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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6.07)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7 조회수2,188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8년 6월 7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제1독서 2티모 2,8-15

사랑하는 그대여,

8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9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12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13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경고하십시오.

그런 짓은 아무런 이득 없이,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따름입니다.

15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복음 마르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예전에 꼬마아이들이 쓴

예수님께 바치는 기도를 읽는데

 한쪽 귀퉁이에 삐뚤삐뚤 그려진

사랑의 표시인 하트와 함께

“예수님, 사랑해요.”라는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 어린 아이의 손으로 하트를

 그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동그란 원도 아니고

각이진 네모도 아닌,

하트의 위쪽에는 움푹 들어간

골짜기가 있으니까요.

이것을 어린 아이가

그리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문득 사랑의 표시인 하트를

 왜 이렇게 표시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사랑에는

굴곡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이 무조건 좋은 것만을

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무조건 행복한 시간을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이 사랑을 통해 상대방으로부터

오히려 아픔과 상처를 받을 수

있는 굴곡도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사랑을 무조건 좋은 것,

예쁜 것, 내게 도움이 되는 것만으로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아픔을 겪게 되면

“이건 사랑이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쉽게 헤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엄마에게 딸이

“엄마는 아빠를 왜 사랑해?”

라고 짓궂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글쎄. 뭐 그냥 사랑하는 거지.”
이 ‘그냥’이라는 말에서 상당한

무게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유를 딱히 댈 수 없다는

‘그냥’이라는 말에서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상대가 내게 좋은 것을 주지 않아도,

 또 내 마음에 아픔과 상처를 주어도

‘그냥’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께서는

“첫째는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고 답변하십니다.

 이 답변을 통해 우리는

 ‘그냥’ 무조건 사랑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분리해서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분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 안에 하느님께서 계실까요?

계시지 않을까요?

분명히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이웃 안에 계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은 어떻게든

사랑하라는 것, ‘그냥’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에 아픔과 슬픔이 있어도,

사랑에 굴곡이 있어서 어렵고

힘들어도 그냥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제대로 따르는 것이고,

또한 주님으로부터 우리 역시

 ‘그냥’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위해

까치발로 서는 것이다.

우리도 누군가의

까치발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다.

(김이율)


하트에는 굴곡이 있습니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무 열두 그루를 심고서

그 나무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이름을 써 붙였답니다.

그러자 ‘유다 이스카리옷’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나무만 점점

죽어가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히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스의

이름을 적어서 그랬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나무를 향해서

오가며 저주의 말을 뱉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계속 들은 나무는

점점 말라갔던 것이지요.
실제로 좋은 말을 들은 나무와

나쁜 말을 들은 나무는 성장이

다르다고 합니다.

 즉, 한 그루의 나무 역시

사랑 없이는 제대로

자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물며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부정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말을 많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힘이 되는 사랑의 말을

많이 해줘야 합니다.

 내 가족, 내 이웃,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사랑의 말을 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 안에 사랑이

 가득하게 되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그냥’ 잘 살 수 있습니다.


어제 공장 축복하고 왔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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