쿨하게 아이와 소통도 하고 큰 소리 안 내고 학교에 보내고 오후에 같이 외출도 합니다.

엄마는 퇴근 후 두 남자에게 아무 말도 안 건네고 방으로 들어와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 불안한 마음도 없지는 않지만, 두 남자가 함께 텔레비전이라도 보고 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저녁은 두 남자의 대화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합니다. 이 편안함 속에 결혼에 실패했는데, 이젠 이혼에도 실패하게 되지는 않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출처: ‘내겐 짐, 아들엔 힘... 남편을 어떡하지’, 조선일보, 2018.06.01]

 

엄마의 사랑이 아무리 커도 아빠의 사랑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는 엄마 반, 아빠 반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혼자만의 작품이 아닙니다. 그래서 엄마의 사랑 반, 아빠의 사랑 반으로 성장해야합니다. 몸만 태어났다고 해서 태어 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사회에 우뚝 설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갈 길이 멉니다. 아기가 잉태될 때 둘이 23개씩 주는 유전자에 조금이라도 부족한 것이 있으면 아기가 온전할 수 없듯이, 자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의 사랑만으로는 온전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아마 혼자만으로 자녀에게 충분한 사랑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느님께서는 아메바처럼 무성생식으로 자녀를 낳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녀에게 주는 사랑은 항상 자녀가 필요한 사랑의 양의 1/2입니다. 나머지 반은 나의 배우자에게서 채워져야 합니다.

사람은 아빠 반, 엄마 반으로 태어나지만 그건 육체에 관한 이야기이고 또한 사람 반, 하느님 반으로 태어납니다. 육체는 인간에게서 영혼은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엄마, 아빠, 하느님의 사랑을 동시에 받지 않는다면 어딘가 부족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주 불운하게도 부모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을 하나도 받지 못하면 유영철이나 신창원 같은 동물의 수준에 머무는 사람이 탄생됩니다. 아기가 정글에 버려져 동물들 속에서 자란 것과 같습니다. 그런 아기는 인간의 사회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매우 다행히도 한 부모의 사랑만 받았다면 아이는 그 부모의 기대대로 자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못하여 배고픔을 느낀다면 오히려 자신을 키워준 홀 부모를 원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음식을 먹어야하는데 어떤 사람 때문에 그 음식을 평생 절반만 먹어야 한다면 그렇게 만든 당사자를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당사자가 음식의 반을 제공해주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예는 너무도 많은데 아이를 홀로 키우며 전국 1등을 바랐던 어머니가 고3 아들에게 살해당한 경우도 그렇고, 홀로 키운 아들을 빼앗겼다는 마음에 며느리를 못살게 굴다가 결국 며느리가 자살하여 아들이 어머니와 연을 끊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평생 자신이 희생만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자녀들이 이 홀 부모를 위해 희생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다 받았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많은 전직 대통령들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큰돈을 횡령하여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부모님의 온전한 사랑을 받았을지라도 세상에 속한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자신들도 세속적인 자녀들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원숭이에게서는 원숭이가 나오고 개에게서는 개가 나옵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 집착하여 세속-육신-마귀, 즉 돈-쾌락-교만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더 모으려하고 더 자신의 배만 채우려하며 더 높아지려고만 하는 욕망은 정글의 법칙에서 나오는 동물의 속성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인간은 그저 두 발 달린 동물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느님으로부터도 사랑을 받아야합니다. 사람 사랑 반, 하느님 사랑 반으로 채워져야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님과 같은 분들은 사람의 사랑 반, 하느님의 사랑 반을 받은 분들입니다. 이들이 세상을 유지시키고 세상에 공헌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한 부모는 아무리 잘 키워야 반쪽 인간만을 만들뿐입니다.

 

오늘은 거룩한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성체도 그렇지만 성혈도 사랑을 상징하고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전부인 살과 피를 주시는 것은 맞지만 예수님은 동시에 아버지께도 당신 자신을 바치시고 계십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당신 피인 성령을 주시는 동시에 아버지께도 당신 영을 바치십니다. 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지만 성령은 우리 안에서 샘물이 되어 하느님께도 드려지고 이웃에게도 줄 수 있도록 당신 사랑을 증폭시키십니다. 이는 마치 아내가 남편에게 줄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녀에게 줄 사랑도 동시에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계약을 맺을 때 모세는 소를 잡아 그 피를 절반은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 절반은 여러 그릇에 담아 백성에게 뿌렸습니다. 소는 자아를 상징하는데 내 자신이 죽으며 아래와 위에 동시에 그 피를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희생은 우리를 위한 피 흘림인 동시에 우리 죄를 위해 아버지께 봉헌하는 피 흘림인 것입니다.

피는 곧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입니다. 내가 사랑을 반으로 쪼개어 남편과 자녀에게 나누어 줄 때 그것은 부족한 반반의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전한 사랑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라면 자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됩니다. 사랑을 반으로 쪼개어 나에게 사랑을 주신 분께 보답하고 그 사랑으로 태어난 자녀를 위해서도 주어야하지만 결국 그 반쪽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이 되어 자녀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의 사랑으로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면 나의 사랑을 반으로 나누어야합니다. 아내가 남편도 사랑하고 자녀도 사랑해야 자녀가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동시에 받을 수 있어 온전해집니다. 아내가 자신이 사랑만으로 자녀를 충분히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면 자녀는 아빠의 사랑을 받을 수 없어 삐뚤어지게 됩니다. 남편에게 돈을 받으면 반은 자녀를 위해 쓰고 반은 남편을 위해 써야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에너지를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반반 나누어 써야합니다. 시간의 반을 기도하는데 쓰고 나머지 반을 이웃을 위해 써야합니다. 그래야 내 이웃에게 부족한 하느님의 나머지 반쪽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내가 주는 사랑은 항상 상대에게 반쪽밖에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싶으면 나의 에너지 반은 하느님을 위해 써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체성혈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동시에 하느님 아버지께도 바쳐지는 제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만 주시기로 하였다면 하느님으로부터는 사랑을 받지 못해 우리는 반쪽의 불완전한 인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항상 나의 사랑을, 마치 모세가 피를 반으로 나누어 하느님과 백성에게 뿌린 것처럼, 위와 아래로 반씩 나누어 뿌려야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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