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예배 (禮拜) (요한 4.20-2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13 조회수2,002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예배 (禮拜)

(요한 4.20-24)

20 그런데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렸는데 선생님네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22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 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유다인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24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아멘

 

우리는 지난번에 진정한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를 얻기 위해 우물가로 한걸음에 달려오시는 하느님의 열심을 보았습니다. 아주 몸이 피곤하여 우물가에 털썩 주저앉으실 정도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셨다 그랬죠? 자 우리는 주님께서 반드시 사마리아로 가셔야만 했다라는 구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이미 창조이전에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보았구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니 남편을 데려와라라는 그 주님에 질문을 통해서 타락한 인간들이 하느님으로 채워져야 할 그들에 목마름을 이 세상에 엉뚱한 것들로 해갈하려 한다라는 것도 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일일이 찾아가셔서 그들에 목마름을 당신에 피로 해갈을 해주신다라는 것이 바로 복음이죠 굿뉴스. 하느님의 을 상실한 모든 인간들은 목이 마릅니다.

인간은 원래 하느님을 의존하여 살도록 지어졌어요 절대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 떠나 버린 그 인간에 빈자리는 늘 목마름으로 남게 되는 거죠. 그 목마름은 오직 하느님의 恩惠矜恤로만 채워질 수 있는 목마름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모두 눈이 멀고 귀가 먹었기 때문에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찾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들은 이 세상에 것들로, 영원한 것들이 이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들로 그 목마름을 채우려고 노력을 하게 된 거에요 그 하느님이 빠져 버린 목마름이 엉뚱한 방향으로 이제 변질이 되어 버린 거에요 그 대표적인 것들이 돈, 명예, 이성, , 마약, 도박, 취미, 운동, 우상, 인기, 철학, 이런 것들이에요 사람들은 그런 것들로 자신들에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일생을 虛費하면서 사는 거에요 이 사마리아 여인에 이야기에서 다섯명에 남편과 한명에 그 동거남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타락한 인간들에 잘못된 해갈 방법을 하나에 로 지적하고 있는 거에요.

 

하느님은 왜 인간들에게 그 목마름이라는 것을 남겨두셨을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왜 하느님은 인간들에게 그 목마름이라는 그런 어떤 갈망을 남겨두셨을까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목마름이 남아있다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목말라 하고 계신다라는 증거라는 것을 알았어요

14 ''야훼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고 너 시온은 말하였었지. 15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49,14-15)

애기엄마가 혹시 애기를 잊을지는 몰라도 그건 도저히 안되는 거지만 그럴지라도 나는 너희를 절대 잊을 수가 없어 라고 하느님이 우리를 향해 목말라 하시는 거죠

8 에브라임아, 네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남에게 내어 주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만들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나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 (호세11, 8)

그죠? 하느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해 자비와 사랑을 쏟아 부으시고 싶으셔서 그들을 향해 얼마나 목말라 하고 계신지 너무나 절절하게 기록이 되어 있잖아요

3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4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5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출애20, 3-5)

 

17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의 머리에는 '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 하신 성서의 말씀이 떠올랐다.(요한2, 17)

이게 질투라는 말하고 똑같은 말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질투하시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당신에 백성을 향하여 열심을 부리시는 하느님이라고 번역을 해야 맞는 거에요

이것은 열심이라는 뜻입니다 질투라는 것은 어떤 비교대상이 있을때 일어나는거 아니에요 그죠 그런데 하느님께서 질투하시는 대상이 누구일까요 바알. 아세라. 여러분 진짜 그런 신들이 있나요? 없죠. 우상은 인간들이 자신들에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들이에요 따라서 하느님께서 질투를 하신다라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를 부으시고 싶으셔서 우리를 향해 열심을 부리시는 것 이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맞아요.

하느님은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목말라 하고 계셔요 그래서 우리가 목이 마른 것입니다 우리가 목이 마른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향해 갈증을 갖고 계시다라는 증거란 말이에요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나하나 하느님께로 돌아올때 하느님에 갈증은 해갈이 되는 것이고 우리도 그리로 돌아갈때 비로소 갈증이 해갈이 되는 거에요 그게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엉뚱하게도 이 세상에 것들로 그 갈증에 해갈을 變異시켜버린 거에요 그러한 잘못된 갈망 중에서 아주 가장 악한 갈망의 변이가 바로 그릇된 禮拜인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목이 마르니 물좀 주겠느냐?라는 질문에서 부터 시작해서 생수의 이야기로 생수에 이야기에서 남편에 이야기로 그 남편에 이야기에서 예배에 이야기로 이렇게 이야기가 점점 展開되어져 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한 개인에 잘못된 해갈에 변이에서 전 인류에 해갈 변이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지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내가 목이 마르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 하느님에 백성들에 목마름에 정체를 들어내시고 당신께서 그 목마름으로 죽으시고 우리에게 해갈을 선물하실 거라는 주님에 의지를 교회들에게 암시하셨어요. 그리고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약속하시는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에 해갈 방법이 크게 잘못되어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줄께 니들이 먹는 거는 다 틀린 거야 라고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여인에 잘못된 해갈방법을 폭로하시는 그 장면에서 우리 인간들에 잘못된 그 해갈 방법에 구체적인 모습을 본거에요. 그리고 이제 조금더 구체적으로 그 잘못된 해갈 방법이 어떻게 인류 전체에게 편만하게 퍼져 있는지가 오늘 본문이 이야기에 담겨 있는 거에요

