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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가 되게 하소서 (요한17:11-12, 22~2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05 조회수4,089 추천수1 반대(0) 신고

 

 하나가 되게 하소서   

 

(요한17:11-12, 22~23)

11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12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이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그 동안에 오직 멸망할 운명에 놓인 자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를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멘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이웃 사랑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해 내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성취해 놓은 구원의 현실을 선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한 몸으로 건져진 구원의 현실을 이해하고 깨달은 이들의 자기부인의 삶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인생과 역사 속에서 여전히 오염의 형태로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옛 자아를 열심히 부인하며 이 세상의 힘들에게 가 있던 그들의 사랑과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 하느님과 이웃을 참된 로 인정하고 수긍하여 그들을 사랑하며 사는 자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머리로 한 하느님 나라로서의 완성의 자리를 연합 혹은 오늘 본문의 단어로 하나 됨이라 합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이 되어 절대 순종과 절대 의존이 실현이 되는 그곳이 바로 요한묵시록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의 기도가 하나 됨에 집중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와 성도의 하나 됨, 성도와 예수님의 하나 됨, 예수님과 하느님의 하나 됨에 관한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지요? 굉장히 어렵고 중요한 내용이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고 잘 들어주세요. 먼저 본문 11절을 보겠습니다.

 

(요한17:11) 11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 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이 구절에서 본문 해석의 키워드를 찾으라면 저는 세상보전그리고 하나 됨을 뽑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의 부재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를 하시는 중입니다.

그들이 세상에 남겨지게 되고 그 세상 속에서 겪어내야 할 일들에 대해 주님은 걱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그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전의 목적과 결과가 하나 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 됨에 전제가 있지요? 우리와 같이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이 하나이셨던 것같이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예수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기도하신 성도의 하나 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22절과 23절을 함께 비교하며 보아야 합니다.

(요한17:22, 23) 2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시면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었다는 말씀이 나오고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주님의 간구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겠지요? 171절에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은 십자가였지요?

하느님의 성품과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이 선명하게 드러나 하느님의 뜻이 그대로 투영이 되었으며 그러한 철저한 순종 속에서 하느님이 하느님 대접을 받으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 습니다. 그게 독사''영광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나타난 것임과 동시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에 의해 하느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위대한 영광의 결정체 였던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철저한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영광의 삶을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제자들이 이제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와 자기부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에 완벽하게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신 성자 예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완전한 인성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의 한계 속에 살면서도 성부 하느님과 일체가 되어 하느님의 아들로서 살아가야 할 과제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당하는 것과 같은 유혹을 당했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되었습니다. 육신을 입고 살았지만 그 분은 육신의 장막을 뛰어 넘어 영적인 존재로 살아야 했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성부 하느님과 분리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밤이 맞도록 기도를 하심으로 철야기도의 모범을 보이셨고 새벽이면 버릇처럼 일어나셔서 항상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를 하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끊임없이 간절하게 친밀하게 기도로써 산 결과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성부 하느님의 뜻에서 분리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감으로써 그 분을 보는 사람은 그 분에게서 누구나 성부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삶이 바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 되어 사는 하느님 나라 사람들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영광을 주시고 아버지와 당신과 제자들과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신 것은 당신께서 이 땅에 내려와 자기의 뜻을 내려놓고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좇아 아버지를 나타내어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임을 보인 것처럼 제자들도 이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잘 감당해 내어 아버지의 뜻이 그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잘 살아내도록 도와달라고 자기부인과 순종과 십자가의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도가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는 성도의 삶에 일어나게 될 십자가의 삶과 자기부인의 삶과 고난의 삶의 필연성과 확정성을 선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아버지 하느님의 보전하시는 도우심의 은혜로 그 삶을 넉넉히 이겨내며 살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 삶이 성도가 하느님과 하나 되는 삶입니다.

