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귀를 타신 왕 (요한12:12~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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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18-06-29 | 조회수7,168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공동번역성서 나귀를 타신 왕
(요한12:12~19) 12 명절을 지내러 와 있던 큰 군중은 그 이튿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를 맞으러 나가,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 찬미 받으소서!' 하고 외쳤다. 14 예수께서는 새끼 나귀를 보시고 거기에 올라 앉으셨다. 이것은 성서에, 15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 임금이 너에게로 오신다.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 하신 말씀 그대로였다. 16 예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다음에야 이것이 모두 예수를 두고 기록된 것이며 또 이런 일들이 그대로 예수께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7 예수께서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을 증언 하였다. 18 군중이 예수를 맞으러 나간 것도 예수께서 이렇게 기적을 보여 주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19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 이제는 다 틀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따라 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며 서로 걱정하였다. 아멘
드디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십니다. 우리는 요한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록하기 전에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를 그 앞에 끼워 넣음으로 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암시했어요. 예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그 분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이야말로 참 제사장이요 참 예언자요 참 왕이라는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인정은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 상을 베푸시는 행위였으며 그렇게 낮아지고 죽는 모습이 결국 하느님 나라의 승리의 삶임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실제 화하여 살아내야 하는 성도의 대표로 그 자리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그녀를 버렸습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 세상의 힘을 모두 주님 앞에 내어 놓고 자신의 영광인 머리카락을 주님의 발 아래로 내려놓았던 그녀의 행위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바보 같아 보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한 마디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고 이 땅을 작은 예수로 살아가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의 삶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그러한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대로 반영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복음이 전해질 때 이 여인의 이야기가 함께 전해지게 될 것이라’ 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에서 이미 예고된 것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내려놓는 보잘것없고 연약한 모습으로 죽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승리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그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에서 예고된 예수님의 죽음의 행진이 오늘 본문에서 실제화 되어 나타나는데 이렇게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절기 때마다 의무적으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모여야 했습니다. 성인 남자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고 나머지 식구들도 최소한의 인원만을 집에 남겨두고 대부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명절을 지켰습니다. 유대 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유대인들의 수가 270만 명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숫자이지요? 지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소식을 듣고 그 성 입구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향해 환호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호산나’ 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구원 하소서’ 라는 말입니다. 시편 118편에 가면 그 단어가 나옵니다. (시편118:25~27) 25 주소서, 야훼여, 구원을 주소서. 주소서, 야훼여, 승리를 주소서. 26 야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우리가 야훼의 집에서 그대들을 축하하리라. 27 야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신다. 나뭇가지 손에 들고 줄줄이 제단 돌며 춤을 추어라.
25절에 있는 ‘구원을 주소서’ 라는 단어가 ‘호쉬아나’ 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바로 그 단어를 주님을 향해 큰 소리로 반복하여 연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호산나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편 118편의 ‘호쉬아나’ 는 죄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빛을 주신다 하지요? 빛 생각하는 것이 있지요? 도피성입니다. 성경은 아담 안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을 살인자라 규정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행복과 만족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 내재된 것만으로는 그것을 다 채울 수 없어서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의 것들을 탈취하여 자신의 행복을 찾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을 경쟁자요 원수로 여기게 되어 있는데 성경이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라 확실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요일3:15)
그래서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은 다 살인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율법에 의하면 살인자들은 모두 사형입니다. 그것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야 합니다. 그 사람을 죽을 때까지 돌로 쳐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확정적 고의나 미필적 고의가 아닌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지 않고 죽음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을 하나 마련해 놓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도피성으로 피해서 빛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카인의 후손들로 칭해지는 죄인들은 모두 다 카인처럼 고의적인 살인자들이지만(카인은 아벨에게 들로 가자고 유혹한 후 거기서 죽인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고의적 살인자이다) 그 이외의 사람들 즉 하느님의 남은 자들은 고의적 살인자들의 명단에서 그 이름을 빼내어 도피성에서의 구원의 기회를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친절한 힌트였습니다.