 

여러분들은 예배라고 하면 그리스도교에 어떤 형식적인 예배 儀式만을 떠올리는데요 아니에요. 예배라는 것은 이 세상에 모든 인간들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가 뭐에요 worship 이란 말이죠 자기가 가장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인생에 중심에 올려놓는 행위를 월쉽(Worship)禮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인들도 예배를 해요 그들은 그 예배를 예불이라고 하죠. 이슬람 교도들도 알라를 예배합니다 하루에 다섯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메카를 향해서 절을 하는 그들에 모습은 가히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을 부끄럽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그런 이슬람 교도들의 예배의 한 모습이잖아요. 힌두교인들도 그들의 신을 예배해요.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예배를 합니다 누구를 예배할까요 자신을 자기 인생에 가장 중요한 위치에 올려놓고 그들은 자신을 예배한다구요 그러나 다른 모든 종교들도요 결국에는 자신을 예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가 있어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세상에 모든 종교들은 전부 자기 자신에 유익을 위해서 어떤 힘있는 존재에 도움을 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들이 섬기는 것은 그들이 부르는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 거에요.

타락한 인간들이 각기 다른 신에 이름을 부르면서 각기 다른 예배에 형식을 통해 그들에 신에게 예배를 하지만 결국 그들에 공통된 목적은 자신에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한 자기 유익인 거에요. 모든 인간들에 목마름은 그렇게 여러 모양에 예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예배, 잘못된 예배를 지금 여기서 지적하는 거에요.

 

타락한 인간에 대표자 자격으로 등장하는 카인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로 묘사되는지 아십니까? 타락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 유익과 자랑을 위해서 자기 자신이나 우상에게 예배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우스운 것은 하느님을 예배한다라는 그러한 자들에 예배의 목적도 자신에 노력과 열심을 통한 절대자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어떠한 유익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인 거에요 성경은 그러한 것들을 모두 뭉뚱그려 우상숭배라고 불른다 말입니다

4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출애 20, 4)

우상에 정의 전제가 뭐에요 너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만든 것을 偶像이라고 하지요.

1 백성은 모세가 오래도록 산에서 내려 오지 않자, 아론에게 몰려와 청하였다.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출애 321)

금송아지를 가리켜 우리를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그걸 뭐라 그래요 偶像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자기를 위하여 만들어낸건 전부 우상인 거에요 이렇게 모든 인간들은 자신에 욕망과 욕심을 위해 무엇인가에게 예배를 하는 자들인 거에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우상숭배를 뭐라고 정의하죠? 탐욕(貪慾)이라고 정의하잖아요 그게 우상숭배라고 그러는 거에요

 

 예배란...(원어의 뜻)

5 여러분은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십시오. 음행과 더러운 행위와 욕정과 못된 욕심과 우상숭배나 다름없는 탐욕 따위의 욕망은 6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진노를 살 것입니다. (골로35)

단순히 단군신상 세우고 거기다 절하는거 이런것만 우상숭배 아니고 모든 자기를 위한 탐욕에서 나온 모든 행위는 다 우상숭배다 그러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당에서 여러분이 하느님을 이용해서 어떤 유익을 얻을려고 지금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느님 섬기는 자들 아닌 것입니다 우상 숭배하고 있는 거죠