주일 오전 설교 / 요한복음 - "하나가 되게 하소서" (요 17:11) 

  

이제 두 번째 성도의 하나 됨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3절과는 달리 11절과 22절에서는 아버지와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 달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십니다. 여기에도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성도의 하나 됨이라는 단어의 개념부터 재정리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하나 됨을 정의할 때조차 공통된 관심사나 공통된 생각을 가진 이들이 똘똘 뭉쳐서 자신들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울타리를 쳐 버리는 식의 국어사전 속의 하나 됨의 개념을 가지고 교회의 하나 됨을 정의하곤 합니다. 주님이 지금 그런 하나 됨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당신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자기들끼리라도 똘똘 뭉쳐서 세상을 이겨내게 해 달라는 그런 배타적 하나 됨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그게 주님과 하느님 아버지의 삼위일체의 하나 됨인가요?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삼위 하느님의 하나 됨을 본받아 하나가 되어 똘똘 뭉쳐야 하는 것입니까? 만일 주님이 말씀하시는 삼위 하느님의 하나 됨이나 그것을 본받는 성도의 하나 됨이 그러한 종류의 하나 됨이라면 성자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면 안 됩니다. 그건 하나 됨이 깨지는 사건이잖아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 됨이란 조직의 강화나 비슷한 점을 많이 만들어 내려 애를 쓰는 그러한 유사성의 추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통된 것을 찾아 똑같아 지자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unity 연합이라는 것은 유사성이나 동질성에 관한 단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 됨이란 다양성과 다름 속에서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뜻을 하나로 모아 결국 그 목적을 성취해 내는 하나 됨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은 다양함과 다름으로 당신들을 던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고 하느님은 하느님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지키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과 인간의 구원을 향한 각각의 역할이 달랐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다름과 다양함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좇아 하나의 목적을 향해 자신의 몸을 던지셨습니다. 그게 하나 됨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 됨은 또 하느님의 백성들의 하나 됨을 양산해 내는 하나 됨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의 하나 됨과 같은 우리 성도의 하나 됨이란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인식하며 서로를 품어 안고 섬기며 하느님 나라의 완성과 성도의 거룩을 향해 자기를 비우는 것 즉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삶을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다양함과 다름 속에서 서로를 존귀하게 대하며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부인하여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 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러한 성도의 하나 됨의 삶을 통해 다른 이들이 하나 됨의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전도라 합니다.

하나가 되게 하소서 ( 40일 기도집중에서 ) 

예수님과 하느님의 하나 됨의 삶을 통해 교회가 탄생한 것처럼 성도의 하나 됨 이웃 사랑의 삶을 통해 다른 이웃 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성숙해 지고 우리 이웃의 울타리 밖에 있던 이들이 이웃이라는 울타리 즉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성도의 하나 됨은 바로 그 하나 됨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과 성도의 하나 됨이나 성도들 간의 하나 됨은 모두 하느님의 뜻에 오롯이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느님 사랑이라고도 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삶이라고도 한다고 했지요? (사도신경 참조)


 그 하나 됨의 삶이 천국에서는 일반적인 삶의 원리인데 그 하나 됨의 삶이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 때 세상이 그 하나 됨의 삶을 공격합니다. 세상은 자기를 부인하고 섬기고 품어 안아 주는 사람들을 가리켜 바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고 여깁니다. 강함을 추구하는 세상에게 하나 됨의 삶을 사는 이들은 약자로 보이게 되고 세상은 그 약자들을 무참하게 짓밟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세상에 남겨진 성도들에게 바로 그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삶이 얼마나 힘이 들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모두 듣도록 하느님께 그 기도를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바로 그 기도를 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하느님 우리 동생들을 보전하시어 그들이 세상에서 하나 됨을 잘 지켜 내도록 도와주세요그게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나 됨의 기도인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제 확실하게 이해가 가시지요?

인연하나 마지막 사랑 되게하소서 

그러면 이제 자연스럽게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 됨의 삶을 살게 될 때 겪게 되는 고난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말 성도의 고난은 필연적이어야만 하는 것인가?

