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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예수님 마음)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29 조회수2,076 추천수2 반대(0) 신고

 


예수님 마음

+ 찬미예수님!

6월 달 예수성심성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 금요일이

예수성심대축일 이었죠?

전통적으로 예수성심대축일

그 다음 날은 성모성심기념일입니다.

1960년대부터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이요,

그 울타리는 성모님이라고

하는 표시입니다.

옛날에 산적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었어요.

소원이 도둑놈이 되는 것에요.

그것도 큰 산적이.

산적 두목한테 가서 자기를

좀 도둑놈으로 써 달라고 하니까

20살도 안 된 어린애에요.

어리니 가라고 해도 그 아이는

도둑이 되고 싶어서,

산적에 가입을 시켜달라고 졸랐어요.

그랬더니 두목이 지나가는 말로

네 엄마 심장 꺼내오면

내가 산적에 가입시킬게.” 했어요.

진담이 아니라 쫓아 보내려고

했던 말이었지만 아이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어요.

집에 가서 칼을 갈아가지고,

엄마, 엄마는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 줄 수 있지?”

그럼. 널 위해서라면

다 해줄 수 있어.”

나 지금 엄마 심장이 필요해.”

?”

심장을 들고 가야 산적인 된 돼.”

여러분이 그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엄마가 그렇게 산적이 되고 싶니?”

묻자 , 산적이 되고 싶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니?

심장 꺼내 가야지.”

엄마를 죽였어요.

그리고 펄떡펄떡 뛰는

엄마 심장을 꺼내 보자기에다

담아 신나게 산으로 갔겠죠.

개울을 지나다 이끼에 아이가

미끄러지면서 심장이 들어 있는

보자기가 떠내려갔어요.

그 보자기 안에서

무슨 말이 나왔는지 아세요?

아이고 얘야. 다친데 없어.

다친데 없어. 다친데 없냐고?”

이놈은 그때야 정신이 들어서

엄마 심장을 끌어안고 통곡을 했대요.

우리 사람들에게는 정말 극단적인

두 개의 마음이 함께 있을 때가 많아요.

천국의 마음이 있을 때도 있고

지옥의 마음이 있을 때고 있고.

선의의 마음이 될 때도 있고,

천하의 악한 마음을 갖고

악인의 마음이 될 때도 있죠.

성서에는 아담의 마음이 그렇고

카인의 마음이 그렇게 나옵니다.

요즘 보면 자식 죽이는

부모도 많아요,

부모 죽이는 자식도 많고요.

무법천지입니다.

형제끼리도 칼부림을 하고,

돈 앞에서는 형제고 없어요.

엄마의 심장을 꺼내서라도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이런 마음,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얘기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이

나타나시자 나무 뒤에 숨습니다.

하느님이 산보를 하시다가 안 보여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었어요.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셨겠습니까?

알고 있었어요.

너 어디 있느냐?’고 물은 것은

장소를 물은 것이 아니라

상태를 물으신 거죠.

도대체 네가 어떤 상태가 되었기에

나를 보고 피하느냐는 거죠.

예전에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때는 벌거벗고 있어도

부끄러운 것을 몰랐어요.

하느님이시고 내 아버지인데

부끄러울 게 뭐가 있고

창피한 것이 뭐가 있어요.

죄를 짓지 않을 때 하느님과의

관계성은 튼튼한 동아줄처럼

연결이 되어 있었어요.

신앙은 한마디로 관계성입니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서로 연관되어있습니다.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가

불편할 때는 당연히 나와 이웃과의

관계도 아름다울 수가 없고,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도 깨질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리들은 이런 관계성이

깨어질 때 마다 숨습니다.

더러운 자신으로부터 숨고 싶고,

사람으로부터도 숨고 싶고,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과도 숨습니다.

죄 짓고 냉담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까?

성당 안 나오고 십자가를

다 성당에 갖다 주면 숨었다고

생각할 줄 모르지만 아니지요.

마음은 유리 상자 안에 있는

물과 같다고 그럽니다.

늘 깨져서 피를 흘리고 중심을

잃어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한 관계성이 깨질 때 거짓 마음,

폭력적인 마음, 살인적인 마음,

핑계되는 마음,

책임 전가하는 마음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이 하느님에게 뭐라고

변명한 줄 압니까?

당신이 제게 짝지어 주신

저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 주었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

당신이 짝지어 준 저 여자로

하느님한테까지 대듭니다.

자긴 먹을 뜻이 없었는데

하느님이 짝지어 준 여자가

줘서 먹은 것이

무슨 잘못이냐는 겁니다.

카인이 자기 동생인

아벨을 죽이고 난 다음에는

제가 제 아우 지키는 사람입니까?’

맹자의 말씀 가운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가 내 마음을 모르겠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악설도 생기고

성선설도 생겼겠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는 성악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는 성선설.

인간은 천사와 악마의

중간격인 존재다.’라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얘기했어요.

이제껏 우리는 아담의 마음,

카인의 마음, 악한 마음을

들여다봤습니다.

선한 관계성을 이루고 있다가도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가 망가집니다.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

이 셋은 연결되어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신앙이라 부르고,

이중에 하나만 끊어지면

다른 관계가

다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나타나는 증상은

숨는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짓 마음,

폭력적인 마음,

살인적인 마음,

핑계되는 마음,

어떻게 해서든지

빠져나가려고 하는 책임 전가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두 번째 마음이 있죠.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죽으면서까지 심장을 꺼내주면서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자기 심장을 꺼내가는 자식이

넘어져서 다쳤을까봐 걱정하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을 마태복음

112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으리라.’

,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의 마음이요,

겸손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하느님께 향할 때는

성부께 대한 절대적인

순명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을 향하면

예수성심의 마음은 잃은 자를

구원하시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심판하는 심판주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주는

구원자의 마음으로 바뀝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시는 마음입니다.

탕자를 조건 없이 기꺼이

맞아드리시는 마음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시는 마음이요.

죄 중의 막달레나를,

탐관오리였던 자캐오를 가슴으로

끌어안았던 마음이요.

과부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동정의 눈물을 흘렸던 마음이요,

십자가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통해

당신 목숨까지 우리 죄의 대속물로

내주신 바로 그 마음입니다.

이제는 성체성사 안에서

빵과 포도주로 당신의 몸과 피를

내주시는 마음이

예수성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과

엄마의 심장을 꺼내가는

그 아들 마음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에 서있는가는 얼마나

기도생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희생봉사 하지 않으면서 예수성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인간적인 마음, 그 첫 번째 마음으로

자꾸 가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고 난 후에야 깨닫고

회개하는 삶을 살았던 아들처럼

세속에 빠지고 욕심에 허덕이는

마음을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변화시키도록 합시다. 아멘.

2018년 연중 제10주일 (6/10)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photo by 분도작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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