원래 우리 인간들은 하느님을 가장 가치있는 자리에 올려 드리고 그분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의뢰하며 그분에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께 찬양하는 자로 즉 예배하는 자로 지어진 거에요 그게 우리에 창조에 목적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밑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예배하는 자로 서는게 우리에 창조에 목적이래니깐요 하느님은 그 올바른 예배 자리로 당신 백성들을 이끄시기 위해 인간에 타락을 허락하시고 그들에게 타락한 자들에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겪게 하시고 그들을 은혜로 구원해 내시는 역사라는 것을 허락하신 거에요. 하느님은 그분백성들에게 그러한 경험을 하게 하시므로 그들을 진정한 예배자리로 이끄시는 거에요. 모든 인간들이 하느님의 은혜가 떠난 모든 인간들이 엉뚱한 예배자리에 서 있는데, 자기 자신을 그 중심에 놓고 자기 자신을 예배하는 자로 서있는데 하느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뚫고 들어가셔서 하느님을 예배하는 자로 만들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라니깐요.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메시아를 약속하셨어요 창세기 315절에서 여인에 후손으로 너희는 살리라 라고 약속하셨단 말입니다 그리고 왜 4천년이라는 기간을 긴 시간을 끄셨습니까?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에덴동산에서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4천년이 걸렸다구요. 하느님이 약속하셔놓고 왜 그렇게 시간을 길게 끄셨어요 금방 보내실 수 있었잖아요 그 다음세대나 그 다음세대 보내실 수 있었는데 왜그렇게 긴 시간을 약속으로 그냥 유보시켜 놨을까요? 하느님은 고 시간동안에 우리 인간들에 죄성, 하느님에 은혜가 떠난 인간들에 죄악상을 폭로하시는 거에요. 우리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보여주시는 거에요 우리 교회에게 그 역사 전체를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은 그 기간을 통해서 하느님에 절대적인 주권을 보여주시고 또 인간들이 스스로에 힘으로 열심히 자기들을 구원할려고 그리고 행복해 질려고 노력하는 그 모든 시도들이 다 꽝이다 라는 것을 그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직접 경험하게 해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역사가 이렇게 길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심지어 인간들에게 율법까지도 주시죠 인간들이 기고만장해서 하느님 당신이 나에게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만 해주면 내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라고 인간들이 하느님께 대들었단 말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그래 한번 줘볼께 라고 주신게 시나이산 율법이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전혀 못지켰어요 그렇게 율법까지도 주어 보시면서, 누구에게? 이 땅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주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못 지켜냈단 말이에요 역사가 그거를 인제 증명해 낸 것입니다 폭로해 낸거죠. 너희들은 안돼. 그래서 하느님의 은혜로만 너희들은 에배자에 자리로 갈 수 있어 이걸 우리에게 경험하게 해주는 거에요

 

우리는 이 역사와 인생을 통해서 그것을 체험하고 아 우리는 안되는구나 우리는 하느님은혜 아래 납작 업드려 부복하여 그분에 말만 잘 들어야 되는 거구나 그분을 섬겨야 되는 거구나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 주신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이 감사한 일이냐 라고 찬양하고 자랑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모여 사는 곳 그곳을 天國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우리 성도들이 지향해야 하는 진정한 예배에 모습은 어떤 걸까요 하느님께서 올바른 예배와 그른 예배에 모습을 최초로 설명해 주신 곳이 바로 창세기 4장이에요 자 볼까요

3;22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끝없이 살게되어서는 안 되겠다' 고 생각하시고 23 에덴 동산에서 내 쫓으시었다. 그리고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짖게 하셨다. 24 이렇게 아담을 쫓아 내신 다음 하느님은 동쪽에 거룹들을 세우시고 돌아 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 4;1 아담이 아내 하와와 한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외쳤다.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2 하와는 또 카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카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3 때가 되어 카인은 땅에서 난 곡식을 야훼께 예물로 드렸고 4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드렸다. 그런데 야훼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5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지 않으셨다. 카인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야훼께서 이것을 보시고 6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느냐? 7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어야 한다.' (창세 322절부터 47절까지)

 

이 구절을 곡해하시는 분들이 하느님은 정성이 담긴 피있는 제물을 원하시기 때문에 곡식으로 드린 카인에 제물은 받지 않으셨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하는데요 이 부분은 제물에 종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거에요. 카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는 둘다 감사제에요 히브리어로 민하라고 하죠. 그 감사제는 양을 드려도 되고 곡식을 드려도 되는 그런 제사에요 그러니까 이 부분은 적어도 제물에 관한 문제제기는 아닌게 확실한 거에요

하느님은 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서 禮拜에 대해서 정의를 하고 계신 거에요 여러분 창세기 3장 말미에서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흙을 경작하도록 명령하시죠? 그런데 그 흙을 묘사하는 형용사가 根本된 이라는 단어에요 근본된 토지를 갈아라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아담이 경작해야 할 땅은 흙은 흙인데 아담에 근본이 된 흙이라는 뜻이에요. 그 말은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흙을 경작하라고 하신 이유가 너는 하느님이 아니라 흙에서 근본된 자라는 것을 직시하며 하느님처럼 되려했던 그 죄를 회개하라는 것이였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래서 너는 근본된 토지를 갈아라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이야기 바로 뒤에 이어지는게 바로 카인과 아벨에 이야기인 거에요

하느님은 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얼 이야기를 하실려고 하는 거냐 하면 하느님은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서 흙을 경작하게 된 일과 카인과 아벨에 이야기를 통해서 아벨은 아담이 흙을 경작하면서 자신에 본질을 직시하며 하느님에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던 일을 회개하며 살았던 것처럼 살았기에 하느님은 그에 제사를 그에 예배를 받으신 것이다라는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해 근본된 흙을 경작하라는 저주 이야기뒤에 카인과 아벨에 이야기를 붙여 놓은 거란 말이에요. 이걸 장으로 나누어서 따로 읽게 되어 버리면 그런 곡해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 속에 담긴 복음!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받으신 아벨의 제사를 그냥 제사라고 하지 않고 아벨과 그에 제사라고 표현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받은 아벨의 제사는 그 제사에 형식이나 그 제사에 쓰여진 제물이 아니라 바로 아벨이라는 사람에 인격을 받으셨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인격이 어떤 인격이냐하면 아담에게 주어졌던 그 저주를 이해를 하고 나는 죄인이며 나는 하느님에 은혜만을 바랄 수 밖에 없습니다라는 의미로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경배했던 그 아벨에 인격을 받으셨다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올바른 예배는 내가 하느님에 자리에서 내려와서 하느님에 은혜가 떠난 나는 이 흙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나에게는 하느님에 은혜가 주어지지 않으면 절대 나는 행복할 수 없고 만족할 수 없고 이 목마름을 해갈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그 앞에 서는 거, 그것을 예배라고 한다 말입니다.