시편 118편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들은 ‘호산나’ 를 외쳐야 하는 긴박한 지경에 빠져 있는 자들입니다. 쉬운 말로 ‘하느님 살려 주세요’ 입니다. 그들의 외침은 ‘하느님 우리 스스로는 절대 이 지긋지긋한 죄와 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어떠한 방법을 좀 구원해 주세요’ 라고 하는 절박한 외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은 죄와 사망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호산나’ 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압제와 가난과 질병으로부터의 ‘호산나’ 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이미 하느님의 선민으로서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인데 지금 로마라는 악한 자들이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으니 그 현실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는 ‘호산나’ 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러 오신 하늘의 왕에게 이 세상 현실에서의 구원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자들이 바로 예수를 죽였다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사실 종려나무가지는 유월절에 흔드는 것이 아니라 장막절(수전절)에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든 것은 그로부터 2세기 전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손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고 그들을 쫓아낸 유다 마카베오의 승리를 예수님에게 다시 한 번 기대하는 유대인들의 강한 열망이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시리아는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 유화정책을 써서 그들의 종교와 제사 등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성전 보수 자금까지 대 주었습니다. 그런데 BC198년에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안티오쿠스 3세가 BC190년에 로마를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에게 대패를 하고 당시 돈 5만 달란트를 로마에 물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안티오쿠스 3세는 점령지의 물건을 수탈하기 시작했고 특히 성전의 집기들이나 물건들을 모조리 빼앗아서 그 빚을 갚았습니다. 그 때부터 유대인들은 힘겨운 식민지 백성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아들인 안티오쿠스 4세 우리가 잘 아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왕이 되면서 이스라엘은 엄청난 박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다니엘이 본 환상에 나온 사람입니다. 다니엘서 8장 23절에 보면 헬라에서 갈라진 네 나라의 마지막 즈음에 한 왕이 일어나서 유대인들을 파괴하고 멸할 것이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그가 바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였습니다. 그는 정말 엄청나게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BC167년에 아폴리우스 장군을 비롯한 2만 명의 대군을 팔레스타인에 보내어 주둔을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안식일과 할례 제사를 폐지 시켰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을 금서로 지정을 해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절기도 지키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절기 때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지도 못했습니다. 게다가 성전의 지성소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제우스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제사의 제물은 유대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로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제단은 늘 돼지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제사를 드린 후에는 반드시 그 제물로 바쳐진 돼지를 먹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에 창녀들을 두어 신성한 성전을 매춘 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중에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엄청난 박해 속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있을 때 마따디아 라는 노 제사장이 시리아의 요구를 거부하고 그들의 뜻대로 돼지를 제물로 하여 제우스에게 제사를 드리고 나오는 어떤 유대인을 죽여 버리고 그를 저지하는 시리아 왕의 사신과 군사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섯 아들과 그를 추종하는 유대인들의 무리를 데리고 산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얼마나 나이가 많았는지 3개월 만에 노환으로 늙어 죽었고 엉겁결에 셋째 아들인 유다가 반란군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동조자들 특히 하시딤(경건 주의자)들과 합세해서 시리아 군과 게릴라전을 펼쳤습니다. 그는 결국 3년 만에 시리아 군을 몰아내었고 성전을 깨끗이 청소하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유다가 얼마나 잘 싸웠는지 그의 별명이 “망치” 였습니다. “망치” 라는 히브리어가 ‘마카베오’ 입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마카베오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카베오에 의해 성전이 청소되고 제사를 드린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유대인들이 지금도 지키고 있는 ‘수전 절 하누카’ 입니다. 성전탈환 절 성전봉헌 절이라고도 합니다. 그 때 유대인들이 유다 마카베오를 메시아로 추앙했습니다. 드디어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와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유대인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유다 마카베오로부터 시작된 하스모니안 왕조는 온갖 내분과 외세의 공격으로 금방 지리멸렬했고 그들이 원하는 다윗 왕국의 화려함과 풍성함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또 다시 유다 마카베오와 같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로마에게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 눈앞에서 오병이어로 빵과 고기를 산더미처럼 만들어 내시는 분이 오신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병든 자 들을 순식간에 고치고 죽은 자까지도 살려내는 신통력까지 있습니다. 물위를 걷기도 하고 풍랑을 꾸짖어 잔잔케 한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메시아를 보내셨구나 이제 우리 이스라엘은 세계를 지배하며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겠구나’ 하고 흥분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 바리새인들과 대 제사장들 율사들 등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해가 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호시탐탐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를 연호하며 그 분께 환호하는 무리들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자기들의 이 세상의 삶에도 유익이 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과 그 분의 능력을 인정은 하되 그것이 자기들의 이 세상살이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 분을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 뒤 그 두 부류는 한 편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기적과 그 분의 능력이 자기들의 이 세상살이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때에 ‘호산나’ 를 외쳤던 목소리들이 며칠 뒤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외쳤던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종교행위나 신앙생활은 모두 이 세상에서의 유익을 얻어내는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하나의 모형으로 집약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왕으로 당신의 나라인 이스라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장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린 나귀 즉 새끼 나귀입니다. 