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7.06)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06 조회수1,876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8년 7월 6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제1독서 아모 8,4-6.9-12

4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5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짜 저울로 속이자.

 6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기 밀도 내다 팔자.”
9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나는 한낮에

해가 지게 하고 대낮에

땅이 캄캄하게 하리라.

10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

나는 모든 사람이 허리에

자루옷을 두르고 머리는

모두 대머리가 되어

외아들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게 하고 그 끝을

비통한 날로 만들리라.
11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12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찾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찾아내지 못하리라.
복음 마태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평소 조용하고 신사처럼

매너가 늘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형제님이 계십니다.

화도 잘 내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이해를 해주는 멋진 분이지요.

따라서 사람들에게 늘 좋은 인상을

남기셨고 많은 이들이

 이 분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운전 중에 자기 차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위험하게 운전하는

차를 만난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이제까지 볼 수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글쎄 크게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모습을 매스컴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엄마가 차를 번쩍

들어 올렸다는 이야기,

중병으로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초인적인 의지력을

발휘해서 이겨냈다는

이야기 등을 말이지요.

즉, 평소와는 다른 모습,

 이제까지 하지 못했던 행동을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뛰어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형제님

역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사실 그냥 웃고 넘기면 되는데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쓸데없는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인적인 힘을

사소한 곳에서 발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곳에서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초인적인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 모습이야 말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간절하게

원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나를 따라라.”라고

부르십니다.

당시에 세리는 큰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민족의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바치는

사람이어서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는

죄인이고,

또한 그들이 만지는 돈에는

 황제의 얼굴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늘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큰 죄인이라는 것이지요

. 이러한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당시의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앞서

말씀드렸던 사랑이라는

초인적인 힘을 하느님을 위해

쓸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즉,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은

지금 모습이 그대로

 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주님께서는 분명히 변화될 수

있음을 아신 것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사람은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의로운 사람은 지금 상태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죄인은 어떻게 변화될까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인인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이 땅에 오셨고

계속해서 당신께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 각자를

똑같이 부르십니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라고 부르십니다.

쓸데없는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길입니다.

어떤 가치 있는 행동을 하지 아니한 날,

그 날은 잃은 날이다(자콥 보바트)

화분이 이렇게도 사용됩니다.

우리도 다양한 곳에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지혜"

(무옌거, ‘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중에서)

노벨상 수상식에서

중국 소솔가 모옌이 연설했다.

 그중 인상 깊은 이야기는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

에 관한 것이었다.
모옌이 소년이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추수가 끝난 밭에

밀 이삭을 주우러 갔다가

밭을 지키는 사람에게

흠씬 얻어맞았다.

상대는 어머니를 때리고,

 입에서 피를 흘리는 그녀를

 남겨 둔 채 휘파람까지 불며

기양양하게 사라졌다.
십 수 년이 흐른 뒤,

모자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그때 밭을 지키던

사람과 마주 쳤다.

상대는 백발성성한 노인이,

소년 모옌은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모옌은 당장 달려가

그의 멱살을 잡고 어머니의

복수를 하려 했다.

그때 어머니가 그를 막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아들아, 그때 나를 때린 사람과

지금의 저 노인은

같은 사람이 아니란다.”
어머니는 눈앞의 백발노인을

 이미 용서했다고 했다.

 이왕 용서한 마당에

다 큰 아들이 자신의 복수를

하겠다고 또 다른 죄를 짓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비록 자신 역시 그 일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해도 말이다.
사실 용서의 핵심은 과거의

나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 감정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용서에는 타인을 향한

 측은지심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선량한

지혜가 필요하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