성경은 올바른 예배와 그릇된 예배를 딱 그거 한가지로 갈라내고 있다 말이에요. 카인에 예배는 자기는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것을 직시하고 그 하느님 아래 납작 엎드려서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기에 저는 예배를 합니다라는 마음에서 드린 예배가 아니라 자기가 노력하고 또 자기가 행한 행위로 말미암아 그 상대방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에서 드려지는,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어떤 반대급부를 받아 자기의 유익을 챙길려고 하는 그러한 마음에서 드려지는 예배였기에 카인에 예배를 잘못된 예배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하느님은 카인에 제사를 안받으신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어요? 하느님께서 그 제사를 안받자 카인이 되게 불쾌하게 여긴다구요 진짜 아벨에 자리에서 아담에 자리에서 하느님 나는 흙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만을 구해야 하는 흙입니다라는 그런 자세로 예배를 드렸다면 하느님이 안받으셨다고 하더라도 할말이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카인은 얼굴을 붉혔다구요 대들었습니다 하느님께 왜 내 정성을 안받아 주냐는 거에요 그러니까 고건 잘못된 예배라구요. 그렇게 나를 위해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항상 하느님을 예배하느라 자신을 비우고 죽이는 고러한 참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이 땅에서 항상 힘으로 때려 죽이게 되어 있다라는 것이 바로 카인과 아벨에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땅에서 그렇게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로 지금 거듭났다면 고렇게 자기를 예배하는 이 세상사람들에게 맞아 죽는 모습으로 이 땅에서 보여지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라는 것은 자신을 우주에 중심에서 끌어 내리고 자신이 하느님에 은혜 아래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에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겠노라고 나선 자들에 그 모든 행위 그것을 예배라고 하는 거에요 그렇지 못하고 자신에 유익과 자랑과 만족을 위해 드리는 어떠한 행위도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해갈의 그 변이를 지적하시는 남편의 이야기 다음에 예배의 이야기를 이렇게 이어서 붙여 놓고 있는 거에요 아시겠죠?

왜 남편의 이야기 바로 다음에 갑자기 예배 신령과 진정에 예배이야기가 붙어 있는가 그러한 이유에서 그런 거에요 고 남편에 이야기와 예배의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란 말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주님과 그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예배가 어떻게 인간 갈망에 가장 악한 변이일 수 있는 가를 제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짚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420절에 20 그런데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렸는데 선생님네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죠 여기서 이 여인이 말한 이 산은 그리짐산을 말하는 거에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유대 사람들이 자신들을 짐승취급하면서 성전에 접근을 막자 자기들 나름대로 그리짐산에다가 성전을 짓고 그 곳에서 제사를 드렸어요 그리고는 그리짐산에 있는 성전이야 말로 진짜 성전이라고 우겼습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12장에서 하느은 한 장소에서만 예배를 받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둘 중에 하나는 가짜여야 되거든요 그래서 서로 자기들이 진짜라고 우겼단 말이에요

10 너희가 요르단강을 건너 들어가서 야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물려주시는 땅에 자리를 잡으면, 하느님께서는 너희로 하여금 주변에 있는 원수들에게 위협을 받지 않고 편히 살게 해 주실 것이다. 11 그렇게 되거든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골라 주신 곳으로 내가 명령한 모든 것, 번제물과 친교제물과 십일조와 흔들어 바치는 예물과 고르고 골라 야훼께 바치는 서원제물을 가져다 바쳐라. 12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를 모시고 그 앞에서 즐겨라. 너희뿐 아니다. 너희 아들 딸, 또 너희 남종과 여종, 또 너희처럼 유산으로 받은 몫이 따로 없이 너희 성문 안에서 사는 레위인들도 함께 즐기게 하여라. 13 부디 명심하여 눈에 든다고 아무 데서나 번제를 드리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14 야훼께서 너희 중 한 지파에서 한 곳을 고르실 터이니, 그 곳에서 만 번제를 드리고 내가 너희에게 지시한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다.(신명1210-14)

