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7.03)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03 조회수1,943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8년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제1독서 에페 2,19-22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복음 요한 20,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저는 지금 서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태안반도의

조그만 마을에 있습니다.

주변을 걸으면서 바빴던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서

글도 좀 쓰고 강의준비도

하려고 온 것이지요.

 점심시간이 되어서 주변의

식당을 찾아갔습니다.

 그 식당에는 여러 가지

메뉴가 적혀 있었거든요.

인상 좋아 보이는 사장님께

“사장님, 무엇을 먹으면

잘 먹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사장님께서는

“다 맛있으니까

 좋아 하시는 것을 주문하세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닷가에 왔으니 ‘회덮밥’을

주문하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날씨가 좋지 않아서

 배가 나간지 꽤 되었거든요.

따라서 지금 있는 생선은

그렇게 싱싱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드시겠다면 드리겠지만 기왕이면

좋은 음식을 드셨으면 좋겠네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굴밥’은

어떤 지를 물었습니다.

번에도 “지금 있는 굴이

너무 작아서 굴밥 드시면

후회하실 거예요.”

라는 것이 아닙니까?
정직하게 장사를 하는

주인을 보면서 기분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솔직히 저 같은 뜨내기손님에게

좋지 않은 것을 준다고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잘 팔리지 않는 것을 팔면

가게로서도 더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손님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나 고맙고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이 가게에서 제가 먹을 수 있는

 가장 비싼 것 하나 주세요.”
제일 비싼 것이 생선구이더군요.

그런데 이 역시 말립니다.

저 혼자서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것을 손님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기억하면서

기분 좋게 다 먹었습니다.
내 자신을 신뢰하고 배려해 주는

상대방의 마음을 보게 되면

참으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반대로 나를 믿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그때는 함께 하는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하지 않습니다.
토마스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다는 말에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죄책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주님을 배신했다는 마음,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함께

 하지 못했다는 죄스러움에

 주님을 다시 뵈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정말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앞에도

나타나셔서 말씀하시지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주님의 사랑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던 토마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실로 깨닫게 되지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에 제대로

응답하는 것이며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자신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생명까지 봉헌합니다.
주님께 기쁨을 전해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신뢰의

 마음이 내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입니다.

모두를 믿지 말고,

가치 있는 이를 믿어라.

모두를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고,

가치 있는 이를 신뢰하는 것은

분별력의 표시이다.

(데모크리토스)

어제 너무나도 기분좋게 먹은 고등어 구이.

"여기에서는 여기를, 저기에서는 저기를..."

어떤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 있으면서 저기를 생각하고,

 저기 있으면서

여기를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불행하다.

여기서는 여기를 살고,

저기서는 저기를 살면

어디를 가든 행복하다.’
정말로 그렇지 않을까요?

 불행의 이유는 여기에서

저기를 생각하고,

저기에서 여기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를 여기에 맞게 살고,

저기에서는 저기에 맞게 산다면

충분히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을 지금에 맞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요?
어떤 자매님께서 친구가 하도

권해서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점쟁이가 자신을 보더니

곧바로 “살이 꼈어!!”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점집을 나온 뒤에 괜히 갔다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좋은 말이 아닌 나쁜 말만

 가득 들었으니까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점집을 간 것도 불안한데,

더 큰 불안은 점쟁이가 말한

 살이 꼈다는 말이었습니다.

‘정말로 나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라는 생각에 해야 할 일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여기에서는 여기를,

리고 저기에서는

저기를 살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단순한 것을

여기에서 저기를,

저기에서 여기를 생각하니

힘든 것이겠지요.

 

 

지금 제가 있는 바닷가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