23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성도가 하나 됨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께서 성도와 하느님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른 말로 십자가의 삶 순종의 삶을 살도록 하시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심 같이 그 하나 됨의 삶을 사는 이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내려오셔서 자기를 비우시고 하느님의 뜻을 당신 안에 채우심으로 완전한 순종의 삶 하나 됨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 삶이 고난으로 십자가로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세상은 저가 진짜 하느님의 아들일리도 없지만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하느님께 버림을 받아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라고 오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현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랑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무조건 잘해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시각으로 하느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느의 사랑을 오해하고 참된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이 하느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 세상을 보호해주고 잘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사람이 굶어 죽고 고통과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면 이럴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면서 왜 이런 일을 막아주지 않느냐고 삿대질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늘의 사랑은 하느님과 연합되는 지복의 상태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이 지으신 피조물과 하느님이 절대적 순종의 상태로 연합이 되는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인연하나 사랑하나 되게하소서♡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느님과 한 마음 한 뜻으로 한 목적지를 바라보며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당신과 연합시켜 당신이 누리시는 모든 하늘의 풍요를 누리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한 한 무리가 있으니 그 무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당신과 연합하여 영생을 살 존재들을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만들어 가시는 모든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역사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과 연합하여 영생을 사는 존재가 되기 위해 이 세상의 힘들을 부정당하는 사건과 사고를 당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거기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사람이 쫄딱 망해서 하느님 앞에 납작 엎드리게 되었습니다. 상황 자체는 하느님의 무관심이나 하느님의 저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온 정성을 기울이느라 하느님 섬기는 일에 소홀히 했던 사람에게 자식으로부터 큰 실망을 하게 되는 사고가 생겼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가 하느님과 더욱 긴밀하게 교제를 하게 되었다면 거기에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는 겉으로 보기에는 하느님의 저주처럼 보였습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을 버리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뜻이 완전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신 것입니다.

 

완전한 순종을 하신 것입니다. 그 순간 예수님과 하느님은 완전하게 하나였습니다. 그 상태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사랑의 완성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가 이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보전하시는 은혜를 입고 하나 됨의 삶 십자가의 삶을 잘 살아낼 때에 세상은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손가락질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게 바로 진짜 사랑이라는 것을 세상에게 증거 하게 하기 위해 하느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된 십자가의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인연하나 사랑하나 되게하소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도 바오로 몸에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 같은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 가시라는 단어 스콜롭스라는 단어는 생선 가시나 선인장 가시 등의 작은 가시가 아니라고 했지요?

스콜롭스는 전쟁 포로 중 영향력이 있는 적장들을 본보기로 뽑아서 쇠나 나무 꼬챙이를 가지고 옆구리를 뚫어서 끌고 다녔던 그런 무시무시한 말뚝을 말합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바오로가 자신의 병을 스콜롭스라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하느님이 자신에게 주신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고후12:7~10) 7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8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 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이 계신 삼층 천에까지 올라갔다 오는 등 너무 많은 계시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혹시 그가 교만해 질까봐 하느님이 적당한 병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질병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고쳐 달라고 세 번 기도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 번 기도라는 것은 죽도록 기도했다 는 의미라 했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사도 바오로가 교만하지 않고 당신께 순종하는 자로 살게 하시기 위해 스콜롭스라는 무시무시한 가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성도를 하느님과의 연합으로 인도하는 모든 사건과 사고는 전부 하느님의 사랑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병을 앓고 있는 바울을 보며 네가 믿는 하느님이 왜 그런 병도 하나 안 고쳐 주냐?’ 고 조롱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질병은 그와 하느님의 연합(사랑)의 도구로 쓰인 것이고 그가 그러한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의 처사에 순종하도록 하셔서 하느님과 그가 하나가 되는 사랑의 관계에 있음을 드러내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이 죄악 된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지에 관한 본보기의 삶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고 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서 이 땅에서 이 세상 풍속을 좇는 삶이 아닌 하느님께만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길에 십자가와 자기 부인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연합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 됨이며 그게 바로 하늘의 사랑 속에 있는 이들의 삶인 것입니다. 23절의 내용이 이제 완전히 이해가 가시지요?

아름다운 인연하나 되게하소서 

  

그러한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 됨의 삶은 이미 창세기부터 계시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강조하려 하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삶과 하나 됨의 삶 자기 부인의 삶의 필연성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하느님께서 왜 그 많은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셨는지 아십니까?