그러죠 이렇게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전은 한곳이여야 되요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과 남유대 사람들은 서로 자기네 성전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그곳이라고 우겼던 거에요 그러면 먼저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네 그리짐산이 진짜 하느님이 지정하신 예배에 장소라고 우기게 된 배경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126-86 아브람은 가나안 땅을 거쳐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세겜 성소에 이르게 되었다.(지금 사마리아 여인이 있는 곳 세겜 땅이란 말이에요) 그 때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7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어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고 하셨다. 아브람은 야훼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셨던 그 자리에 제단을 쌓아 야훼께 바쳤다. 8 아브람은 그 곳을 떠나 베델 동쪽에 있는 산악지대로 옮겨 가서 서쪽으로는 베델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아브람은 거기에 제단을 쌓아 야훼께 바치고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를 드렸다

여기서 단을 쌓았죠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봐라 아브라함이 여기서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냐? 그러니까 여기가 진짜다라고 우겼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아버지격인 야곱도 세겜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단 말이죠 그걸 또 증거로 내놓아요 창세기 3318-20절 보세요 18 야곱은 바딴아람을 떠나 마침내 가나안 땅 세겜 마을에 무사히 이르러 그 앞에 천막을 쳤다. 19 야곱은 자기가 천막 친 땅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백 냥을 주고 샀다. 20 그리고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제단을 '이스라엘의 하느님 엘' 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여리고가 무너진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치른 첫번째 전쟁이 뭐죠 아이 전투죠 거기서 이긴 다음에 여호수아가 어디에 단을 쌓았어요?여호수아 830-31절 보세요 30 그 후 여호수아는 에발산 위에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 바치는 제단을 쌓았다. 31 그는 야훼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한 대로 하였다. 그들은 모세의 법전에 기록된 대로 쇠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생돌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다가 야훼께 번제물을 올리고 친교제물을 잡아 바쳤다.

그리짐산하고 에발산은 붙어 있어요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은 우리들이 진짜다 그랬단 말입니다 야 너희들이 지금 우기는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때 아브라함으로부터 천년후에 여호수아로부터 500년 후에 지어진거 아니냐 우리는 그 전부터 단을 갖고 있었다라고 우긴거죠 그러나 성경은 북 이스라엘 이였던 사마리아에 지어진 제단을 전혀 인정하지 않아요. 오히려 성경은 사마리아 땅에 지어진 그 제단에 계보를 일관성있게 연계하여 기록함으로 해서 그 제단은 우상숭배에 표본 이였음을 밝힙니다. 북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거스려서 자신들에 땅에 성전을 지은 것은요 바벨론 포로 이후에 처음있었던 일이 아니에요 그 전에도 이미 여러차례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225-31절 보시면 25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세겜을 수축하고 거기에서 살다가 그 후 브누엘을 세우고 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26 그런데 여로보암은 스스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라가 다윗의 왕가로 넘어갈지도 모른다. 27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야훼의 전에 제사하러 올라 가다가 마음이 정통상전인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쏠리는 날에는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 돌아 갈 것이다.' 28 이스라엘 왕은 궁리 끝에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였다. '예루살렘에 제사하러 올라 가기란 번거로운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를 에집트에서 구해 주신 신이 여기에 있다.' 29 그리고 금송아지 하나는 베델에,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다. 30 그런데 이 일이 죄가 되었다.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예배하러 베델과 단에 갔다. 31 왕은 또한 언덕에 산당들을 짓고 레위지파가 아닌 일반백성 가운데서 사제를 임명하였다.

 

  황금 송아지

솔로몬 신하였던 여로보암은 솔로몬이 성전을 짓느라 세금을 많이 거두고 사람들을 동원하는 것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에 불만을 막 부추겨갖고 유다지파와 벤야민 지파를 뺀 나머지 열지파를 규합해서 BC 930여년에 북이스라엘을 세우죠. 그리고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남유대 예루살렘으로 드나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북이스라엘땅인 베델과 단에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제사를 지네게 만들었어요 이게 하느님이다 그랬대니깐요 금송아지,그리고 이게 너희를 이집트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다어디서 본 거에요 시나이산에서 본거잖아요 그죠? 시나이산에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는 너희를 이집트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다라고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땅인 그리짐산에 세워진 그 제단은 바로 요런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이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을 예배하던 그리짐산에 제단은 시나이산에 금송아지와 베델과 단에 금송아지와 같은 줄기에서 나온 거죠. 그러니까 그리짐산에 예배는 우상숭배에 줄기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거에요 그래서 그 산은 하느님을 에배하는 장소로 적합하지 않은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리짐산은 아니다 그런거죠. 이 산도 아니다 라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리짐산은 아니고 예루살렘에 시온산이 맞다 라고 대답을 해주셔야 맞지 않아요 그런데 뭐라 그러죠 본문 2121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러죠