어른이 새끼 나귀를 타면 발이 거의 땅에 닿습니다. 말이 나귀를 탄 것이지 실제로는 거의 자기 발로 걷던지 아니면 보기 흉하게 두 발을 반짝 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게 왕의 모습으로 어울립니까?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의 입성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요한12:15) 15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 임금이 너에게로 오신다.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 하신 말씀 그대로였다. 이 말은 지금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입성이 구약의 어딘가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즈가리야9:9-12) 9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 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10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 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큰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시리라. 11 '너는 나와 피로 계약을 맺었으니 나 그 피를 생각하여 사로잡힌 너희를 물 없는 굴에서 건져 내리라. 12 수도 시온아, 포로들은 그리던 고행을 찾아 너에게로 돌아 오리라. 네가 포로로 지내던 시절의 아픔은 내가 곱절로 갚아 주리라. 지금 요한은 스즈가리야서를 인용하여 주님이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이유를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즈가리야서는 나귀를 타신 주님의 입성을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고 그들의 활을 끊기 위함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에브라임과 예루살렘은 곧 에브라임과 유다 즉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귀행차는 이스라엘의 무장을 해제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스라엘(유대주의) 밖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화평이 전해질 것인데 그 방법은 ‘계약의 피’ 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전체의 내용을 단 한 절로 요약하여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귀행차는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세상의 힘을 얻어 그 힘으로 완성되는 화려한 세상 다윗 왕국의 재건을 꿈꾸는 유대주의를 부수고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참된 하늘의 메시아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칼과 창이 아닌 겸손으로 계약의 피로 그 일을 이루러 오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모형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몇 가지 준수사항을 하달하셨습니다. (신명17:16) 16 그러나 왕이라고 해도 군마를 많이 기르는 일만은 하지 못한다. 백성을 에집트로 다시 보내어 군마를 많이 얻어 오게 해도 안 된다. 너희가 그리로 되돌아가지 못하리라고 야훼께서 너희에게 일러두시지 않았느냐?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말과 아내와 은금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백성들의 힘은 말과 병거와 은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시편33:16~17) 16 왕들아, 너희가 대군을 거느렸다고 이길 성싶으냐? 힘 좀 있다 해서 궁지에서 살아날 성싶으냐? 17 군마만 믿다가는 살아나기 어렵고, 대군을 거느렸다 해서 사지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리라. (시편20:6-7) 6 야훼께서 기름부으신 임금에게 승리 주심을, 그 거룩한 하늘에서 그의 기도 들으시고, 오른손 힘차게 뻗어 승리 주심을! 7 누구는 병거를 믿고 또 누구는 기마를 믿지만, 우리만은 우리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믿사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님이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이 세상의 힘을 이용하여 이 세상의 힘을 부어주시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백마를 타고 오셨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활과 칼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탱크와 자동소총과 원자폭탄으로 바꾸어 주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오셔서 이스라엘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으로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이 일을 하시는 방법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바오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후12:9~10)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후13:4) 4 그리스도께서는 약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하느님의 권능으로 지금 살아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약하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권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서 여러분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바오로가 본 십자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필두로 한 하느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새끼 나귀를 탄 것처럼 우스꽝스럽고 연약해 보이나 사실은 그 속에 하느님의 강함이 꽉 채워진 진짜 강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해서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행진을 마치시고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를 하신 것입니다. (요한 12:24-25) 24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유대주의자들처럼 하느님 앞에서도 ‘자기 자신’ 이 주인공인 사람들은 사망으로 던져질 것이고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 즉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들만이 영생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바로 그 모습을 하느님께서 나귀를 타신 예수님이라는 알기 쉬운 그림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예수 안에서 연합이 되어 작은 예수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도 역시 이 세상에서는 나귀를 탄 우스꽝스럽고 연약한 모습으로 살다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느라 커다란 말을 타고 활보하는 가운데 우리 성도들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여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그 분의 말씀을 좇아 져주고 섬겨주고 용서해 주고 감싸주고 인내하면서 새끼 나귀를 탄 바보로 이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볼 멘 소리를 하지요. ‘하느님 창피하게 새끼 나귀가 뭡니까? 폼 나게 백마 한 마리 보내 주세요 내가 그 백마 타고 하느님 일 열심히 할게요’ 그런데 하느님은 자꾸 새끼 나귀만 보내십니다. 그러나 그게 잘 가고 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시편 2:1~9) 1 어찌하여 나라들이 술렁대는가? 어찌하여 민족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2 야훼를 거슬러, 그 기름부은 자를 거슬러 세상의 왕들은 들썩거리고 왕족들은 음모를 꾸미며 3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이 멍에를 벗어 버리자!' 한다마는 4 하늘 옥좌에 앉으신 야훼, 가소로와 웃으시다가 5 드디어 분노를 터뜨려 호통치시고 노기 띤 음성으로 호령하신다. 6 '나의 거룩한 시온산 위에 나의 왕을 내 손으로 세웠노라.' 7 나를 왕으로 세우시며 선포하신 야훼의 칙령을 들어라.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 8 나에게 청하여라. 만방을 너에게 유산으로 주리라.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너의 것이 되리라. 9 저들을 질그릇 부수듯이 철퇴로 짓부수어라.'