(신명7:6~8) 6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 몸바친 거룩한 백성이 아니냐?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세상에 민족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너희를 뽑아 당신의 소중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7 야훼께서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들보다 수효가 많아서 거기에 마음이 끌리셨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너희는 어느 민족보다도 작은 민족이다. 8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그 맹세를 지키시려고 야훼께서는 당신의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신 것이다. 그리하여 에집트 왕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건져 내셨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하느님이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그들의 조상에게 하신 계약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계약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에게 하신 계약을 말합니다.

(창세22:17~18) 17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18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계약을 하시는데 아브라함의 즉 그의 후손을 크게 성하게 하여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씨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성자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바오로가 이야기합니다.

(갈라3:16) 16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실 때에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후손들에게' 라는 말 대신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네 후손에게' 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한 사람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그 이스라엘에서 하느님의 진정한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게 될 것이기 때문에 아울러 그 이스라엘이 진정한 하느님의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 되게 하소서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기보다 예수님만을 사랑하신 것이고 그 예수님은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품으신 이스라엘의 대표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예수님과 동일한 하느님의 장자로 여김을 받는 자들인 것이며 진짜 장자이신 예수님과 동일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임을 그러한 기록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창세기 22장에서 그 후손은 대적의 문을 얻는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원수를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 계약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나왔던 계약입니다.

(창세3:15) 15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여기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이 바로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의 계약에 나오는 씨와 같은 인물입니다. '후손'이라는 단어와 ''라는 단어는 제라라는 같은 단어입니다. 그 여자의 후손이 요한 묵시록에도 나오지요?

(묵시12:3-6)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큰 붉은 용이 나타났는데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고 머리마다 왕관이 씌워져있었습니다. 4 그 용은 자기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리고는 막 해산하려는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그 아기를 삼켜 버리려고 그 여자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5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릴 분이었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느님과 그분의 옥좌가 있는 곳으로 들려 올라 갔고 6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 곳은 하느님께서 천 이백육십 일 동안 그 여자를 먹여 살리시려고 마련해 두신 곳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여자는 교회를 말하고 여자가 낳은 아이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창세기 315절의 여자의 후손이 바로 요한묵시록 12장의 철장을 든 아이인 것입니다. 교회인 여자가 예수를 낳았다는 것은 교회의 구원을 위해 예수가 오셨다는 것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반드시 예수와 같은 하느님 나라 자녀로 새롭게 완성되고야 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다른 말로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이신 성자가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 일이 반드시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얻는 것은 하느님의 살이 찢기고 뼈가 으스러지는 십자가라는 해산의 고통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자가 교회를 낳는다고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창세기 22장에서 찾아 본 바에 의하면 대적의 문을 취하여 승리를 선포하게 될 아브라함의 씨는 문자 그대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믿음의 후손 즉 교회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그걸 그대로 요한묵시록 12장으로 가져가 대입을 해 보면 여자가 '교회를 낳는다는 말과 동일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탄생하게 되고 완성되는 것은 필연적이며 확정적이라는 걸 선언함과 동시에 그렇게 성도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는 데에는 성도의 삶에 해산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수반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작은 모형이 라헬의 죽음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라헬이 베들레헴 길가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지요? 아무런 자격도 없고 임신도 할 수 없었던 라헬이 약속의 후손인 야곱의 선택과 사랑을 받아 이스라엘의 어미가 됩니다.

그 옛사람으로서의 라헬이 교회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을 완성하고 (베냐민을 낳으므로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으로 대표되는 북이스라엘과 남 유대의 주요지파를 완성한 것이므로) 죽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 즉 교회가 탄생하는데 거기가 바로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걸 마태오가 이렇게 인용합니다.