주님은 그리짐산도 아니고 시온산도 아니라고 그래요 물론 예루살렘에서의 제사는 하느님께서 지정하여 주신 제사였어요 그러나 그 제사는 진정한 재물이시며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였고 豫表하는거였잖아요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제사를 통해서 하느님에 은혜의 필연성을 깨닫고 그 은혜를 추구한게 아니라 자신들에 종교행위를 의지해서 자기 의만을 쌓고 있었어요 그리고 자기 자신들만을 위한 다윗 왕국을 제건해 주실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건 아니죠 우상숭배와 똑같은맥락 아닙니까? 그것은 주님은 그래서 그에 예배도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하느님께서 말라기를 통해 누가 이 성전문을 좀 닫아다오 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유대인들에 예배도 잘못되었다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거잖아요 지금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대답을 통해서 구약에 모든 제사 자체를 폐하고 계시는거에요 사마리아의 제사 예루살렘에 제사 다 쓸모 없는 것이다라는 것이죠 주님께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신약에 예배다라는 것은 장소나 방법에 의해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야 한다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거에요 본문 23-2423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24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여러분 헬라어 단어 프뉴마틱 카이 알레떼이야에요 푸뉴마는 아시다시피 성령이죠 알레떼이아는 진리 진실 실체 본질 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에요 우리말 성경은 알레떼이아 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번역을 하는 바람에 많은분들이 예배는 신령하게 그리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드려야 한다라는 그런 권고쯤으로 이 구절을 곡해하고 있어요 이 말은 그런 말이 아니에요 이 구절은 예배에 대한 진지한 태도나 마음가짐에 관해서 권고하는 구절이 아니에요 이 먼저 진정이라고 번역이 된 알레떼이아가 무슨 뜻인지 설명해 드릴께요, 알레떼이아라는 단어는 헬라어 문헌에서 실체와 본질이라는 뜻으로 주로 쓰이는 단어에요 그 단어는 그림자나 상징이나 예표와 반대되는 리얼리티 실체라는 의미란 말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러한 뜻으로 쓰여요

 

빛

요한복음 19절에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여기서 참빛에서 참이 바로 알레떼이아에요. 요한복음 632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진정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진정한 빵을 너희에게 여기서도 진정한 빵에서 진정한이 알레떼이아 . 요한복음 151'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이 말도 역시 알레떼이아에요 그리고 또 다른 여러곳에서 참 예언자 참 왕 참 생명수 등에 쓰인 거에요 그러니까 진정 이렇게 번역을 하는 것은 조금 오역인 거죠. 그러니까 이 알레떼이아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이 땅에 것으로 예표가 되었던, 왜 그때는 예수라는 실체를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제사라든지 율법이라든지 이 땅에 것으로 예표를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 단어는 이 땅의 것으로 예표가 되었던 모형과 상징과 그림자에 실체와 본질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이제 구약에 예표적 예배가 사라질 것이다라는 의미에서 쓰여진 단어란 말입니다

 

구약에 제사에 모습을 잠깐 머리속에 떠올려 보세요 제사장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을 제단앞에 세우죠 그리고 속죄를 원하는 죄인에 머리와 그 제물에 몸에 양손을 얹고 죄인에 죄를 그 제물에게 전가시키는 의식을 행하죠? 기도를 한다 말입니다 그리고는 제물을 죽이는 거에요 그래서 이 사람에 죄가 이 제물에게 전가되어서 제물이 죽고 죄인에 죄는 해지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에 백성들에 죄를 위해서 하느님께 제물로 드려지고 하늘과 땅 사이에 그 유일한 중보자요 제사장으로 서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사역을 모형으로 그림자로 보여주는 거였어요. 제사장도 예수였고 제물도 예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이 되시고 제물이 되셔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린 분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사마리아 여인 앞에 그 제사에 실체이신 그들이 드렸던 예배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깨서 서 계신 거에요 그리고 그 여인에게 너희는 이제 그림자나 모형이 아닌 나, 실체로 예배를 드려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알레떼이아에요 히브리서 923-24절 보세요

23 하늘에 있는 것들을 본떠 만든 것들은 이런 의식으로 정결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것들은 그보다도 더 나은 제물로 정결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24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하늘의 참 성소를 본떠서 만든 지상의 성소에 들어 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그 하늘의 성소로 들어 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소나 성전이 다 뭐였대는 거에요 그냥 그림자 모형이였다는 것입니다

25 대사제는 해마다 다른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야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번번이 당신 자신을 바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단번에 드려진 제물이셨고 영원한 제사장 이였다라는 거에요 이제 우리에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 피를 들고 성소나 지성소 정도가 아닌 참 하늘로 들어가셨어요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에 백성들이 들어있는 거에요 그게 그리스도와의 연합 유니언 크라이스트인 것입니다 그게 우리에 영적 현실인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제 지성소에 들어간 자가 됐어요 뭘로 말미암아? 예수가 제물로 드려지고 예수가 제사장으로 서시는 바람에 우리는 이제 지성소에 들어간 자가 되었어요. 그 전에는 범접을 못했어요 범접하면 무조건 죽였으니까 죄인은 다 죽였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땅 위에서의 육적 현실은 어때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자신이 지성소가 되어 버렸어요 그죠 그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인 거에요 우리가 하느님께로 들어간 거는 하느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신거나 마찬가지에요 그걸 유니온 크라이스트 聯合이라고 하는 거에요 우리 자신이 하느님에 거처가 됐다라는 것을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어 버렸다 라는거죠 그래서 우리 안에서는 늘 제사 예배가 드려져야 되는 거에요 자 이제 신령과 진리에 예배에 대해서 일에 조금 윤곽이 들어나는 거죠?

