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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2018년 6월 24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22 조회수2,070 추천수2 반대(0) 신고

 


 루가 1, 57-66.80. 사도 13, 22-26.

 

고대(古代) 중동(中東)에서는 흐르는 강물에 몸을 씻는 종교 의식(儀式)이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서 깨끗하게 해주고, 생물(生物)에 생기(生氣)를 주어 삶을 활성화(活性化) 하는 속성을 지녔습니다. 고대 중동에서는 물의 이 속성을 종교 의례(儀禮) 안에 살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흐르는 물에 몸을 씻어 자기의 죄에서 정화(淨化)되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그 관행이구약성서에 흔적을 남긴 것이 너희 몸을 씻고 정결케 하라.”이사야서(1,16)의 말씀이고시편에도 히쏩의 채로써 내게 뿌리소서, 나는 곧 깨끗해 지리이다.”(51,7)는 말씀입니다.

 

기원(紀元) 1세기 팔레스티나에는 침례(浸禮)운동이 유행하였습니다. 종말 심판의 때가 가까웠다는 믿음이 만연된 시대였습니다. 바리사이파는 이 종말에 대비하여 율법 준수를 강화하였고, 에쎄네 사람들은 그들 수도생활의 규율을 더 엄히 하였습니다. 그런 신앙 운동에 편승하지 못하는 서민들을 대상으로 일어난 것이 침례운동입니다. 종말의 심판이 임박하였으니 죄를 용서받기 위해 흐르는 물에 몸을 담가서 죄를 씻자는 운동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 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 한 분이었습니다. 요한의 세례 운동이 다른 사람들의 것과 차이나는 것은 요한은 회개(悔改), 곧 삶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였으며, 일생에 단한 번 받을 수 있는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공생활(公生活)을 시작하기 전,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이유는복음서들이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복음서들은 주님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을 알리고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실은 사람들이 요한을 예수님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들이복음서들을 기록할 당시 요한의 제자들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서저자들은 예수님이 세례 받은 사실은 알리되, 요한에 대한 자리 매김도 동시에 합니다. 그 자리 매김이 요한은 예수의 길을 닦아 놓을 심부름꾼”,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굽은 길을 바르게 만들기 위해 광야에서 부르짖는 이”(마르 1,2-3), “예수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는”(마르 1,7) 인물 등의 표현입니다. 복음서들은 그런 자기들의 해석을 보태어,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 때문에 오해가 발생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복음서저자들이 그런 해석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요한에게 가지 않도록 장치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굳이 그런 해석까지 해가면서 그 사실을 보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그 시대 다른 침례운동가들의 것과 달랐던 것은 삶의 변화를 요구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군중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에 욕심을 내지 말라고 말하고, 세리에게는 정해진 세금 외에 더 걷지 말라고 말합니다. 군인들에게는 사람을 괴롭히거나 등쳐먹지 말라고 말합니다(루가 3,10-14 참조).

 

예수님이 하신 복음 선포는 바로 그 삶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요구한 실천들을 더 발전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말씀하시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이”(마태 7,24)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세리와 창녀들이 유대교의 사제나 백성의 원로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참조)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세례에서 요구한 실천을 더 발전시켰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요한의 것과 차이(差異) 나는 점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입니다. 회개를 요구하는 요한의 설교는 대단히 위협적입니다. “독사의 족속! 닥쳐올 하느님의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었느냐?”(마태 3,7),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다.”(마태 3,10). 요한의 그런 표현들은구약성서가 알리는 두려운 하느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유산(遺産)을 받아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떠나가서 재산을 탕진하고, 탕아(蕩兒)가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기쁘게 맞이하여, 잔치를 벌리며 그를 아들로 복권시키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십니다(루가 15,11-24 참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마태 18,22) 하느님이십니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은 요한을 훨씬 능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아버지, 사랑하시는 분, 가까이 계시는 분으로 체험하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 일컫는 것은 그분만이 하느님을 제대로 체험하였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의 한 분이었습니다.마르코복음서요한은 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1,6)고 말합니다. 이 묘사는구약성서가 엘리야 예언자에 대해 말한 것과 같습니다(2열왕 1,8 참조). 요한은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로서 광야에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요한은 부귀도 영화도 탐하지 않고, 하느님의 일에 몰두하여 산 예언자였습니다.

 

유대아의 영주였던 헤로데 안티파스가 자기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자, 요한은 그 부도덕함을 비난하였습니다. 마르코복음서(6,17-29)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헤로데의 생일 잔치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그를 기쁘게 하였고, 어머니의 교사(敎唆)를 받은 그 소녀는 요한의 목을 선물로 요구하였습니다.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마태 11,3)라고 질문한 것을 보면, 요한과 예수 두 분은 계속하여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도 요한에 대해 특별한 존경심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언자보다 훌륭한 사람입니다...여자 몸에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인물은 없습니다.”(마태11,9.11). 요한도 신앙의 어둠을 안고 예수님에 대해 질문하면서 사셨던 분입니다. 그분은 철없는 한 소녀가 춘 춤의 대가(代價)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며, 무죄한 이를 희생시키는 이 세상은 무엇이며, 인생은 왜 이렇게 모순 덩어리인가를 요한은 스스로 물으면서 헤로데가 보낸 군인의 칼을 받고 하느님에게로 가셨습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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