(마태2:16~18) 16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대중하여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 18 '라마 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 구나!'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오심에서 기인한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아이들의 살해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라헬의 이야기가 등장하지요? 라헬은 옛 사람을 입고 있는 구원받은 하느님의 신부를 상징한다고 했지요? 그 라헬이 두 자녀 즉 교회를 바벨론에게 빼앗겼습니다. 그건 예레미야 31장에 자세히 나오지요? 지금 이 마태복음 2장은 바로 그 예레미야 3115절 이하를 인용한 것입니다. 바벨론은 요한묵시록에서 하느님을 대적하는 원수 마귀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바벨론화 되어 있던 이스라엘이 라헬에게 돌아오게 되는데 다른 말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것을 마태가 예수님의 오심에서 인용하여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데에 라헬의 죽음이 전제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느님의 택한 백성은 반드시 하늘 백성으로 완성이 되고야 마는데 그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성육신)과 십자가 즉 하느님의 해산의 고통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말이며 우리 측 관점으로 보았을 때에는 성도의 하느님 나라 자녀로서의 완성이 옛 사람의 죽음(라헬의 죽음) 다른 말로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을 통과하지 않고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인연하나 사랑하나 하나 되게하소서 

  

마태복음에서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이 다 죽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그렇게 자기 의지로 죄를 지을 수 없는 나이에도 죄의 삯인 죽음에 노출된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인을 구원해 내시기 위해 예수가 오셨다는 것이며 통곡하고 있는 라헬이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고 잃었던 자녀가 돌아옴으로써만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므로 반드시 그 죽은 자들을 살려내셔서 완성하시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 예수에 의해 구원을 얻은 이들 또한 예수가 겪으신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하느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35:16~19) 16 그들이 베델을 떠나 가는 도중, 에브랏까지는 아직 얼마 더 가야 하는 데서 라헬이 몸을 풀게 되었다. 난산이었다. 17 아기를 낳지 못해 고생하는데 산파가 '걱정하지 마셔요. 이번에도 아들입니다.' 하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18 마침내 라헬은 죽게 되어 숨을 거두면서 아기 이름을 벤오니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기 아버지는 베냐민이라 불렀다. 19 라헬은 에브랏으로 가는 길가에 묻혔다.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다.  

 

라헬이 베냐민을 어떻게 낳습니까? 심한 산고하다가 낳습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은 뒤에 이스라엘이 완성이 되고 옛 사람 라헬이 죽는 것입니다. 그 일을 베들레헴의 예수가 시작하시는 것이고 예수에 의해 출생한 성도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의 삶을 살며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계획해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창세3:16)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바로 이 이야기가 성경 전체에 편만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 하느님 백성들의 탄생과 완성에 관한 원시 모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백성이 죄를 짓고 그들에게 잉태하는 고통이 더해지고 결국에는 그들이 자식을 낳게 되고 하는 것이 모두 하느님의 창조이전의 작정 속에 다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도의 십자가도 이미 하느님의 계획 속에 다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 얻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사신 그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삶을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에페소 교회에게 이러한 편지를 쓴 것입니다.

 

(디모전2:9~15) 9 그리고 여자들은 정숙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해야 합니다. 머리를 지나치게 꾸미거나 금이나 진주로 치장을 하거나 비싼 옷을 입지 말고 10 오직 착한 행실로써 단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공경한다는 여자에게 어울립니다. 11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12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13 먼저 아담이 창조되었고 하와는 그 다음에 창조된 것입니다.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하와가 속아서 죄에 빠진 것입니다. 15 그러나 여자가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믿음과 사랑과 순결로써 단정한 생활을 계속하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인연하나 사랑하나 되게하소서 

이 권고는 일차적으로는 에페소 교회의 특별한 상황을 지적하며 여자들의 경거망동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질서 속에서 여자는 절대 남자를 다스리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며 여자들이 교회에서 잠잠하게 지낼 것을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여자는 절대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조용히 배우기만 해야 한다는 그러한 남성 우월주의를 조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에페소 교회는 고린도 교회처럼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던 것이 분명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신비한 은사를 가진 여자들이 그 은사를 자랑하며 교회를 소란스럽게 했고 어떤 여자들은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에게 공개석상에서 곤란한 질문을 하는 등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러한 여자들에게 남편이 있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물을 것이지 왜 공개석상에서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해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느냐며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경고를 했던 것입니다. 그걸 모든 여자와 남자에게 적용해서 여자는 절대 교회에서 입도 뻥끗하면 안 된다고 공식화하여 가르치는 건 잘 못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죄에 빠진 여자 하와입니다. 그들은 절대 남편이신 하느님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여자는 남편이 여자의 죄 때문에 희생을 감수하여 십자가를 진 것처럼 인생 속에서 해산의 고통을 통과하여 결국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구속사의 이야기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에서 아담 그리고 하와에서 짐승으로 이어지는 질서 체계가 제대로 잡혀서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에 해산의 고통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여자인 교회의 산고가 필연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에 멸망의 자식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요한17:12) 12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이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그 동안에 오직 멸망할 운명에 놓인 자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를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멸망의 자식은 유다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멸망의 자식 유다는 어떤 무리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성경에서 예언이 되어있던 사람입니다. 쉬운말로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단순히 예수님을 배반하여 예수님을 팔아먹고 자살을 하는 한 개인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구속사의 순서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소품이었던 것입니다.