 

영적으로 이미 천국에 들어가있는 자들이 지성소가 되어 버린 자기 자신 속에서 하늘에 예배의 실체를 경험하는 거에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 양 예수가 하느님께 드려졌듯이 성도에 삶 속에서 예수에 성품이 순결한 삶이 하느님 앞에 제물로 올라가는 거에요 그게 신령과 진리 실체로 예배를 드리는 자들에 삶인 것입니다. 이제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속에서 우리에 삶을 하느님 앞에 제물로 올려드리고 계신 거에요 그러니까 알레떼이아 진정으로 실체로 예배를 한다라는 것은 이제 실체이신 예수를 제물로 바치는 예배를 해야 한다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제물은 우리가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준비하시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실체이신 예수를 제물로 바치는 예배를 해야 한다라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그 말은 예수님께서 제물로 바쳐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으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자 다운 삶, 그 삶이 뭐에요 예수의 성품 충정에 제사, 그 삶을 하느님 앞에 예수에 삶을, 예수에 성품을, 예수에 인격을 하느님 앞에 제물로 올려드려야 한다라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에 삶은 죽기까지 순종하는 삶이에요.

그 삶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삶이고 계명을 지키는 삶이죠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는게 바로 계명을 지켰다라는 뜻이니까 그런데 그 계명은 뭐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는게 계명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드려야 하는 예배에 삶이 뭐에요 결국 하느님 당신이 왕이니까 저는 당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그분 아래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거고 내가 이제 그 왕에 자리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내가 나를 위해 남을 밟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게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드려야할 신령과 실체 진리 알레떼이아에 예배인 거에요 그렇게 스스로가 성전이 되어서 자신에 삶을 예배에 삶으로 하느님 앞에 올려드릴 수 있는 자들에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에 삶에서 미리 나타나는 거에요 우리한테 보라는 것입니다 저게 바로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의 삶이다라고 보여준게 예수의 삶인 거에요

요한복음 219-21절 보세요 19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20 그들이 예수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 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 하고 또 대들었다. 21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여기서는 예수를 聖殿이라고 해요 다른 곳에서는 우리를 聖殿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이 말은 성전인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느님 앞에 올려드려야할 예배에 삶을 성전인 예수가 오셔서 미리 보여주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삶 속에서 예배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導出해 내어 그렇게 살기를 힘써야 된다라는 거에요. 그 성전이신 예수께서 어떤 제사를 드렸어요

필립비서 25-8절에 나오잖아요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게 禮拜입니다 예수의 제사였습니다 이것이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그 삶 그게 바로 하느님께 예배하는 성전에 모습인 거에요

 

우리는 에덴에서 그렇게 살았어야 된대니깐요 우리는 천국에서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기 위해 이 역사속에 우리를 계속 이렇게 던져놓고 우리에게 여러가지를 경험케 하시는 거에요 여러가지를 보게 만드신 겁니다 우리에게 바로 그러한 예배의 삶이 요구되고 있는 거에요.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해야한다 라는 권고를 하시므로 지금까지는 너희가 예배에 모형과 그림자를 통해서 예배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면, 이제 그 실체인 내가 너희에 재물이 되고 제사장이 되어서 제사를 다 드렸으니까 너희는 그 실체인 십자가를 근거로 예배하라는 거에요 그런데 그 예배는 그리짐산이나 예루살렘에 시온산 같은 장소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를 제물로 드린 자로서에 예수에 삶을 내어 놓는 삶이여야 한다라는 것을 전부 내포하고 있는 거에요 그 구절 안에 사도바오로가 우리가 드려야 할 그 신령과 진정에 예배에 대해서 잘 정의를 해 놨잖아요

로마서 121절에 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출애굽기 231515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무교절을 지켜 내가 명령한 대로 아빕월 지정한 시기에 칠 일간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그 달에 너희가 에집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내 앞에 빈손으로 나오지 말아라. 내 앞에 빈손으로 나오지 말아라 요거기자고 협벽하죠