보세요.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군왕들이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나귀를 타고 오시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합니다. 나귀를 탄 연약한 예수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들을 보고 비웃으신다고 하지요? 나귀를 타신 예수가 철장으로 그들을 질그릇처럼 부수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약함이 강함을 파하는 형국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나라가 땅 끝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거기에 대한 힌트가 나옵니다. (요한 12:19) 19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 이제는 다 틀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따라 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며 서로 걱정하였다. 하느님은 바리새인들의 입을 통하여 시편 2편 8절의 말씀 온 세상의 당신의 백성들이 나귀를 타신 예수에 의해 다른 말로 십자가의 연약함을 통해 당신께로 다 돌아오게 될 것임을 힌트 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우스꽝스러운 예수님에 의해 온 세상이 정복당할 것임을 바리새인들의 입을 통해 예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귀를 타고 입성하셔서 나귀 새끼 같은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부터 예언이 되어 있었습니다.
(창세49:10~11) 10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지휘봉이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참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분이 와서 만백성이 그에게 순종하게 되리라. 11 포도나무에 나귀를 예사로 매어 놓고 고급 포도나무에 새끼 나귀를 예사로 매어 두리라. 포도주로 옷을 빨고 포도의 붉은 즙으로 겉옷까지 빨리라. 야곱이 자기의 아들들에게 유언을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유다에게 유언을 하면서 그의 후손으로 실로 즉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예언합니다. 그 메시아는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옷을 포도주와 포도즙에 빨 것이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포도즙을 blood of grapes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아는 포도의 피에 자신의 옷을 빨게 될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5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포도나무다’ 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당신 자신의 피로 자신의 옷을 빠는 이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사복음서 모두에 공히 기록이 되어 있는데 거기서 등장하는 새끼나귀는 전부 매여 있는 나귀입니다. 그러니까 포도나무에 매여 있는 나귀는 다른 말로 나귀를 타고 오시는 포도나무이신 예수의 모습은 자신의 피로 자신의 옷을 붉게 적시고 물들이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피 묻은 저주의 옷은 모두다 자신이 가져가고 아버지의 백성들에게 새 하얀 세마포 옷을 입히시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묵시19:11~16) 11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흰 말이 있었고 '신의' 와 '진실' 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공정하게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입니다. 12 그분의 눈은 불꽃 같았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을 썼으며 그분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 그분의 몸에 적혀 있었습니다. 13 그분은 피에 젖은 옷을 입으셨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 이라 하였습니다. 14 그리고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고 흰 말을 타고 그분을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15 그분의 입에서는 모든 나라를 쳐부술 예리한 칼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친히 쇠지팡이로 모든 나라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분노의 포도를 담은 술틀을 16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모든 왕의 왕, 모든 군주의 군주' 라는 칭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시편 2편의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백마를 타고 철장으로 적들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분의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누구지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피 뿌린 옷을 입고 있는 예수의 뒤에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하늘의 군대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앞장을 서셔서 모든 저주와 심판을 다 받아내어 온통 피가 뿌려진 옷을 입으심으로 뒤에 따라오는 당신의 군대들인 성도가 희고 깨끗한 하얀 세마포를 입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그 피 뿌린 옷은 우리가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뿌려지는 피도 우리의 피였어야 합니다.