 

(시편41:9) 9 흉허물없이 사귀던 친구마저 내 빵을 먹던 벗들마저 우쭐대며 뒷발질을 합니다.

(시편55:11~12) 11 파괴가 성 안에 끊이지 않고 장터마다 폭력과 사기가 판을 칩니다. 12 나를 모욕하는 자가 원수였다면 차라리 견디기 쉬웠을 것을, 나를 업신여기는 자가 적이었다면 그를 비키기라도 했을 것을


나라와 민족과 교회가 하나 되게 하소서 

  

잘 생각해 보세요. 하느님이 신뢰하던 친구요 하느님과 함께 먹던 자인데 하느님을 배신한 최초의 인간이 누구입니까?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죄를 내포하고 대표하는 존재가 유다라는 모형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15절의 하느님의 계약에 의하면 그 아담과 하와의 죄는 여인의 후손에 의해 머리를 밟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여자인 교회는 원수인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라는 멸망의 자식이 교회의 탄생에 앞서 배반을 하고 죽는 것입니다.


인내심을 갖고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오늘 본문의 멸망의 자식이라는 단어가 사도 바오로의 편지 데살로니카후서에 똑같이 등장합니다.

(데살후2:1-4) 1 교우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일과 그분 앞에 우리가 모이게 될 일에 관해서 부탁할 말씀이 있습니다. 2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고 어떤 사람들이 말하더라도 여러분은 지성을 잃고 쉽사리 흔들리거나 당황해서는 안 됩니다. 아마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이나 혹은 말씀을 전한다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또 우리가 이런 말을 편지에 써 보냈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3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날이 오기 전에 먼저 사람들이 하느님을 배반하게 될 것이며, 또 멸망할 운명을 지닌 악한 자나 나타날 것입니다. 4 그자는 사람들이 신으로 여기는 것이나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자기 자신을 그보다도 더 높이 올려 놓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성전에 자리잡고 앉아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멸망의 자식이 등장할 거라고 합니다. 이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 유다를 가리키는 멸망의 자식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딱 두 군데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는 하느님 위에 앉아서 자기를 보여 하느님이라 하는 자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그게 아담이며 하느님을 팔아먹은 유다이며 아담 안에서 타락한 여러분과 저입니다.

그 죄 덩어리들이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완전히 멸해질 것이고 그 후에 온전한 하느님 나라가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구속의 순서를 설명해 주시기 위해 아담의 타락과 원시복음 유다의 등장과 죽음 등이 성경에 설명용 교보재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그러한 인본주의의 망령이 더욱 강력해져서 인간들이 그야말로 기고만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기고만장한 죄의 상징으로 어떤 인물이 나타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점점 더 하느님을 짓밟아 갈 것이고 지금도 그러한 배도는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때가 될 때까지 당신의 일반 은총으로 그것들을 억제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어느 날 하느님의 일반 은총이 모두 거두어 질 때 인간들의 자아숭배는 극에 달할 것입니다. 그게 사탄이 무저갱에서 풀리는 일인 것입니다. 물론 상징입니다.