출애굽기 342020 처음 난 나귀 새끼는 양을 대신 바치고 물러내어라. 물러내기 싫으면 목을 부러뜨려 죽여라. 너희 맏아들은 제물을 대신 바치고 물러내야 한다. 아무도 빈손으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禮拜때는 반드시 하느님께 무엇을 가져와야 하는 거에요 무엇을 가져오래는거에요 禮拜에는 반드시 대속제물을 가져와야 된다라는 거에요. 이 말은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거에요 그래서 제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반드시 대속제물에 의지하여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라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의 대속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였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드려졌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갖고 가는 거에요? 그 예수가 나를 위해 代贖祭物로 드려졌다 는 믿음을 갖고 오는 것입니다. 제물은 항상 하느님에 의해 준비되어진대니깐요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에서 이미 예표됐잖아요 야훼 이래 죽어야 할 자가 어린 양에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살아나게 되는거 그런데 그 양은 하느님이 준비하지요 그래서 그것을 야훼 이레라고 아브라함이 이름짓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믿음에 근거한 그 하느님 배려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나오면 되는 거에요 그래서 그 은혜에 하느님 앞에 순종하고 依賴하는 마음으로 서는 거, 그게 성령을 받은 자들이 드리는 禮拜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祭物에 의해 하느님과 和睦하게 되었다는 은혜의 복음 아래 선 사람들은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하느님을 자랑하고 감사에 찬양을 올리게 되는 것이고 이제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남을 밟는 삶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해서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거에요 그게 禮拜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를 비우려는 노력을 하기 때문에 자기가 갖고 있는 힘이라고 여기는 것 중에 가장 생명처럼 여기는 돈을 헌금으로 내는 것이지 그걸 갖고 와야 하느님이 예배를 받아 주시는게 아닌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5-16절 보시면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언제나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하느님의 이름을 우리의 입으로 찬양합시다. 16 좋은 일을 하고 서로 사귀고 돕는 일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런 것을 제물로서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보세요 하느님을 찬양하는 讚美의 제사는 하는 것과 서로 나누어주는 사랑의 行爲로 나타나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게 禮拜래니깐요 그게 신령과 실체 진리로 드리는 예배자들의 모습인 거에요 이렇게 예배는 형식이나 방법에 차원이 아니라 한 인격과의 만남이고 그 인격에 들어남인 거에요 그래서 22절에서 주님께서 구원은 장소나 형식이 아닌 유대인에게서 난다라고 人格을 등장시키는 거에요

이 말씀은 구원에 聯隊歷史적 관점에서에 표현으로 볼 수 있어요 그 말은 하느님께서 契約締結과 또 成就에 그 순서를 유대인에게서 출발하여 이방인에게로 전해지는 방식으로 채택하셨다라는 거에요. 따라서 계약에 성취는 유대인에게 먼저 주어지고 그 유대인들에게서 이방인들에게로 전파되어지는 식으로 진행되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신약에 최초에 그리스도인들인 사도들이 전부 유대인인 거에요 거기에서 계약이 성취되고 거기서 부터 퍼지게 되어 있다란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서 나온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먼저 遍滿하게 傳播가 되고 그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에게 다시 들어가는 식으로 로마서에 나오잖아요 그렇게 진행이 될 거라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破見하실때도 유대인들에게 먼저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기서 먼저 계약이 성취되어야 되거든요 하느님이 그들을 먼저 택했기 때문에 그들을 다 구원하시겠다라는 것이 아니라 계약에 성취는 그 민족 안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 그런거에요 그게 지금까지 나온 가장 보편적인 해석이에요 그러나 이 말씀은 주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으로도 볼 수 있어요

  [ 7 ] - 영원한 물을 찾은 사마리아여인.

지금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있는 유대인은 누구죠 주님 한분밖에 없어요 다른 유대인들 다 어디갔어요 제자들 양식 구하러 갔다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희가 장소나 시간이나 방법을 예배의 조건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구원은 그런 것으로부터 오는게 아니야 그런것을 조건으로 오는게 아니라 한 인격인 나 바로 유대인 나, 나를 근거로 나를 믿는 것으로 오는 것이다라고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는 것이다 라는거에요 그래서 유대인이라는 단어도 단수로 썼다라는 것이죠 예배는 형식과 방법과 장소에 문제가 아닌 인격에 문제라는 것이며 그 예배의 근거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고 우리는 그 예배에 자리에 은혜를 근거해서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共禮拜를 드리는 거죠 그것도 뭐좀 잘못된 말이지만 그래서 이렇게 예배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배만 예배가 아니라 여러분에 모든 삶 그게 전부 예배인 거에요.

 

지금 나는 하느님에 은혜가 아니면 그분에 피조물로서 하느님에 은혜를 받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그러한 겸손함과 겸양을 갖고 하느님과 니 이웃을 목숨걸고 사랑하라는 그분에 말씀에 그분에 계명에 순종하는 자로 살려고 분투를 하고 있다면 그러한 마음에서 근거하여 행하는 모든 삶은 다 신령과 진리로 실체 알레떼이아로 드려지는 예배인 거에요 그러니까 이 자리에 앉아도 우리는 그 마음을 버리지 말아야죠 형식이나 방법 이 땅에 것들이 나에 그 예배에 마음을 흔들지 못하는 거에요 그래서 가끔 예배당 안에는 우는 얘들도 있어야 되고 가끔 그렇게 핸드폰 소리도 울리고 그러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느님에 사랑과 성령에 임하심이 여러분을 예배하는 자로 만드셨다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그 은혜를 입은 자로서 매일 매일에 삶을 하느님께 순종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그분에 계명을 열심히 지켜내는 예배의 삶으로 만들어 내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