(이사63:1-6) 1 에돔에서 온 이분은 누구신가? 붉게 물든 옷을 걸치고 보스라에서 온 이분은 누구신가? 위엄찬 옷을 입고 위세를 떨치며 저벅저벅 걸어 온 이분은 누구신가? '나는 구원을 약속하는 자, 도울 힘이 많은 자이다.' 2 '어쩌다가 당신 옷에 붉은 물이 들었습니까? 당신 옷은 마치 포도주틀을 밟다가 물든 것 같군요.' 3 '나는 혼자서 술틀을 밟아야 했다. 나의 백성 가운데 나를 돕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너무나도 노여워, 나는 그것들을 마구 밟았다. 그들의 피가 내 옷에 튀어 나의 옷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것이다. 4 원수갚을 날을 정하고 벼르고 있다가 마침내 복수할 해가 왔는데, 5 아무리 둘러 보아도 나를 돕는 자가 없었다. 놀랍게도 내 편을 드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 팔밖에 믿을 것이 없었고 나의 분노만이 나를 밀어 주었다. 6 너무나도 노여워 백성들을 짓밟고 너무나도 화가 나서 그것들을 짓바수어 그 피를 땅에 흘린 것이다.'
이렇게 백마를 타신 예수님에 의해 짓 밟혀지고 짓 이겨져서 피를 튀기며 죽었어야 할 우리였는데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당신 자신을 밟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피로 당신의 옷을 적셔 버리심으로 우리의 옷을 희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스바니아가 이렇게 멋지게 기록을 해 놓았습니다. (스바니아3:14~17) 14 수도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큰 소리로 외쳐라. 수도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축제를 베풀어라. 15 야훼께서 원수들을 쫓으셨다. 너를 벌하던 자들을 몰아 내셨다. 이스라엘의 임금,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니 다시는 화를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16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에 이렇게 일러 주어라. '시온아, 두려워 말라. 기운을 내어라. 17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오늘 본문 15절의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는 말이 여기에 동일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두에 즈가리아서 9장에서 찾아본 바에 의하면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고 한 후에 ‘에브라임과 예루살렘 즉 유다의 칼과 활과 병거를 다 부수실 것이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시온의 딸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답이 스바니아 3장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시온의 딸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야훼께서 예수 안에서 그들의 형벌을 제하였고 그들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아예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게 십자가이며 그게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나귀를 타고 오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왜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지 아시겠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새끼 나귀를 타시고 다른 말로 자신을 비우시고 자신을 부인하시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만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우리의 모습은 이 땅에서 어떻게 보여야 할까요? 역시 나귀 새끼를 탄 모습으로 보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오셔서 자신의 피로 자신의 옷을 적심으로 원수들을 살려 내셨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구원의 때입니다. 은혜의 때 구원의 때에는 예수가 백마를 타고 와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백마를 타고 오시는 그 순간 죄인들은 멸망의 자리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 천년 전 예수께서 이 세상에 백마를 타고 오셨다면 이 세상은 거기서 끝나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읽은 것처럼 백마를 타신 예수는 심판의 예수이신 것입니다. 이제 곧 그 분이 백마를 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이 세상 권세 잡은 자와 그 세력들이 모두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성도들이 백마를 타고 오신 주님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될 옛 사람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 우리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큰일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귀를 타신 예수에 의해 구원을 얻은 성도의 삶에는 종말에 나타날 백마를 타신 예수의 심판의 전쟁이 자주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백마를 타신 예수께서 이 세상의 죄를 모두 솎아내어 불 못에 던져버리시는 그것처럼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는 우리의 옛사람이 백마를 타신 예수에 의해 미리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만일 지금 우리의 삶 속에 죄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이 전혀 일어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아마 백발백중 불 못으로 들어가야 할 자들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죄를 털어내고 잘라버리고 쫒아내고자 하는 예수님의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면 우리는 복 받은 자들이 맞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힘과 꾀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일궈놓은 아담 적 열매들을 하나하나 쳐 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보처럼 사랑하고 섬기기도 하며 참아주고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백마를 타신 예수님의 공격에 의해 우리의 옛 자아가 조금씩 죽어가게 될 때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나귀타신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는 나귀를 탄 바보 같고 연약한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백마 타신 예수님에게 철장을 맞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연약하고 바보 같은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그들이 바로 백마를 타고 새하얀 세마포 옷을 입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하늘의 군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백마를 타신 예수님의 공격은 바로 우리를 그렇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늘의 군대로 만들어 가시는 은혜의 씨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것이 어떻게 십자가 복음으로 연결이 되는지 잘 아시겠지요?
살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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