그때 하느님은 그 죄를 모두 몰살시키시고 당신의 백성들의 나라를 완성시키실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창세기부터 차근차근 점층적으로 설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후2:8) 8 그 때에는 그 악한 자가 완연히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는 다시 오실 때에 당신의 입김과 그 광채로 그자를 죽여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이렇게 죄의 세력이 완전히 죽고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백성들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 속에서도 일어나고 성도의 인생 속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인생 속에서는 그 죄와 성령의 싸움이 전쟁처럼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인류의 역사를 하느님과 마귀의 전쟁처럼 비유하여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가 십자가를 지는 삶이며 자기부인의 삶이며 하나 됨의 삶이며 사랑의 삶인 것입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언젠가 하느님의 은혜로 모든 죄가 완전히 소멸되고 우리는 순결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의 하느님 백성으로의 완성과정이 예수님과 멸망의 자식 가룟 유다 그리고 십자가로 미리 교회에게 예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계시가 되었던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처럼 하나 되게 하소서(요17:20-26) 

하느님의 백성으로 창조가 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 하느님은 그들의 죄를 무죄한 짐승을 죽여 덮어 주시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 멸망의 자식이 나와 그 멸망의 자식이 죽고 교회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멸망의 자식이 죽는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삶 속에서도 죄가 폭로되고 그 죄가 십자가의 삶에 의해 소멸 되면서 하느님의 백성이 완성지점에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 완전한 심판이 올 것이라는 게 데살로니가 후서 28절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타락과 짐승의 죽음은 정녕 죽으리라는 하느님의 계약이 짐승에게 적용이 되어 죽어야 할 아담이 짐승 안에서 죽고 아담이 살아나는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예수님의 제자 중 유다가 배신을 하고 그 유다가 죽음으로(멸망의 자식인 죄가 죽음으로) 교회가 완성이 되는데 그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우리 성도의 모든 죄가 죽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는 구속사의 완성이 우리의 자기부인의 삶과 십자가의 삶에서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탄생이 되는 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이 역사 속에서 창조부터 종말까지 하느님만 사랑하고 의존하며 순종하는 죄가 전부 사라진 완전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모든 일을 진행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성도의 삶 속에서 죄가 죽어가는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왜 하느님은 유다를 멸망의 자식으로 택해놓고 그를 지옥에 보내시느냐?’ 라든지 하느님이 다 계획해 놓고 지옥은 왜 만드냐?’는 식의 어리석은 질문을 하시면 안 됩니다.

유다는 하느님 백성들의 완전한 탄생이 어떤 과정 뒤에 이루어 질 것인지를 성경의 독자인 교회에게 설명하기 위한 멸망의 자식 소멸되어야 할 인간의 죄를 상징하는 소품인 것입니다.

 

우리도 그 유다처럼 소품으로 쓰이다 하릴없이 지옥 불에 타버릴 그런 티끌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멸망 받을 유다들과 구별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양육하시고 완성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은혜를 올바로 이해한 사람들이 유다가 불쌍하다느니 하느님은 불공평하신 분이라느니 그런 투정을 부릴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이전부터 당신의 백성들만을 염두에 두시고 그들을 위해 우주를 창조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완성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멸망의 자식을 거론하기 전에 세상과 하느님 백성을 선명하게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17:9) 9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세상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이 사람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사랑의 대상이지만 멸망의 자식은 하느님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당신사랑의 대상이 아닌 티끌들을 불에 태우시는 것은 절대 불공평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그렇게 티끌로 지옥에서 함께 불탄다 해도 아무 불평 할 수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감격 속에서 찬양하면 되는 것입니다. 유다는 하느님의 선택과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고 하느님사랑의 대상인 교회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멸망의 자식들의 실체와 그들의 결국을 설명하기 위해 택해진 하나의 티끌일 뿐입니다.

 

이제 우린 예수님의 십자가와 자기부인의 삶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성도의 삶이 어떻게 전개가 될 것인지를 분명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건 이미 창세기 때부터 아니 창조이전부터 작정이 되고 예정이 된 삶이므로 거기서 벗어날 길을 찾으려 하시면 안 됩니다. 그냥 담담히 받아들이시고 예수님과 하느님과 하나 되는 삶을 이 세상에게 보여주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 됨의 삶 속에서 우리의 죄가 온전히 죽어 완전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잘 이겨내십시오.

 

 

살롬 -*^ㅇ^*-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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