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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6.24)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24 조회수2,446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8년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제1독서 이사 49,1-6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2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4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제2독서 사도 13,22-26

그 무렵 바오로가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조상들에게

22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복음 루카 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종종 강의 부탁을 받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어떤 주제로

 강의를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냥 하면 된다고 쉽게

말씀해주시는 분도 계시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강의를 해달라고

부탁하십니다.

솔직히 이런 강의 주제를

받으면 고민이 많이 생깁니다.

사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신

 분들은 많은 어려움과 시련으로

 지금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지요.

 이러한 상태에서는 긍정적인

 마음보다 부정적인 마음이

가득할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을 드려도 이를 삐딱하게 듣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 강의를 듣고는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든데 어떻게

 봉사와 희생을 하고,

더군다나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데

잘 모르는 이웃을 위해 나눔과

사랑의 실천을 할 수 있느냐는

등등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돈이나 명예 등의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말하는

가치를 먼저 따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도 이 주님의 말씀을

드리면 ‘말도 안 된다.’면서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무조건 반대하고

의혹을 품고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대화가 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저는 이 분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함께

더 생각해봅시다.”

라고 말씀드리고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즈카르야는 주님의

 천사로부터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한 예고를 받습니다.

그때 즈카르야는

어떻게 말했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루카 1,18)라면서

 부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의혹을 품고 천사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뜻하는

 요한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요한의 탄생 예고는 분명히

하느님의 큰 은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았기에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됩니다.

(루카 1,20 참조).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는

언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까?

 ‘그의 이름은 요한’

(루카 1,63)이라고

글 쓰는 판에 썼을 때였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을 때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부정할 때에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하느님의 뜻을 인정했을 때

비로소 말을 할 수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불평불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삶을 통해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듯이 모든 민족들의

빛으로 굳건하게 설 수 있습니다.

(이사 49,6).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고 있는

세례자 요한을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모습은 인간적으로 볼 때

 참으로 별 것 없어 보입니다.

화려한 집에 살지도 않았고

멋진 옷을 입지도 또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해서 통치하는

왕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을 따름이었습니다.

(사도 13,24).
세례자 요한은 세상의

관점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따르는 믿음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모든 민족의

 구원을 이끌었고 그 역시

민족들의 빛으로 환하게

빛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먼저 바라보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내가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

부정보다는 긍정을,

절망보다는 희망을,

미움보다는 사랑을,

슬픔보다는 기쁨으로 나아가는

 내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행복의 비밀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

(앤드류 매투스)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

"사막에 숲이 있다."

(‘좋은 글’ 중에서)

황량한 사막이었습니다.

 매서운 모래폭풍이

부는 곳이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 한 명도

볼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던 가난한 청년에게

시집을 온 여자는 통곡을 하다가

1주일 만에 한 마디를 꺼내게 됩니다.
“여기 꽃을 심으면 안 될까요?”
그 한 마디가 시작이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막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나무가 살 수 있으면 채소도 살 수 있고

채소도 살 수 있으면 사람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매일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동안 꿈 없이 현실에 순응하며 살던

남편도 그녀와 함께 모래바람과

싸우며 나무를 심었습니다.

한 그루 한 그루 20년간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한 그루들이 모여

 숲이 되었습니다.
중국 마오우쑤(毛鳥素)사막을

 숲으로 만든 인위쩐(殷玉進)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그 기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막을 피해 돌아가서는

숲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사막에 나무를 심었더니 그것이

숲으로 가는 길이 됐지요”
‘할 수 없는 것’을 찾고 있다면

할 수 없는 걸림돌만 쌓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있다면

할 수 있는 디딤돌이 놓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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